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전문 ‘착한 사찰음식점’…자연의 나물에 정성 더해 행복을 전하다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 조미료 쓰지 않고 ‘건강한 맛’ 내

외진 곳, ‘맛’ 아는 단골들 꾸준히 찾아 …딸은 서울에 오픈 예정

외진 곳이다. 서울에서 가깝다고 하지만 그래도 경기도 여주다. 여주에서도 골짜기다. 몇 번을 가도 이게 어디쯤인지 알기 힘들다. 제2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비교적 접근이쉬워졌다. 사찰음식 전문점 ‘걸구쟁이’. 불교에서 금한다는 오신채를 쓰지 않고 음식을 낸다. 조미료도 없다. 그런데 맛있다. 맛있게 먹고 나면 건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걸구쟁이’의 대표 안서연씨를 만났다. 남편 윤보연씨는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착한 사찰음식’으로 선정되다

미리 밝힌다. ‘걸구쟁이’는 ‘착한 사찰음식’을 내놓는 집으로 선정되었다. 2012년 봄의 일. 여주 강천면 이호리에서 간매리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착한식당’으로 선정되었다.

미리 밝히는 이유는 당시 ‘착한 사찰음식’ 검증 팀에 필자가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밝은 얼굴이다. 당시 검증을 가면서 주인 부부의 밝은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에 그늘이 없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말을 아꼈다. 동행한 검증 팀이나 제작진들이 이야기하면 나중에야 맞장구를 쳤다. 다행히 주인 부부는 필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오래 전, 이사하기 전부터 단골이었다”고 밝혔다. 해맑게 “그러셨습니까?” 정도로 응대했다.

정확한 사찰음식이다. 사찰음식은 몇 가지 포인트에서 채식과 다르다.

사찰음식은 채식식단이어야 한다. 육류를 사용하는 사찰음식은 없다. ‘콩고기’는 애매하다. 콩고기는 콩 등 식물성 식재료를 이용하여 마치 고기 같은 질감을 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굳이 콩을 이용하여 사찰음식에서 권하지 않는 고기의 맛과 질감을 내야 하는지, 늘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오신채(五辛菜)’의 사용도 문제가 된다. 오신채는 흔히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라고 표현한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먹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식재료다. 오신채는 모두 식물성이다. 하여 오신채는 채식식단과 사찰음식을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음식은 약이 아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맛이 없으면 곤란하다. 고기의 감칠맛이나 인공적인 단맛은 아니지만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려야 한다. 양념으로부터 식재료의 맛을 구해내야 한다. 사찰음식은 자연이 주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것이라야 한다.

‘걸구쟁이’는 검증단들이 “나물들로 이 정도의 맛을 내는 것은 대단하다”고 입을 모은 음식이었다. 귀한 식재료가 아니라 정성을 기울이면 구할 수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식재료들이었다.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밝은 얼굴은 보기 좋다.

이 부부에게서는 늘 ‘행복 바이러스’가 느껴진다. 오래 전, 이호리에서 ‘걸구쟁이’를 운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처 몰랐지만 이 부부는 막 ‘어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지금의 자리로 이사 오기 전, 이호리 ‘목아박물관’ 옆에 있을 때였다.

흙으로 지은 집이었고 내부는 울퉁불퉁하지만 아늑했다. 굳이 고집스럽게 사찰음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부터 사찰음식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름도 ‘걸구쟁이’가 아니라 그냥 ‘식당’이었다.

아내 안서연씨는 1966년 생. 고향이 바로 인근, 여주시 강천면 걸은 2리. 걸은리는 현지 사람들이 ‘걸귀정’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이 나중에 가게 이름 ‘걸구쟁이’가 되었다.

남편 윤보연씨는 서울 토박이다. 두 사람은 아내 안서연씨가 서울생활을 할 때 만났다. 안서연씨가 불화, 불상 등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남편감을 만났다.

1991년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 남편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1994년 2월, 무작정 고향인 여주로 왔습니다. 도시생활이 힘들기도 하고, 남편이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하기도 하고….”

추운 겨울이었다. 지금의 강천면 간매리도 그렇지만 이호리는 더 외진 곳이었다. 벌써 23년 전의 일이다. 개발이 전혀 되지 않은 시골길 옆의 공터나 다름없는 곳. 가로등도 없고 해만 지면 사방이 캄캄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자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첫 아이가 3살 무렵이었다. 갓 젖먹이를 벗어난 아이와 더불어 두 부부는 아내의 고향에서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찰음식을 내놓는 집은 아니었다. 그냥 ‘식당’. 떡볶이 등을 파는 간이식당이었다.

“그래도 참 행복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든 날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손님맞이 하고, 손님이 없어서 시간이 빌 때는 공사를 했지요. 예전 ‘걸구쟁이’ 건물은 우리가 흙으로 쌓아 올린 집이었습니다. 우리 손으로 다 지었지요.”

서투른 솜씨로 부부가 흙으로 집을 짓다가 서로 쳐다보면서 웃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모두 퉁퉁 부었다. 고된 노동의 결과였다. 그래도 힘들다기보다는 행복했다. 늘 웃었다.

나물 전문점을 생각하다

어느날, 안서연씨가 “나물을 전문적으로 내놓는 식당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손님이 많을 것이라는 셈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물은 잘 안다는 생각과 사람들 몸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 곁에서 맡았던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물의 향이 떠올랐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어머니는 늘 나물을 산더미만큼 뜯어서 시장에 내다팔거나 데치고, 말리는 일을 했다. 가끔 조청도 고아서 살림에 보탰다.

나물의 향기가 기억났다. 나물이라면 자신 있었다.

남편과 같이 산에 올랐다. 서울출신이니 나물을 알 리 없지만 든든한 동행자이자 짐꾼이 되어 주었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상 짐꾼.

“흙집을 짓고, 사찰음식을 내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원하는 나물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수의 나물은 봄철에 마련한다. 직접 채취하는 것도 있고 가까운 횡성 장을 비롯하여 시골장터 이곳저곳에서 할머니들의 좌판에서 나물을 사 모은다. 이제는 할머니들이 먼저 ‘전화번호를 달라’고 한다. 좋은 나물이 나오면 연락하겠다는 뜻이다.

소금 때문에 불이 났을까?

호사다마였다. 일이 잘 풀리는가 싶더니 이호리 가게에 불이 났다. 자연 발화였다. 손으로 지은 집이니 아마 마찰열 때문에 불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엉뚱하게도 소금이었다.

“불이 나기 얼마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오래된 소금독과 소금이 필요하다고 우리 집의 소금독을 빌려갔습니다. 소금이 원래 화기(火氣)를 제어한다고 하잖아요. 어쨌든 소금독을 빌려주고 나서 오래지 않아 집에 불이 났습니다.”

살림집이자 식당이었다. 당장 잘 곳이 막연했다. 가게가 호구지책인데 오래 비워둘 수도 없었다. 부랴부랴 집을 알아보고 지금의 간매리로 이사했다. 전세자금도 빠듯했고, 집기류 넣은 돈은 없었다.

“집기류 넣는 건 대부분 외상이었습니다. 이호리에서 장사하면서 신용을 잃지 않아서 집기류부터 처음 장사할 때 쓰는 식재료까지 대부분 외상으로 시작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이사하면서 장독대도 넓어지고 가까운 산에서 나물 캘 생각을 하니 그것만 해도 마냥 좋았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한 탓도 있지만 오랜 기간 단골이었던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와 준 탓에 가게는 서서히 붐비게 되었다. 이제 이사 온 지 7년째.

“가까운 산에 고사리와 두릅 등이 지천으로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산으로 나물 캐러 다닙니다. 올봄에도 열심히 다녀야지요. 손님들 중에는 아예 들판에서 나물 캘 준비를 하고 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가게 바로 앞 땅에 백일홍을 심을까, 생각 중입니다. 지난 해 가게 들어오는 입구에 백일홍을 심었더니 아주 좋아들 하시더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더 밝은 얼굴이다. 메뉴는 더 푸짐해지고 깔끔해졌다. 저녁 7시에 문을 닫는 것은 손님으로서는 불편했다. 저녁 9시까지로 영업시간을 늘였다.

딸이 가게로 합류한 것도 기쁜 일이다. 학교 다닐 때 주말, 방학 때는 늘 어머니를 도와서 주방, 홀 일을 했던 딸이 졸업 후 아예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외국어를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예정했던 딸이다. 음식 만지는 솜씨가 야무져서 기대가 크다. 조만간 서울 송파구에도 ‘걸구쟁이’ 간판의 가게가 문을 연다. 딸이 운영할 것이다. 여주 ‘걸구쟁이’의 나물과 어머니에게 음식솜씨를 물려받은 딸의 솜씨를 보여줄 것이다.

밝다. 늘 웃는다. 푸근하고 편안하다. 사람이나 음식 모두 그러하다. 음식은 입으로 먹지만 음식에 쏟은 정성과 웃음은 마음에 담는다. ‘걸구쟁이’, 늘 고맙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걸구쟁이’ 대표 안서연씨. 돈 한푼 없이 여주 이호리에서 간매리로 급하게 이사왔다. 이제 간매리에서의 생활도 7년째. 가게가 잘 운영되니 원하는 나물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지금이 퍽 행복하다며 웃는다.

-현재 실내의 모습. 따뜻한 창가에 꽃들이 활짝 피었다.

- ‘걸구쟁이’ 밥상의 일부다. 나물이 퍽 풍성하다.

-2인분 밥상이고 나물반찬이 퍽 많다

- 메밀전병, 산초장아찌, 고추부각이다. 모두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

사찰음식/채식 맛집

물메골

제주도에 있는 채식 전문점이다. 인근의 야산과 들에서 주인이 직접 채취한 나물들과 인근에서 구입한 채소들로 음식을 내놓는다. 연잎밥이 인상적.

아승지

스님이 직접 운영하는 채식 전문, 사찰음식 전문점이다. 요리 몇 종류가 먼저 나오고, 마지막에 된장국, 몇몇 반찬들로 밥을 먹을 수 있다. 깔끔한 사찰음식.

채근담

이미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서울 대치동의 채식 전문점이다. 입식 좌석이라서 외국인 접대에도 편리하다. 각종 기명류에도 정성을 쏟았다. 접대 자리로도 무난.

발우공양

조계사 바로 앞 템플스테이 빌딩에 자리한다. 대안 스님이 그린 음식을 내놓고 있다. 실내 분위기와 음식이 모두 접대용으로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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