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의 북한식 콩비지 전문점… 시간, 정성으로‘한결같은 맛’유지

‘강산옥’ 메뉴는 콩비지 뿐, 함께 나오는 음식 재료들은 ‘최고급’

콩에서 두유를 빼지 않은 북한식 비지…영양분 그대로 남은 ‘된 비지’

돈 욕심 비우고 ‘오늘 같은 걸음으로’ 음식에 정성…점심 시간만 운영

60년 역사의 콩비지 전문점? 60년의 업력을 지닌 음식점은 그리 흔하지는 않다. 더욱이 콩비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음식이다. 음식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잊고 있는 음식으로, 한자리에서 60년을 보내고 있는 ‘강산옥’의 3대 전승 주인을 만났다. 이태림씨다.

청계천 4가, ‘강산옥’의 60년 역사

청계천 4가 언저리다. 바로 곁이 방산시장이다. 방산시장은 포장지 등을 전문으로 파는 시장이다. 방산시장을 아는 이들은 이 집을 찾기 쉽다. 겨울철 청계천 주변 나무들의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나면 간판이 겨우 보인다. 늦가을까지도 나무 이파리에 가려 간판을 찾기 힘들다.

간판은 작다. 그나마 식당은 작은 건물 2층에 있다. 2층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 참 특이하다.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제법 넓지만, 낡았다. 낡은 건물이다. 건물 역사마저 60년쯤 된다.

주인 이태림씨 할아버지, 할머니가 약 60년 전쯤, 이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콩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는 ‘강산옥’의 시작이다.

“지금 자리 바로 뒤에서 처음 콩비지 전문점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이 아주 낡았다고 하는데 1960년대 초반 처음 지었을 때는 최신식 건물이었지요. 청계천 일대에서는 제일 번듯한 건물이었고, 할아버지께서 이 건물 뒤편에서 콩비지 집을 운영하시다가 이 건물 2층으로 이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태림씨는 1963 년생이다. 현재의 낡고 오래된 건물이 갓 세워졌을 무렵 태어났다. 1960년대 초반의 청계천. 서울 시내 사람들 상당수가 청계천에서 빨래를 하고, 청계천 주변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절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 서울의 가난함은 청계천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가난한 지역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북한음식 전문점들, 맛집들이 청계천, 을지로 일대에 많이 남아있다. 북에서 월남한 이들은 이 지역에 자리 잡았다. 종로를 건너서 삼청동, 광화문 일대는 그때도 중심 지역이었다. 천변의 가난한 곳에 자리한 실향민들이 하나, 둘 북한음식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음식점들이 서울의 북한음식 전문점이 되었다.

조부, 조모는 두 분 모두 평안도 평양출신이었다. 이태림씨의 아버지 이경식씨도 마찬가지. 평양 출신이었다.

어머니 어깨 너머로 음식을 배우다

묘한 3대 전승이다.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 이태림씨의 어머니 임기영씨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창업에 참가했다. 어머니는 1934 년생으로 충남 서산이 고향이다. 부모님은 부산 피난시절 처음 만나서 결혼했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도와서 콩비지 가게의 일에 참가한 것이다.

어머니는 약 40년 동안 콩비지 집의 주인 노릇을 하다가 딸 이태림씨에게 가게를 넘긴다. 1999년 무렵. 이태림씨의 가게 운영 기간도 얼추 20년에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어깨 너머로 어머님이 음식 만드는 것 보다가 하나씩 익혔지요. 어머님에게 완전히 인수받고 나서 혼자서 가게 운영을 하는데, 그동안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음식 맛은 사용하는 재료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강산옥’의 메뉴는 단 한 가지다. ‘콩비지’다. 반찬이 그리 많지도 않다. 밥 한 그릇, 콩비지 한 그릇, 간장, 무채무침, 물김치다. 작은 상에 밥과 콩비지 등이 놓인다. 단출하다. 그 단출한 식탁에 놓이는 음식의 재료들은 모두 ‘최고급’이다.

“콩, 쌀, 무, 배추 등은 나름 제일 좋은 것으로 준비합니다. 돼지 등뼈나 콩을 공급하는 곳들은 대부분 20∼30년을 넘겼습니다. 오랫동안 거래를 하고 있으니 믿을 수 있지요. 좋은 식재료를 구입하면 그게 바로 손님들의 호평으로 이어집니다. 음식을 팔면서 스스로 깨우친 소중한 경험이지요.”

밥이 재미있다. 오랫동안 좁쌀을 사용한다. 밥 그릇 중간 중간에 노란 좁쌀이 보인다. 밥은 늘 찹쌀, 멥쌀, 좁쌀을 섞어서 사용한다.

“밥이나 콩비지를 지은 후 제가 먹어봅니다. 제 입맛에 맛있다 싶으면 그날 손님들의 반응도 좋습니다. 늘 손님들은 ‘입에 저울을 달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음식이 허물어진 날은 반드시 좋지 않은 반응이 나오지요.”

재미있는 것은 정작 이태림씨 본인은 콩비지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는 것.

“어린 시절에는 가족들이 콩비지 집을 운영하는데 저는 콩비지를 먹지 않았습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서 콩비지 맛을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에는 왜 먹는지 궁금했습니다. 지금도 콩비지의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데 손님들 중에는 콩의 풋 냄새를 즐긴다는 분들이 계시지요.”

비지, 이제는 잊은 참 맛있는 음식

‘비지’는 원래 ‘찌꺼기’다. 콩에서 두부 만드는 두유를 짜내고 남은 것을 말한다. 손으로 만져보면 푸석푸석하다. 비지, 콩비지에 관한 한, 남과 북은 전혀 다르다. 비지는 결국 콩에서 나온 것이니 어떤 비지나 콩비지다. 다른 작물의 비지는 없다. 그런데 유독 비지, 콩비지 혹은 되비지로 부르는 것은 남과 북의 비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을 경계선으로 남쪽의 비지는 그야말로 콩에서 두유를 짜낸 나머지 찌꺼기 성분을 말한다. 오래 전에는 두유를 짜내는 기술이 부족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찌꺼기라고 부르는 비지에는 영양분이 오히려 많이 남았다. 영양분뿐만 아니라 각종 식이섬유 등이 많으니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비지에 신 김치 등을 넣고 끓여 먹었다. 비지찌개는 충분히 맛있었다.

한국전쟁 때 피난 와서 남쪽에 정착한 이들은 ‘비지 먹는 걸 보면 남쪽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한식 비지는 두유를 빼내지 않은 것이다. 콩물을 끓여서 아무런 것도 빼내지 않고 그대로 만든 것이 북한식 콩비지탕 혹은 비지찌개다. 콩비지는 두유를 짜낸 찌꺼기가 아니라 콩 그대로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북한식 콩비지를 ‘되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양분이 그대로 남은 ‘된 비지’ ‘뻑뻑한 비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콩을 갈아서 두유 등 어떤 것도 빼지 않고, 돼지 등뼈, 살코기 등을 넣어서 푹 끓여서 되비지를 만들어 먹었던 실향민들은 남쪽의 멀건 비지찌개를 보면 ‘불쌍하다’고 했을 법하다. 대신 남쪽에서는 두유를 짜낸 비지를 일정 기간 발효, 숙성시켜 먹는 방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가정, 식당에서는 이 삭힌 비지도 잊었다. 별 맛도 없는(?)음식에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콩비지 맛을 본 이상, 비지도 삭힌 비지도 잊을 법하다.

그동안 콩에서 두유를 뽑아내는 기술은 상당 부분 발전했다. 웬만한 식당에서는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무료로 제공하지만 이미 그 비지는 예전과 달리 ‘맛과 영양 성분’들이 대부분 빠져 나간 것들이다. 기술의 발달로 두유성분을 많이 뽑아내니 비지에는 맹탕 찌꺼기만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콩과 비지의 역설이다.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맛없는 비지를 만들고 있다.

결국 북의, 원형 콩을 그대로 탕으로 만든 콩비지 탕이 남의 비지찌개를 이겼다. 장충동, 필동과 이름도 생소한 산림동, 주교동 일대에 평양냉면, 함흥냉면, 빈대떡, 순대와 더불어 콩비지탕 집이 무성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 ‘노포 맛집’이 되었다. 역사도 대부분 50년을 넘겼다. 피난 온 이들이 이 가게들을 처음 시작한 것이다.

오늘 같은 걸음으로 걷는다

이태림씨와 음식과 가게 이야기를 하면 퍽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원래는 저녁 9시까지 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도 늦게까지 가게 문을 여셨지요.”

이태림씨가 가게를 물려받은 다음, 가게 문을 닫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오후 9시에서 7시로, 오후 4시, 3시로 짧아졌다. 드디어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열고 더러는 재료가 떨어졌을 때 2시를 넘기면서 손님을 받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손님들에게 원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왜 저녁에 하지 않느냐고요”

굳건하게 버티는 것은 ‘지금 같은 음식을 앞으로도 꾸준히 내기 위해서’다. 그동안 넓은 곳에서 문을 열어라, 왜 가게를 넓히지 않느냐, 강남으로 이사 갈 생각이 없느냐, 지점이나 체인점을 하지 않겠냐는 등 많은 제안을 받았다. 돈을 벌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2층에 있는, 17평의 좁은 가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을 여셨고, 어머니가 평생 일했던 공간이다. 가게를 넓히면 어차피 종업원을 두어야 한다. 음식은 매일이 다르다. 메뉴라고 해봐야 콩비지 딸랑 하나지만, 같은 콩, 돼지 뼈, 채소로 만드는 음식임에도 매일이 다르다. 여름철 무가 맛없을 때는 무채 하나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혼자서 만들어도 더러는 망치는 날이 있다. 종업원을 여럿 두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역시 음식은 장담하기 힘들다.

“주방에 있는 고모님과 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정도입니다. 한계인 셈이지요. 돈 욕심 내지 않고 지금처럼 꾸준히, 평생 걸어볼 생각입니다. 점심시간만 문을 열고, 오후 3시면 문을 닫습니다. 매년 1월에는 문을 닫습니다. 솔직히 여름철에 콩국수를 팔 때는 매출이 조금 낫습니다. 그때 조금 더 많은 돈을 모으고 1월 한 달 쉽니다. 저도 재충전을 해야지요.”

서너 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게에 들렀던 꼬마가 자라서 중년의 나이에 이 집을 다시 찾는 경우가 있다. 참 고맙다. 어머니, 할머니가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 찾았던 이들이 다시 찾는다. 참 고맙다.

‘두부는 게으른 며느리에게 맡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두부나 콩비지 모두 콩으로 시작하는 음식이다. 게으름이 아니라 시간을 충분히 두고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 음식들이다. 하기야 어떤 음식인들 시간과 세월, 정성을 기울이지 않고 제대로 된 맛을 찾아낼 수 있을까?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강신옥’ 이태림 대표. 어머니가 40년 동안 맡았던 가게를 물려받은 이태림 대표가 20년 간 운영해 ‘강산옥’ 역사는 60년이다. '오늘 같은 걸음으로'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 ‘강산옥’의 콩비지 백반 한 상. 퍽 단촐하다.

-콩비지

-여름철의 콩국수

을지로, 청계천 맛집

우래옥

1949년 문을 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의 맛집, 냉면전문점이다. 가격이 비싸지만 불고기 등도 수준급이다. 역시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다.

춘천산골막국수

강원도 춘천 출신의 주인이 문을 연 집이다. 막국수를 처음으로 널리 알린 막국수 전문점이다. 현재 3대 전승 중이다. 대중적인 막국수집.

순희네빈대떡

종로5가에서 찾는 것이 빠르다. 광장시장 안에 있다. 기름을 충분히 두르고 튀긴 듯이 구워내는 빈대떡이 일품이다.

종호네콩비지

최근 몇 년 사이 가게 자리를 여러 번 옮기면서 약간 혼란스러운 집. 현재는 광장시장 한 쪽에 자리 잡았다. 대중적인 음식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