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맛집 명성 30여년… 생태찌게 전문, 세월의 손맛 단골 줄이어

좋은 식재료와 푸짐한 정성…한번 맛본 기억 오래가

고난의 세월 헤쳐온 최점례 대표 이어 맏딸 전선영씨 운영

사심(私心)이 가득하다고 미리 고백한다. 잘 아는 식당이다. 아주 오랫동안 다녔다. 필자가 사회생활 초년병 때부터 알았던 식당이다. 1980년대 중반 인연이 닿았다. 세월이 흘렀다. 30여 년이다. 광화문 언저리에서 직장생활을 한 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 집이다. 신문로 구세군회관 뒤에 있는 ‘안성또순이’집. 이제 여든 살이 된 최점례 대표를 만났다.

그 겨울의 갈치조림

분명히 갈치조림이라고 기억한다. ‘안성또순이 아줌마 최점례씨’는 자꾸 시래기조림이라고 말한다. 갈치 위에 시래기를 얹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 재료는 갈치였다. 그런데 시래기 조림이란다. 갈치 위에 시래기를 얹었으니 당연 갈치조림이지 왜 시래기 조림이냐고 물어도, 어쨌든 그때는 시래기조림이었단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갈치도 아니고 시래기도 아니다. 조림 위에 새우가 몇 마리 올라 있었다. 문제(?)는 이 새우였다.

사회 초년병이니 늘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점심시간이면 모두 우르르 몰려나갔고 막내는 밥값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부장, 차장이나 대선배, 중간쯤 선배 중 누군가가 밥값을 냈다. 막내가 밥값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치 구내식당처럼, ‘안성또순이’네의 갈치조림을 얻어먹었다.

가수 이문세의 노래 중에 ‘광화문연가’가 있다. 회사는 ‘눈 내린 정동 교회당’ 옆에 있었고, ‘안성또순이’집은 교회당에서 광화문으로 내려가는, ‘눈 내린 정동 골목길’에 있었다.

정동 교회당은, 예전 러시아공사관 주탑이다. 공사관 건물 중 하나가 마치 교회당처럼 생겼다. 더러 고 이영훈씨가 쓴 가사의 ‘정동 교회당’을 정동교회로 말한다. 그렇지는 않다. 정동교회에서 광화문을 가려면 ‘눈 덮인 골목길’을 거칠 필요가 없다.

껍질 벗긴 시래기와 민물새우

20대 후반, 사회초년병이 음식 맛을 알았을 리가 없다. 선배들은 ‘안성또순이’집에서 갈치조림을 먹을 때마다 민물새우 타령을 했다. 새우가 커봐야 얼마나 클 것이며, 맛이 있어 봤자 그게 그거다. 그럼에도 선배들은 늘 “아줌마 새우 몇 마리 더 얹어 주소”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때마다 “다음 사람 생각도 해야지”라는 지청구를 들었다.

그 새우가 민물새우이고, 또 다른 비밀은 시래기에 있음은 아주 나중에 알았다. 나름 음식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등잔 밑이 어두웠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당시 밥 잘 사주던 선배와 우연히 다시 만났다.

“안성또순이 아줌마네 밥 맛있었지. 골목 안의 자그마한 밥집에서 식재료 고집이 대단했어. 새우는 민물새우였고 시래기는 일일이 다 손으로 껍질을 벗긴 것이었어.”

불행히도 “참 맛있었다”는 기억만 간직한 후배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국극단으로 들어가다

안성또순이집 주인 안성또순이 아줌마, 최점례씨. 1938년 생, 올해 여든 살이다. 생년월일만 기억할 뿐 나머지 살아온 이야기는 모두 희미하다. 더러 숨기고 싶은 부분도 있고 실제 기억이 흐릿한 내용들도 많다. 힘들게 살았다. 사람의 기억은 때로 ‘잊고 싶은 부분은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서울에서 가게를 옮긴 것도 열 번에 가깝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못 배워서 손해를 본 부분도 있다. 제대로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긴 적이 없다. 음식 장사는 잘 했지만 운영은 젬병이다.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몇 살인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세 살 무렵 이모 손을 잡고 나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친정인 개성에서 돌아가셨다. 어린 딸이다. 아이 낳으러 친정에 들렀던 어머니는 영영 시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마 산후 돌아가셨을 테고, 외갓집에서는 그녀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상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0대의 기억은 처참하다. 계모는 나주 역전에서 음식점을 운영했고 자신이 낳지 않은 딸에게 혹독했다. 학교는 아예 보내지 않았고 혼자서 하는 공부도 막았다.

10대 초반, 나주와 호남 일대를 돌아다니던 여성 국극(國劇)단을 만났다. 1950∼60년대를 휘어잡던 임춘앵, 김진진씨 등이 있는 극단이었다. 당시 톱스타였던 김진진씨는 ‘진진언니’ 혹은 ‘진진엄마’였다. 팬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팬레터의 상당수가 혈서였다. 스타를 향한 마음이 지금의 사생팬보다 더 대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계모의 학대는 도를 지나쳤다. 열너댓 살 무렵, 가출. 국극단에 몸을 얹었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국극단에 들어가니 다들 예뻐해 줬어. 셈이 빠르다고 잡일을 시키지 않고 돈 관리를 시키더라고. 은행이 마땅치 않았으니 돈을 마대자루에 넣어서 서울에 오면 겨우 은행에 예금하곤 했지. 내가 그 담당을 했어.”

10대 후반까지 국극단 언저리에 있다가 스무 살을 넘기면서 이번엔 국극단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까 그야말로 핏줄도 아닌 계모만 있었지.”

국극단 쫓아서 가출했던 딸이 고와 보일 리 없었다. 학대는 더 심해졌다.

“식당에서 일을 하는 식모가 있었어. 그때는 주방, 홀 이런 게 없었으니까 그냥 ‘식모’라고 부르고 일을 시켰지. 그 식모가 어느 날 나한테 솔깃한 제안을 하더라고. 자기가 경기도 안성에 일자리를 아니까 소개해주겠다고.”

그 길로 또 가출을 했다. 그런데 막상 안성에 오니 일자리는 없었다. 가난한 시절이다.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판에 일거리도 없으니 결국 굶는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은 무슨? 밥집이었지

“안성에서 결혼을 했어. 당장 굶을 죽을 판이니까 그 식모가 시키는 대로 시집을 갔지. 시집이 농사를 지었는데, 아이 셋을 낳았어. 힘드니까 그곳에서도 도망을 치려고 했는데 도망만 가려고 하면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 집에 와 보면 아이는 자고 있는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안성에서의 시집살이는 곧 끝이 났다. 늦은 나이에 군대 갔던 남편이 제대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바람에 그는 아이 셋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큰딸이 1962년생이다. 1970년대를 막 지나고 있었다.

종암동의 쪽방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지만 입에 풀칠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어렵게 살던 1970년대다. 을지로, 청계천이 붙어 있던 2∼3가 언저리, 인쇄공장이 죽 늘어선 곳에 가게를 열었다. 남의 집 처마 아래 탁자 두 개짜리 국수집이었다. 바지런히 일하니 먹고 살 길은 열렸다. 팔다 남은 국수라도 먹을 수 있으니 배곯을 일은 없었다.

“저 멀리 부산서 와서 내가 만든 비빔국수 맛있다고 하는 손님도 있었어. 그 손님이 국수 맛보더니 나를 보고 ‘진짜 또순이’라고 해서 그 후부터 또순이라는 이름을 썼는 걸.”

아이 셋 데리고 탁자 두 개짜리 국수집을 하는 여자. 그녀는 ‘여자’임을 가렸다. 일부러 말도 험하게 하고, 손님들에게 싸우자는 식으로 덤볐다. 국수나 김치를 더 달라고 하면 틱틱 말을 험하게 던졌다. ‘욕쟁이 아줌마’였다.

음식점은 무슨, 밥집이었지. 그녀가 입버릇으로 되뇌는 말이다. 을지로를 시작으로 국일관 옆에서도 밥집을 했다. 당시 대부분의 밥집들이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밀주를 팔았다. 단속 나오면 남아 있는 밀주는 증거자료가 되었다. 밀주만 없으면 시쳇말로 오리발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하수도에 억지로 막걸리를 쏟아버리고 시침을 뗐다.

다시 수유리 시장 옆으로 옮겼다. 그곳도 역시 밥집이었다.

정동 교회탑 올라가는 곳, 작은 탁자 4개짜리 밥집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음식은 늘 맛있었다. 최점례 대표는 자신의 음식에 대해서 평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음식이 수준급이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을지로 국수집에서는 ‘하루나 김치’를 내놓았다. 하루나는 ‘춘채(春菜)’ 혹은 ‘유채(油菜)’다. 유채김치를 담아서 얼음을 채워 바깥에 두었다가 하루 지난 다음 손님상에 내놓으면 맛있었다. 오늘날 냉장고에 보관하는 김치는 절대 그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잘 먹지도 않는 40여 년 전의 ‘하루나 김치’ 맛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정동 길’의 식당에서 사용한 민물새우, 시래기에 대한 기억도 정확하다. 바다새우 말린 것을 넣으면 국물이 탁해진다. 반드시 민물새우를 써야 시원하다. 시래기는 벗기지 않으면 된장 맛이 배지 않는다. 반드시 껍질을 벗긴 후 사용해야 한다.

또 다른 공통점은 가게 터마다 늘 말썽이 있고 옮길 때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을지로-국일관-수유시장을 거쳐 탁자 4개짜리 ‘정동 길 아래’ 식당도 마찬가지. 역시 재개발로 거의 빈손으로 나왔다.

논현동을 거쳐 청진동으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 10년 동안 장사했고 많은 단골이 있었다. 어느 날 가게 주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상속받은 이가 건물을 팔았다. 역시 제대로 된 권리금이나 보상금 없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70년대 중반, 정동 길 아래 골목에서 10년 남짓을 보내고 청진동에서 10년, 현재 자리에서 10년을 보냈다. 국수, 밀주 막걸리, 갈치 시래기조림 등을 거쳐 청진동 시절 생태찌개 전문점으로 변신했다. 이제 생태전문 20년. 참 재미있게도 음식은 꾸준히 바뀌고 있다.

“정동 길에서 고기찌개, 시래기 조림을 팔다가 생태도 팔곤 했지. 청진동 가서는 생태찌개 집을 했고. 지금 자리로 와서 생태가 귀해지면서 딸이 대구찌개도 하고, 홍어, 조기도 내놓고, 여러 가지 메뉴를 개발해서 내놓아. 딸도 열심히 해. 처음엔 생태찌개를 할 때 육수 없이 맹물로 끓였어. 그래야 국물이 맑고 시원하지. 딸애는 반대야. 내가 뭐라고 하겠어.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딸애도 쉰 살을 넘겼는데 자기 음식 만들 때가 되었지.”

맏딸 전선영씨가 운영하지만 여전히 어머니 최씨는 못 미덥다. 가끔 가게 안팎을 돌아다니고 오래된 단골들과 얼굴을 마주한다. 먹고 살기 위한 밥집을 했다. 그 밥집이 정동, 청진동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30년 이상 있었다.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이 누구나 기억하는 이유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헤아려보니 34년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현재 ‘안성또순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맏딸 전선영씨와 같이 선 최점례씨. 모녀 지간에 사진 찍을 일이 없지만 기념사진 삼아 찍었다.

-서울생활을 시작하며 그동안 약 열번 정도 가게 이사를 다녔다. 현재 신문로 자리에서 10년을 넘긴다.

-생태찌개와 동그랑땡. 젓갈은 밴댕이젓갈이다.

-‘안성또순이집’의 생태찌개. 두부와 고니, 알들이 푸짐하다.

-생태찌개 전문점에서 엉뚱하게 주목받고 있는 동그랑땡. 단골들 중 상당수는 생태찌개와 더불어 큼직한 동그랑땡을 기억한다.

[신문로 인근 맛집들 ]

광화문국밥

이름은 ‘돼지국밥’이지만 돼지고기 곤 국물인 ‘돼지곰탕’을 내놓는 집이다. 돼지곰탕 이외에 평양냉면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음식이 맑고 수수하다. 곱빼기도 가능.

몽로

합정동 ‘몽로’를 기획, 운영하고 있는 박찬일 조리장이 광화문 언저리에 런칭한 주점이다. 파스타 몇 종류를 비롯한 식사도 가능하다. 합정도 ‘몽로’와 다른 메뉴도 있다.

콩두

한식, 한정식 전문점. 실내 인테리어나 인근 경치 등도 수준급이다. 간단한 식사부터 격을 갖춘, 가격 높은 식사까지 가능하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음식은 정갈하다.

평안도만두집

아주 작은, 빌딩 지하의 만두 전문점이다. 음식은 격조가 있고 편안하다. 만두 전골이나 만두가 아주 맛있다. 점심에는 줄을 서니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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