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같은 운명’ 재일교포 우동 2대(代)…올곧은 수타우동 전국 명성

겐 수타우동엔 만드는 이의 마음ㆍ고집ㆍ신념, 정신적ㆍ육체적 고통 담겨

야구 국가대표, 일본 프로야구 선수도…일본 전역의 우동 접하며 새 길로

부친 귀국해 우동집 시작…박 대표 일본서 우동 수업, 수타우동으로 대이어

‘겐(弦, 현)’은 활시위다. 활을 막 쏘았을 때 나는 ‘윙’하는 소리 혹은 화살이 ‘휭’하고 날아가는 소리도 ‘겐(弦)’이다. ‘겐(弦)’은 긴장감이다. 활을 팽팽하게 당겼을 때의 긴장감.

‘수타우동 겐(弦)’의 대표, 박봉수씨. 1977년 생, 올해 갓 마흔을 넘겼다. 재일교포다.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으로 건너왔다. 일본 영주권 포기, 그는 한국사람이다. 우동과 더불어 팽팽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동가락은 올곧아야 한다

가게 군데군데에 써 붙였다. “수타우동은 밀가루, 물, 소금으로 만든다”. 맞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부족한 표현이다. 우동은, 수타우동은, 우동을 만드는 이의 마음까지 담아야 한다. 고집과 신념을 담아야 한다. 때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까지 담아내야 한다.

호들갑을 떤다고? 그렇다. 호들갑이다. 그까짓 우동가락 하나를 두고 웬 난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호들갑도 떨어야 하고, 난리법석도 피워야 한다. 우동의 재료는 간단하다. 물, 소금, 밀가루다. 이것으로 만드는 우동가락이 천차만별이다. 이게 함정이다. 어떤 우동가락이 가장 좋은 것일까?

박봉수 대표가 말하는 수타우동은 면이 곧아야 한다. 우동가락은 매끈하고 쭉 곧아야 한다. 힘이 있으면서 날렵하게 끝까지 곧아야 한다. 스스로 ‘좋은 면은 스트레이트’라고 말한다. 그렇게 배웠고 그게 옳다고 믿는다.

지금 ‘박봉수의 수타면’은 올곧다.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숱한 시행착오를 했다. 우동가락이 휘는 이유는 여럿이다. 반죽, 밀대로 밀 때, 썰 때, 냉수처리를 할 때 등등, 숱한 이유로 우동은 휜다. 흔히, 우동반죽, 숙성, 써는 과정이 1년이라면 삶는 과정은 3년이라고 말한다. 5년쯤의 수련기간 중 반 이상을 우동 삶는데 보낸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우동을 한 그릇 청했다. 우동 면이 분당의 본점에 비해서 조금 얇았다. 박 대표가 말을 보탰다. “삶는 것은 제가 했습니다.” 가늘었지만 면의 탄성도도 좋았다. 물론 우동가락은 끝부분까지 올곧았다. 날렵하게 뻗쳤다.

간단하게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배우고 나서 숱하게 시행착오를 겪었다.

면 삶는 물에 소금을 더해보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원하는 면이 나오지 않아서 30인분의 반죽을 버린 적도 있었다. ‘희생’이라고 표현했다.

10인분씩 3번, 30인분의 면을 삶고 나서 그 면을 모두 버렸다. 면 삶은 물은 남겼다. 다음 차례 면을 삶으니 제대로 된 면이 나왔다.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일본에서 다시 서울로

우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궁금했다.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우동집. 어느 블로그는 3대라고 하고, 어디서는 2대라고 하고…. 재일교포면 일본에서 살 터인데 한국에는 왜 왔을까, 라는 궁금증도 있었다.

재일교포가 한국에서 만드는 일본 음식 우동? 늘 궁금했다.

“할아버지가 제주도 오라동에 사시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일제강점기였겠지요.”

아버지는 1938년 생. 할아버지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소금 공장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가난한 살림살이였을 것이다.

박봉수 대표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저는 8살 때 일본에서 서울로 왔지요. 아버님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고향인 제주도보다는 서울이 낫겠다고 해서 서울로 온 겁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다. 더 이상 일본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고향인 제주도보다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서울이 낫겠다는 판단.

“한국으로 오기로 결심을 하고 아버지와 오사카의 어느 식당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수타(手打)우동이라는 음식을 봤습니다.”

1984년, 당장 먹고 살 길이 막연한 아버지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아버지가 수타우동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주인은 냉랭했다. 여러번 부탁하고 마지막에 “이곳이 아니라 한국 가서 우동집을 할 생각”이라는 말을 듣고 우동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동 손 반죽과 수제 덴뿌라 만드는 법까지 배웠다.

한국으로 귀국, 과천에 자리 잡으면서 아버지는 바로 우동집을 시작했다. 과천정부종합청사 부근 상가의 지하. 덴뿌라 우동 1500원, 쇠고기 우동 1800원이었다. ‘수타우동_겐’ 옆에 ‘since 1984’라고 써 붙인 이유다.

옹색한 곳이었지만 다행히 장사는 잘 되었다. 우동 파는 집 한 쪽에서 회도 내놓았다.

중간 중간 잠깐씩 비우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8년 동안 가게를 지켰다. 음식에 대해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건물주로부터, 지하가 아니라 번듯한 식당들이 있는 5∼6층 전문식당가로 오라는 요청도 받았다.

야구를 시작하다

문제는 박봉수씨였다. 어린 나이다.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놀렸다. 재일교포를 비하하는 말들을 매일 들어야 했다. 학교 가는 것이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야구를 알게 되었다. 유니폼부터 야구장 모든 것이 멋있어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구선수로 휘문중, 고를 거쳐 고려대학교까지 진학했다. 고려대 2학년 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수타우동_겐’의 메뉴판에는 ‘야구선수 박봉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휘문고등학교 다닐 때 1점차로 전국대회 우승을 놓친 이야기다.

야구선수로, 마음 한쪽에는 늘 엉뚱한 욕심이 있었다. “일본 프로팀에 가고 싶다”. 욕심이라도 집념이 더해지면 결국 이루어진다. 일본 쥬니치 드레곤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결국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 3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결국은 저의 실력이 부족했지요. 일본 프로야구에 적응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스스로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체중은 10Kg가 줄었습니다.”

소득 없는 귀국. 국내 구단 삼성, LG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2002년, 오랫동안 집념으로 버텼던 야구를 버렸다. 그리고 대학에서 다시 2년, 졸업하고 입대한다.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군 입대가 의무사항은 아니었는데 저도 입대를 하고 싶었고, 아버님도 ‘군대는 다녀와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군대 문제도 마음대로 진행되진 않았다. 애당초 입영 대상자가 아니었다. 공익요원. 훈련소를 마친 후, 정부청사에 배치되었다.

업무 대신 우동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계 금형회사에 취직했다. 10년 이상 고집스럽게 껴안고 있었던 야구를 버리고 사회인으로, 직장인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업무 상 일본에 갈 일이 잦았습니다. 사원이지만, 일본어에 능통하고 또 일본을 잘 아니까 회사에서는 일본 출장 건은 저에게 모든 걸 맡겨둔 상황이었지요. 덕분에 1년의 절반 정도는 일본에서 지냈습니다.”

업무상,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등 대도시와 일본의 작은 시골까지 다녔다. 희한하게도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일본 식당의 우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일본에서 먹어본 우동들을 기억하고 그 우동들을 하나씩 비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맛본 우동들을 ‘평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묘했다. “아버지처럼 우동집을 해볼까?”

운명은 안개 같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우리 곁에 다가선다. 박봉수 대표에게 우동은 ‘안개 같은 운명’이었다.

어머니에게 의논 겸, 물었다. “우동 가게를 하고 싶은데,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머니는 한편으로 반대, 다른 한편으로는 찬성이었다. 찬성은 ‘아쉬움’이었다. 우동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힘드니까 절대 하지마라”고 하셨다. 한편으로는 다른 집에서 우동을 먹어보곤 “예전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 우동이 훨씬 더 맛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가 귀국 직전, 수타우동을 배웠듯이 그렇게 우동 공부를 하고자 일본으로 갔다. 오사카에서의 10개월.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에서 우동을 배웠다.

“이제 내려놓는다”

언젠가 분당의 ‘겐’이 잠깐 방송에 나왔다. 대기 줄이 300미터 쯤 되었다. 결과는? 일하던 스텝들이 죄다 그만두었다. 우동 만드는 일은, 제대로 만든다면 힘든 일이다.

가게 운영으로도 어려운 과정을 많이 겪었다. 오픈하고 나서는 매달 300만 원 이상 적자가 났다. 어머니와 박 대표 그리고 주방에 일하는 한 사람. 가게 임대료도 비교적 싼 곳에서 시작했지만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침내 어머니가 400만 원을 내놓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다.

“화면을 채워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빈 화면에 저의 그림을 그리는 거지요. 욕심일 수 있는데, 앞으로 20년 정도 더 하고 싶습니다. 이제 10년 되었으니 제 인생에 30년 동안 우동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많이 내려놓았다고 말한다.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를 뛰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전력질주는 어렵군”이라고 느낀다. 앞으로 20년은 더 뛰어야 한다. 우동을 배우겠다고 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둔다.

교대역 부근에 ‘겐’ 분점을 열면서 김치가 반찬으로 등장했다. 내려놓는다. 우동집을 시작하면서 한국 국적도 회복했다. 법적으로 완벽한 한국인이다. ‘참 참한’ 여자와 만나 결혼도 했다. 아이가 이제 돌쟁이다. 재일교포 신분은 3대에 끝났다. 우동 2대가 될는지, 3대가 될는지는 돌쟁이 아이에게 달렸다. 박봉수 대표는 “저는 앞으로 20년을 더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내려놓지 못한’ 부분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겐-수타우동’의 박봉수 대표. 1977년 생. 할아버지는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 아버지 손을 잡고 오사카에서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재일교포 3세. 한국 국적 취득. 재일교포 3세, 우동 2대의 삶을 살고 있다.

-‘겐-수타우동’의 내부 모습.

-찌꾸다마붓가케우동. 반숙 계란이 아주 좋다.

-두어해 전, 분당의 ‘겐’에서 촬영한 사누키우동 자루우동이다. 면발의 긴장감이 아주 좋다.

-새우가 있는 덴뿌라 우동. 우동 면이 마치 기계로 짠 듯이 가지런하다.

-사누키우동의 자루우동 면발

특별한 우동 전문점

교다이야

정통 일본 사누키우동을 먹을 수 있는 또 다른 곳이다. 면, 육수가 수준급이다. 어묵을 직접 만든다. 면 삶기를 하는 이가 ‘교다이(兄弟)’ 중 형이다.

우동일번가

수원에서도 외진 곳(권선구 금곡동)에 있는 일본 우동 전문점이다. 기계 면이지만 수준급. 면부터 소스까지 주인이 대단한 신념으로 만들어낸다.

보천

정통 일본 우동은 아니지만 우동 전문점으로는 노포다. 일본인들이 많은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다. 기분 좋은 단맛이 느껴지는 우동이다.

뎅구우동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우동 전문점 중 하나. 서울 연남동에 있다. 사누키우동을 초기에 널리 알린 공로가 있다. 대중적인 가격으로 인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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