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어 찾은 ‘물’ 충무집 열어… ‘음식은 마음으로 만드는 것’ 실천

‘좋아하는 일’ 찾아 생선 관련 음식점 시작…통영, 부산 거쳐 서울 정착

부친 이어 충무 음식 소개…아들은 ‘충무김밥’집 운영

“마음으로 만드는 음식이 마음에 남는다” 유념해

목소리가 높지 않다. 자분자분 이야기한다. ‘음식에 대한 확신, 고집’이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느릿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음식은 음식의 맛이 있어야 한다. 음식의 양념이 과하면 음식이 아니라 양념의 맛이 난다. 서울 다동(무교동) ‘충무집’의 주인 배진호 대표 이야기다.

“주인 아들이 칼을 빌려달라고 하니”

지금도 ‘다시’ 만들기 힘든 것은 장어구이다. 아버지는 충무 항남동에서 장어구이 집을 운영했다. 아버지의 장어구이는 양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담백했다. 어린 시절 많이 보았지만 또렷이 기억하지 못함이 답답하다. 세상을 떠나신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물어볼 곳도 없고 알려줄 사람도 없다. 맛있는 장어구이는 지천이지만, 정작 아버지의 ‘담백하면서 장어 맛을 살린 장어구이’를 내놓는 곳은 드물다. 입에서 그 맛이 맴돌지만 그 맛을 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아버지는 늘 좋은 간장을 구해서 사용했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불가능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통영에 그렇게 많았던 ‘간장 집’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규모가 큰 간장 공장이 아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수제 간장을 만들었다. 자그마한 집에서 만들었던 그 간장들을 아버지는 꾸미꾸미 찾아서 가져오셨다. 간장이 사라졌다. 이제 맛있는 장어구이는 불가능할는지 모른다.

장어구이로 돈을 모은 아버지는 1964년 통영에 ‘희락장’을 세웠다. 상당한 규모의 일식집이었다. 지금도 ‘충무집’ 출입문 오른쪽에는 ‘희락장’의 낡고 오래된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어린 시절, ‘희락장’에서 배진호 대표도 처음 ‘칼’을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일식집 주방장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데요. 다른 사람이 칼을 빌려달라고 하면 아마 빌려주지도 않았고, 화를 냈겠지요. 주인 아들이니까, 어쩔 수 없이 내놓았겠지요. 조리사들의 칼을 빌려서 사용했던 게 어린 시절의 가장 재미있었던 추억입니다.”

10대의 어린 소년은 주방식구들에게 칼을 빌려서 생선을 손질했다. 항남동은 당시 통영의 ‘명동’이었다. 세병관이나 지금의 서호시장, 바닷가가 지척 간이었다.

음식을 만지면 즐거웠다, 그때는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평생 ‘통영음식’과 더불어 할 삶이었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음식, 음식점 경영을 수업했다. 학교 공부는 ‘남 따라갈 정도만’ 했다.

생선은 늘 가까이 있었다. 가게에도 생선을 흔했고 10분 정도를 걸어 나가면 만나는 바닷가 포구, 어선들에도 생선은 흔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 늘 몇몇 종류의 생선들은 통영의 맑은 햇볕 아래 몸을 말리고 있었다.

생선은 날 것으로, 반쯤 말린 상태로, 건조생선으로 그리고 젓갈로 늘 가까이 있었다.

생선을 손질했다. 회도 뜨고 반쯤 말린 생선을 찌는 일도 해보았다. 생선으로 탕이나 국을 끓이는 일도 매일 여러 번 보는 일상사였다.

유복한 집이었다. 1960년대 초반, 초등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과외 선생이 있었을 정도였다. 5남매의 장남.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지만, 특별히 공부를 하라고 등을 떠밀지도 않았다. 10대의 나이가 그렇게 흘러갔다. 중학교 무렵에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나이가 든 주방식구들의 일을 거들었다. 재미있었다.

“그때는 그게 천직인 줄 몰랐던 거죠. 생선 만지고 음식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으니 그 길로 계속 나갔어야 하는데, 한 10년 곁눈을 팔았지요.”

1983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동안은 음식점 일을 ‘재미삼아’ 했었다. 아버지는 직업으로 해내던 그 일. 자신은 아버지의 일터에서 재미삼아 하던 일이 이제 ‘의무로 해내야 하는 직업이 되었다.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를 스스로 지켜야 했다.

슬슬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도 참 철부지였다. 1984년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얻었지만 여전히 철부지였다. 재미삼아 할 때는 재미있었던 식당 일이 ‘직업’이 되니 싫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통영에서의 식당일을 접었다. ‘견습’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나서 미처 10년의 세월을 채우지 못했다.

부산으로 떠났다. 마침 친척이 부산에서 설비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시작했다. 일은 꼬였고 시쳇말로 쫄딱 망했다.

나의 ‘물’은 무엇인가?

통영에는 ‘쏨뱅이’라는 생선이 있다. 붉은 우럭으로, ‘삼뱅이’라고도 한다. 가격도 비싸고 귀하다. 이놈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자 말자 바로 죽는다. 입을 들쳐보면 안의 내장들이 입에 물려 있다. 쏨뱅이는 유달리 바닷물과 바깥의 기압 차를 견디지 못한다. 마치 성질 급하다고 알려진 밴댕이 같다. 낚시에 걸려 올라오자 말자 죽으니 쏨뱅이를 회로 먹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 반건이나 건조 생선으로 만들어 찌거나 구워 먹는다. “죽어도 쏨뱅이”라고 했다. 회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비싸고 맛있다.

회, 구이, 찜에 따라 맛있는 생선이 따로 있다. 쏨뱅이는 회로 만들기는 힘들어도 비싸다. 사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진호 대표도 그랬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뭐든 일을 해야 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밑바닥 일부터 험하고 힘든 일까지.

바닥을 디뎌보면서 새롭게 스스로를 뒤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여기저기서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IMF를 지나면서 그런 책들도 나오고, 방송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직업에는 귀천도 없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평범한 이야기였죠.”

횟감이 따로 있고 구이용이 따로 있다. 젓갈로 만들어야 맛있는 것이 따로 있고 쪄서 먹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스스로 뒤돌아보면서 “내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찾아보았다. 결국 음식점을 하는 일이었다.

“물고기 물 만난 듯하다”는 표현이 있다. 마찬가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물고기의 물’이다. 조진호 대표의 ‘물’은 생선이었고 생선 관련 음식점이었다. 마흔의 나이를 넘기면서 그 ‘물’을 찾았다. 통영에서 부산을 거쳐 결국 서울로 향했다.

통영과 서울. ‘충무음식’ 2대 전승

2000년 무렵 서울로 상경, 지금의 다동(무교동) ‘충무집’을 열었다.

“어머니 영향이 가장 크겠지요.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가 보여주신 음식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되질 않네요. 대부분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몇몇 음식은 아직 재현을 못하고 있고요.”

‘충무집’ 배진호 대표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통영의 옛 이름은 충무다. 통영에서 충무로, 충무에서 다시 통영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당연히 통영이지만 1955년생인 배진호 대표가 어렸던 시절 이름은 충무였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이 바로 통제영, 통영이다. 삼도는 이른바 하삼도下三道다. 충청, 전라, 경상의 세 바다다. 동, 서, 남해안을 아우르는 해군의 총본부가 바로 통영이었다. 전해지기로는, 한때 1만 명의 병력이 주둔한 적도 있었다.

통영은 큰 도시였다. 양반 중 무반, 즉 장수들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의 음식은 반가의 전통을 따라서 이어진다. 통영, 충무 음식이 지금도 널리 인정받는 있는 이유다.

어머니는 일 년에 열두 번 정도 제사를 모시는 며느리였다. 반가의 5대 봉제사(奉祭祀)면 돌아가신 날 모시는 기제사만 8번이다. 설날, 추석의 명절제사가 더해진다. 보름제사도 있었다. 보름차례라고도 부른다. 제사와는 달리 천신(薦新) 혹은 차례(茶禮)의 개념이다. 그 계절에 나오는 식재료를 사당 등에 모시는 일이이다. 통영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 배 대표는 ‘제사와는 다른 보름차례’도 여러 번 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결국 제사는 열 번 이상을 넘기기 마련이다. 매달 한 번씩 돌아오는 제사를 모시는 모습을 늘 가까이서 봤다. 어머니의 음식은 ‘1년에 제사를 열 번 이상 모시는 며느리’의 야무진 손맛에서 비롯되었다. 늘 봤던 모습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음식을 떠올린다.

음식은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손재주로 만든 음식은 맛있다는 평가를 넘어서지 못한다. 맛있다, 라고 말하고 그만이다. 음식은 역시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마음으로 만드는 음식은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감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먹을 때 편안한 음식, 마음으로 만드는 음식. 손님에게 “우리 음식 맛있지요”라고 묻지 않는다. 손님 얼굴을 보면 음식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다. 편안한 얼굴이면 배 대표의 얼굴도 편해진다. 불편한 얼굴로 나가면 화급히 음식을 먹어본다.

아들의 ‘충무집김밥’

아들이 가까운 곳에서 자그마한 ‘충무김밥’ 집을 운영한다. ‘충무집김밥’이다. 일단 ‘음식점 일’을 시켜본다. 아들의 ‘물’이 무엇일는지는 알 수 없다. 묵묵히 일을 해내니 지켜볼 뿐이다. 언젠가 아들이 ‘충무집’을 이어받을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다르다. 운영이 잘 되니 네가 운영해라, 라고 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는 통영에서 ‘희락장’을 운영했다. 조진호 대표는 서울로 상경, ‘충무집’을 세웠고, 지금도 ‘충무음식’을 내놓고 있다. 아들의 ‘물’이 ‘충무음식’이기를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다.

인터뷰 끝자락에 아들의 ‘충무집김밥’ 집을 갔다.

김밥은 담백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어린시절 아버지가 열었던 통영의 ‘희락장’ 소년이 배진호 대표다.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아버지, 아들은 ‘충무음식’으로 2대 전승했다.

-남해 통영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선회 밥상차림. 각종 장류들.

-‘충무집’의 멍게비빔밥

-‘충무집’의 도다리쑥국

-‘충무집’가까이서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충무집 김밥’

통영맛집

원조밀물식당

통영의 노포다. 멍게비빔밥과 도다리쑥국 등이 유명하다. 계절 별로 내놓는 생선 요리들이 수준급이다.

수정식당

통영에 있는 음식점 중 상당히 깔끔하고 차분한 음식을 내놓는다. 메뉴는 역시 계절별로 달라진다. 세트 메뉴를 권한다.

분소식당

졸복, 도다리쑥국 등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진 통영맛집이다. 서호시장 통의 작은 가게. 시장통 상인들이 드나들던 집이었다.

어촌싱싱회해물탕

가장 최근에 생긴 가게다.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집이다. 푸짐을 해물을 위주로 담백한 해물탕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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