50년 넘게 한결 같은 맛…해장국 한가지 메뉴, 좋은 식재료와 정성이 기본

‘배고픈 이들에게 든든한 한 끼 요깃거리 ’정신으로 50여년 이어와

새벽 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 고기, 뼈, 된장, 우거지 등 ‘균형’

‘해장국’ 한길 인생…미국 유학 마친 아들이 대(代) 이어

참 ‘무던’하다. 특별한 면이 돋보이지도 않는다. 대단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뚜벅뚜벅 걸었다는 생각이 들뿐. ‘무엇 때문에?’라고 묻는 것은 허망하다. 그저 그렇게 해왔다. 자연(自然)이다. 이제 50년을 넘긴 ‘용문해장국’ 그리고 대표인 김용길씨 이야기다.

어려운 시대 서민과 함께해 온 반세기

1960년대 중반 문을 열었다. “언제부터 하셨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다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에게 묻는다. “여보, 우리 언제부터 가게 문 열었지?”라고. “아마 1966년 무렵”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한두 해 틀릴 수도 있다.

문을 연 이유를 물어볼 필요는 없다. 1960년대 초반. 한국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채 지워지지 않았을 때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정도 지났을 무렵. 폐허가 된 서울은 아직 그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을 때다.

서울토박이들은 기억하는 음식점이 있다. 무너진 건물에서도 국밥을 팔던 집이다. ‘동자옥’. 동자동에 있는 허름한 음식점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인터넷에는 ‘동자옥’의 옛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전쟁의 상처로 생긴 폐허 같은 건물. 그런 건물의 한 귀퉁이에 문을 열었던 허름한 밥집, 음식점이다.

서울역 언저리에 군인들이 사용하던 TMO(Transportation Movement Office)가 있었다. ‘동자옥’은 그 바로 곁에 있었다. ‘옥(屋)’은 일본식 표현이다. 흔히 ‘YA’라고 읽는다. 일제강점기의 상당수 음식점들이 이 표현을 썼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이름, ‘청진옥’이나 예전 ‘이문설렁탕=이문옥’의 경우도 바로 그런 이름들이다. ‘동자옥’도 그 시대의 이름이다.

가난하고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서울역 언저리에 ‘역마차다방’이 있었던 1960년대 중반, 음식점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지금도 고맙습니다. 늘 기억하고 있지요. ‘동자옥’ 사장님, 아주머니에게 음식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친구 어머님이셨는데 ‘왜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묻곤 곧 음식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의 용산전자상가 자리에서 가게를 열고 있다가 어느 날 음식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이라고 하지만 대단한 초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음식점을 하면 경제적으로 얼마쯤이라도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주로 동자동, 청파동, 지금의 용산전자상가 자리를 연결하는 지역에서 살았고, 일했다. 지금의 용문동 역시 청파동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만나는 곳이다. 용문동 곁은 바로 용산전자상가 지역.

음식점을 시작하면서 잠깐 곁눈을 떴던 적도 있었다. 냉면집을 해보고 싶어서 냉면 뽑고 육수 내는 일을 배웠다. 당시 유명하던 ‘삼오정’에서 냉면 일을 배웠다가 곧 해장국 집 일로 돌아왔다.

참 고집스럽게 운영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용문해장국’의 메뉴 때문이다. 그동안 쭉 한 가지 메뉴만 고집했다. 지금도 벽면에 광고지, 포스터라고는 없다. 메뉴를 적은 하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해장국 7천원’. 덕분에 가게나 손님 모두 편하다. 주문을 받을 필요도 없다. 몇 명이냐, 고 묻고 바로 음식이 나온다.

“서민적인 음식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 특히 택시기사들 같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지요. 지금은 야채시장에 물건을 공급하는 트럭기사들이나 화주(貨主)가 전부 가락동 등에 있겠지요. 당시는 용산 일대에 화물창고도 많았고 이른 새벽에는 물건을 내려놓고 지방으로 흩어지는 기사, 화주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이른 새벽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해장국 이외에 이른 새벽의 요깃거리가 될 만한 음식은 없다.

지금도 ‘용문해장국’의 문 여는 시간은 독특하다. 새벽 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른 아침 일을 하던 택시기사들은 아침 식사를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다. 집에 가서 먹기엔 이른 시간이고 문을 여는 식당들도 드물다. 새벽 2시부터 택시기사들이 몰려온다. 술은 팔지 않는다. 한반도의 주당들이 술을 마시는 시간은 대략 저녁 7시부터 새벽녘까지다. 이 시간 ‘용문해장국’의 문은 닫혀 있다. 술꾼들보다는 밥 먹을 사람들이 찾아오라는 주인의 ‘주문’인 셈이다. 술꾼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했다면 더 많은 돈을 벌었을 수도 있지만 김용길 대표는 한결같이 ‘밥집’을 고집했다.

문을 열었을 1960년대는, 물론, 서울이 지금보다는 아주 작을 때였다. 빌딩이나 도시의 규모가 지금에 비하면 마치 1/10 정도로 느껴지던 시기.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서울은 조금씩 변해갔다.

사람은 길을 따라 움직인다. 이른 새벽 도성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지금의 혜화동 언저리 동십자각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남양주 일대에서 땔감을 등짐에 지고 서울로 들어와서 지금의 종로2가 피맛골 무렵에 나뭇짐을 부렸다. 이 일대에 지금도 성업 중인 ‘이문설렁탕’이나 ‘청진옥’이 있었다. 모두 이른 새벽 도성 바깥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온 사람들을 위한 밥집들이다.

서울의 서북쪽에는 무악재가 있다. 무악재 너머의 홍제동 일대에는 화장터가 있었던 시절이다. 이 무렵에서 땔감, 나물 등을 장만한 사람들은 무악재를 넘어서 영천시장으로 더러는 지금의 북창동, 남대문 일대에 다다랐다. 용산, 남대문, 북창동 일대에 초가집들이 있던 시절, 이 언저리에도 크고 작은 장터가 섰다.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든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들입니다. 이분들의 요깃거리가 되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식재료와 ‘균형’의 맛

해장국의 기본은 ‘고기’와 뼈다. 실제 ‘용문해장국’의 해장국 그릇에는 큼지막한 뼈와 고깃덩어리가 들어 있다. 손님들은 ‘왕건이’가 들어 있다고 좋아한다. 예전에는 국밥 스타일로 밥을 말아서 내놓았다. 원래 뼈를 잘 곤 국물은 투명하다. 맑은 국물에 밥을 말면 밥알이 낱낱이 보일 정도로 국물이 맑다.

해장국의 핵심은 뼈에 붙은 고기와 더불어 된장과 우거지, 시래기다.

“처음에는 된장을 직접 담아서 사용했습니다. 소비량이 늘어나고 공간도 좁고 하니 된장을 담아서 보관하는 것도 힘들어지지요. 가게 문을 열고나서 오래지 않아 된장을 모아서 사용했습니다. 1960년대, 70년대에는 시골을 다니면서 전통된장을 모아서 서울 음식점에 공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별도의 장소를 정해서 된장을 보관하고 사용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경동시장이 시골의 전통 된장 집합장소였지요. 중간에는 그렇게 모아둔 된장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가게에만 시골 된장을 모아서 공급해주던 곳도 있었지요. 지금은 모두 불가능하니 좋은 된장을 구해서 필요한 만큼씩 가져다 사용합니다.”

식당 아래에는 식당 내부만큼 넓은 저장 창고가 있다. 냉장, 냉동고 시설도 있고 상온 보관 공간도 있다. 고기, 된장, 우거지 등이 그곳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예민한 손님들은 ‘용문해장국’의 맛은 우거지와 된장 맛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배추 우거지를 슬쩍 말려서 시래기 상태로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단맛이 강해지고 씹는 식감도 좋아집니다. 해장국은 고깃국물이면서 한편으로는 된장과 우거지의 맛입니다. 잘 말린 우거지, 시래기는 특유의 단맛이 강하고 한편으로는 깊은 국물 맛을 냅니다. 자연의 단맛, 깊은 맛은 뼈, 고기, 된장, 우거지 등이 잘 어우러져야 됩니다.”

균형이다. 고기의 맛이 강해지면 기름진 맛이 앞선다. 뼈를 고아서 국물을 낸다. 고기를 삶아서 국물을 낸다. 끓이는 중간 중간 기름을 걷어내고 두 종류의 국물을 합친다. 고기 국물을 많이 섞으면 국물은 쉬이 상한다. 국물이 삭는다. 작은 그릇에 내는, 대단할 것 없는 국물이지만 그 속에는 적절한 균형이 존재한다. 고기와 뼈 그리고 우거지와 된장의 균형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다른 존재를 위하여 자신을 낮춘다.

고기와 뼈, 우거지와 된장 이외에도 미처 몸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많다. 새우젓도 그러하고 깍두기에 들어가는 고춧가루, 마늘 등도 마찬가지다. 신안 천일염을 적절히 간수를 빼고 사용한다. 새우젓은 매년 강화도 일대에서 일일이 살펴보고 ‘맞춰서’ 사용한다. 각별히 중요한 것도 없지만 어느 식재료 하나 허투루이 볼 수도 없다.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면 어느 사이 국물은 제 맛을 낸다. ‘용문해장국’ 손님들이 깍두기를 남기지 않는 이유다.

음식의 맛은 식재료를 구하면서 결정된다. 좋은 식재료를 구한 다음, 오랫동안 더불어 일했던 주방에 맡기면 일정부분 음식 맛은 유지된다. 좋은 식재료는 그 값어치를 한다. 해장국 국물 맛이 무너졌다 해도 손님상에 못 내놓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나쁜 식재료로 좋은 음식 맛을 구하는 일은 힘들다. 나쁜 식재료로 찾을 수 있는 좋은 음식 맛은 없다. 음식 만드는 일 만큼이나 식재료 구입에 신경을 쏟는 이유다. 10년, 20년 단골로 고기, 뼈를 구해주는 거래처가 소중한 이유다. 아주 가끔 좋지 않은 고기가 들어오면 점검 단계에서 돌려보낸다. 오래된 거래처가 아니면 섭섭해 한다. 더러는 거래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 돈 낸다고 ‘갑’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식당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단골 거래처는 든든한 힘이 된다. 단가가 올라가도 제일 나중에 가격을 올리고, 고기 질이 좋지 않은 계절에는 다른 곳보다 먼저, 꼼꼼히 챙긴다. 오래된 거래처, 오래된 직원들이 많은 이유다.

대단한 ‘창업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드시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다. 그저 매일매일 새벽 2시에 해장국 집의 문을 열었다. 한밤중에 버너의 불을 지피고 해장국 국물을 마련했다. 지내고 보니, 그 세월이 50년을 넘겼다. 보람은 있었다. 배고픈 이들에게 든든한 한 끼의 요깃거리를 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청파동 언저리에서 자랐다. 지금의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까지 하천이 흘렀다. 마포강이다. 그 강에 배가 떠다니고 아낙들은 빨래를 했다. 이제 일흔의 나이를 넘기고 여든을 바라본다. 아들이 듬직하게 뒷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아들에게 가장 험하고 힘들며 위험한 일을 시킨다. 식재료 보는 일을 가르치고 뼈 써는 일도 일일이 가르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새벽부터 묵묵히 해장국집 일을 해내는 것이 고맙다.

‘경성전기’에 다녔던 아버지 무릎 아래서 자라 ‘용문해장국’을 열었다. 50년이 흘렀다. 이제 미국유학을 마친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잇고 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용문해장국’ 김용길 대표. 50년 이상 용문해장국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한결 같은 걸음으로 뚜벅뚜벅’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용문해장국’ 외관. 택시기사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화물차의 화주들이 많이 찾았던 집이다.

-‘용문해장국’의 해장국, 선지

-해장국은 균형이 잡혔을 때 맛있다. 고기와 뼈를 곤 국물

인근 용산 맛집들

바다식당(존슨탕)

제대로 된 부대찌개를 내놓는 집이다. 이집 고유의 이름은 존슨탕이다. 이태원 골목 안의 외진 곳에 있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노포.

노아(파스타)

‘노력하는 아이들’에서 ‘노아’라는 이름을 땄다. 스파게티 종류와 피자가 수준급이다. 해방촌 외진 골목이지만 늘 복작거린다.

명화원(중식)

오래된 중식당이다. 위생이나 음식의 맛으로 말들이 있다. 3대 전승 중이고,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탕수육을 권한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