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방식대로 60년간 조청 만들어…독특하고 유일한 ‘황골마을식’ 조청

식혜 거치지 않고 조청 만들어… 가마솥에 장작불 고집

쌀과 옥수수 섞어 특유의 맛 내…가장 오래 조청 만들어

조청으로 만드는 ‘엿술’도 유명…맏아들 대 이어가

이현순 할머니. 1928년 생, 열다섯 살에 시집와서 스물여덟 살 때부터 조청(造淸)을 고았다. 조청을 만든 지 60년. 가마솥에 나무로 불을 때고, 예전 방식으로 조청을 만든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글자도 익히지 못했다. 배운 것 없는 이 할머니가 평생 올곧게 조청 만든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태어나면 공부나 실컷 했으면 좋겠어.”

연세는 이미 아흔에 가깝다. 우리 나이로는 이미 아흔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상당히 걱정했다. 아흔의 노인이다. 귀가 어두울 수도 있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짐작했다. 잘 듣는다 해도 설명을 잘 하기는 힘들 것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 출신이다. 음식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하기 힘들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산이었다.

아드님인 황윤근씨를 찾았다. 어머니 이야기의 ‘통역’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연대나 사건들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다고 믿었다. 대신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현순 할머니는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인터뷰를 하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연대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했다. 말도 또록또록했다. 상당히 논리적인 말투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꾸준히 일을 하고 있었다. 손님 응대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 10명 가까운 손님이 찾았다. 여러 명이 와서 어수선한 분위기인데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응대를 해냈다. 술은 직접 병에 채웠다. 한 병, 한 병 제대로 돈을 받고 술을 내줬다.

지금도 군불을 지피고 엿을 직접 만든다. 올곧게 모든 과정을 해낸다. 엿, 조청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무쇠 가마솥에 장작불이다. 힘든 일이다. 조청을 고는 일, 몇 차례 퍼내고 다시 붓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 전 과정을 일일이 다 제대로 해낸다. 맏아들 내외가 돕지만 한 순간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가능하면 이현순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이현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여기가 고향은 아녀. 지금 살고 있는 원주 황골마을로 이사 온 건 내가 스물여덟 살 무렵이야. 원래는 횡성 살았지. 횡성군 청일면이 고향이야.(맏아들 황윤근씨가 횡성 청일면 봉명리라고 일러준다.) ‘곱돌재’라고 하면 다 알아. 거기서 태어났지. 학교가 뭐야. 하루종일 아버지 따라 산으로만 다녔어.

농사는 가난해서 못 지었어. 논밭이 있어야 농사를 짓는데 산에 사는 사람들이 논이 있나, 밭이 있나. 산골 사람들 중 겨우 몇몇이나 부자들 땅 조금씩 부쳐먹고 살았지. 울 아버지는 그런 재주도 없어서 맨양 산으로만 다녔어. 나물 뜯고 그 나물에 곡식 더해서 먹고, 그렇게 살았어. 굶는 날이 더 많았지. 그때는 죄다 화전하고, 밭뙈기 있으면 감자 농사짓고 그랬어. 감자 먹고 살았지. 학교야 꿈도 못 꿨어. 산골에서 학교 가는 애들이 어디 있어? 학교를 안 보냈으니 결국 내가 이렇게 바보천치가 되었잖아. 죽어서 환토(환생을 이렇게 표현했다)하면 공부나 실컷 했으면 좋겠어. 학교를 안 다녔으니 글자도 못 익히고…. 결국 평생 글자는 못 익혔어.

열다섯 살에 시집을 갔어. 한 동네 사는 사람한테. 신랑은 열여섯 살, 난 열다섯 살. 시집도 보내고 싶어 보낸 게 아녀. 왜정 때고, 정신대가 있을 때잖아(1943년, 일제강점기다) 딸을 나라(일제)에 빼앗기느니 옆집에 준다고 나를 덜렁 보낸 거야. 결혼이고 뭐고 정신이 없을 때지. 곱돌재에 같은 마을 사람한테 갔지. 시집이나 친정이나 살림살이야 뻔했지. 화전 일궈서 옥수수, 콩 심어 먹고 그렇게 살았어. 나물 먹은 게 반이고, 감자 먹은 게 반이고, 그렇게 살았어. 죄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지.”

황골마을에서 조청을 배우다

“해방은 곱돌재에서 맞았어. 산에서 일하고 있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산에서 내려온 기억이 나. 스물여덟 살에 원주 황골마을, 지금 사는 데로 이사를 왔어. 이사를 왜 했냐고? 시댁이 이사하니까 따라왔지. 내가 뭘 알았겠어. 시아버지가 결정한 일이니 난 몰랐지. 시아버님이 ‘믿는 사람’이야(미신, 점괘 등을 믿는 사람을 뜻한다).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이사를 가는 게 좋다고 하니까 옮긴 거지. 원주 황골마을에 땅을 쪼매 구해서 추운 섣달에 급하게 이사를 했어. 이사를 하고보니 조청 만드는 데더라고. 원래는 시어머니가 조청을 만들었어. (웃으며)그런데 보니까 조청은 내가 낫더라고. 시어머니가 하는 걸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지. 그리고 내 나름대로 이래저래 해보고. 내가 만들면 조청이 더 나아. 하기야 배우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날씨 보고, 엿기름 손으로 만져보고, 불 보고, 가마솥에 엿기름 하고 곡식 넣고 끓는 것 보고…. 매일 하는 게 똑같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죄다 잊어버리지 말고 했던 대로 하면 조청이 맛있어.”

강원도 원주 황골 조청마을의 조청 만드는 방식은 얼마쯤 다르다. 대부분의 조청은 엿기름과 곡물로 우선 식혜를 만든다. 식혜의 맑은 물을 걸러서 가마솥에 넣은 다음 불을 땐다. 식혜 물을 고아서 조청을 만든다. 일반적인 조청 만드는 방식이다.

황골마을의 조청은 다르다. 식혜를 만들지 않는다. 엿기름과 물에 불린 곡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이것을 두 세 차례 더 끓인다. 중간 과정에 고운 체로 이 물을 거른다. 식혜를 만들지 않고 조청을 만드는 게 바로 강원도식, 황골마을식 조청 만드는 방식이다.

곡물도 다르다. 대부분 쌀을 사용하는데 황골마을은 쌀과 옥수수를 섞어 쓴다.

황골마을식 조청 만드는 방식은 경제적이다. 하루 종일 불을 때면 매일 조청을 한 차례씩 만들 수 있다. 생산량도 많다. 같은 곡물로 하더라도 거칠지만 더 많은 양의 조청을 만들 수 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맛이다. 쌀과 옥수수를 섞으니 맛도 독특하다. 아련한 단맛이 돈다.

“지금 조청 만드는 건 일도 아녀. 예전엔 힘들었어. 옥수수를 구해서 저 멀리 원주까지 가서 빻았어. 그것도 못할 때는 집에서 맷돌에 곡물을 죄다 내가 갈았어. 불 때는 일도 그때는 더 힘들었고. 엿을 만들어도 그릇이 제대로 있나, 불이 제대로 피길 하나. 이래저래 힘들었어. 여름엔 더 힘들었지. 여름에 조청을 만들면 식힐 곳이 마땅찮잖아. 그래서 개울에 조청을 담가 두었어. 뜨거운 조청을 담은 부대를 집 옆 개울의 시원한 물에 담가뒀었어. 식히려고. 비가 많이 오면 한밤중에 개울가로 달려가서 전부 건져다 높은 곳에 옮기곤 했어. 그냥 두면 다 떠내려가잖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이야 조청 만드는 게 신선놀음이지.

조청을 만들면 ‘엿 공장’ 사람들이 와서 조청을 죄다 걷어 갔어. 조청을 만들어 두면 와서 주걱으로 퍼서 공중에서 죽 내려 봐. 엿이 내려오는 걸 보고 잘 만들었는지, 잘못했는지 보곤 했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면 죄다 걷어가고 돈을 줬지. 그걸로 먹고 살았어. 이 동네가 전부 그렇게 조청 만들어 주고 살았어. 스물여덟 살 때 겨울에 이사 와서 조청을 만들기 시작해서 이제껏 조청을 만들었어. 내가 아흔이 다 되었는데, 동네 할매들 몇몇이 옛날 방식으로 조청을 만들 줄 아는데 이젠 만들지 않아. 얼마 전까지 여섯 집인가, 장작불로 가마솥으로 조청을 만들었어. 그 할매들 나보다 열 살이나 일곱, 여덟 어린데(?) 이젠 조청 만드는 일을 못해. 그보다 힘드니까 안하려고 해. 자식들도 자꾸 말리고. 이젠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서 조청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어. 이러나저러나 내가 제일 오래되었지. 나이도 많고 조청 만든 세월도 내가 젤 길어. 나 다음에 또 누가 가마솥에 장작불 때서 조청을 만들는지 모르지.”

사라지고 있는 가마솥, 장작불 조청

고단한 세월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태어나서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곤 했다. 먹을 것이 시원찮아, 혹은 병으로 죽었다. 열한 명을 낳아 넷을 건졌다.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겨우 하나 건졌다. 맏아들 황윤근씨다. 그도 이미 예순네 살. 적지 않은 나이다. 다행히 아들 부부는 할머니의 전통적인 조청 만드는 법을 익혔고 앞으로도 그대로 할 예정이다. 황윤근씨의 여동생도 가까운 곳에서 조청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이현순 할머니와 아들 내외는 ‘황씨네엿집’을, 황씨의 여동생은 가까운 곳에서 ‘시골엿집’을 운영한다.

황골마을에서 조청 만드는 일은 이젠 열여섯 집 정도가 해내고 있다. 그동안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이가 제법 있었는데 최근에는 대부분 가스 불을 사용한다. 장작불, 가마솥은 힘들다. 이제 대부분 내려놓았다.

“나도 해봤어. 그런데 맛이 달라. 좋은지 나쁜 지야 내가 모르지. 그런데 나보다 손님들이 먼저 맛이 다르다는 걸 알아. 자꾸 옛날 것 내놓으라고 하니까 어쩔 수가 없지. 손님이 그리 많지도 않아. 몇 해 전에 국회방송인가, 내가 조청 고는 걸 찍어 가더니 그걸 명절 때 되면 자꾸 다시 틀더라고. 그걸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그 사람들이 가마솥, 장작불 조청을 찾으니까 그런 조청을 만들고 또 땅콩 쪼매 넣고 땅콩엿을 만들고 그래. 아들 내외가 배우고 또 내가 하는 걸 그대로 하겠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동안은 내가 해야지. 배운 게 이것뿐이야. 학교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그저 조청 만드는 거, 이걸 젤 잘하니까 하는 거야.”

조청으로 만드는 ‘엿술’도 유명하다. 손닿는 대로 조청을 만들고 엿술을 만든다. 찾는 이들이 있으니, 할 줄 아는 일이 술 만들고 엿 만드는 일이니 그저 매일매일 반복한다.

엿은 희한했다. 치아에 붙질 않았다. 엿술은 제법 술기운이 강했다. 확 오르다가 쑥 내려갔다. 단맛이 강하지만 깊은 맛이 났다. 거칠지만 깔끔했다. 마시기에 참 참한 술이었다. 가난한 강원도 산골의 투박하지만 맑은 술과 엿이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이수현 할머니와 맏아들 황윤근씨. 황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황씨네 엿집’을 운영하고 있다.

-황골마을 외진 곳의 ‘황씨네 엿집’

-황골마을에서 만든 조청은 그릇 표면에서도 쉽게 흘러내리지 않고 이에 붙지 않는다.

-‘황씨네 엿집’의 엿. 이에 ?Α?않고 깔끔하다.

-술을 마시고 나도 뒤끝이 깨끗하다고 다시 찾는 ‘엿술’.

원주의 맛집들

큰골집, 황골집, 고향집

황골조청마을에는 백숙이나 손두부 집이 몇 곳 있다. 수제 엿처럼 손으로, 가마솥으로 빚는 두부집들이 특이하다. 모두 세집이 유명하다. 가마솥, 수제, 장작불 손두부, 순두부들이다. 반찬도 깔끔하다. 세집 모두 단골들이 많고 나름의 개성이 있지만 손두부, 순두부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사진은 ‘고향집’ 순두부다. 담백하다.

명랑막국수

막국수 전문점이다. 돼지고기 편육이나 오리, 닭 등이 수준급이다. 특히 어슷하게 썬 편육이 압권. 막국수는 전분이 들어간 투박한 국수. 메밀껍질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시골 식 막국수.

원주복추어탕

이른바 원주 추어탕의 원조인 추어탕 전문점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작은 가마솥을 걸고 손님마다 추어탕을 따로 끓여준다. 투박한 추어탕 맛이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는 ‘통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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