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3대 전승, 50여년 업력… 기본 다지고, 신메뉴 개발로 옛 명성 이어

조부 장학맹씨 195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원주서 학교 세우고 중식당 운영

64년 종로 피맛골서 ‘신승관’ 열어, 북창동 거쳐 다시 종로서 새롭게 시작

해삼주스ㆍ시금치 만두 처음 선보여…3대 장수영 대표 ‘신승관’명성 이어 가

3대 전승, 3번 이사했다. 네 번째 가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34 알파빌딩 지하 ‘신승관’. 업력 50년을 넘겼으니 한반도의 이야기들은 같이 겪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딸로 이어지는 ‘신승관’ 50년의 역사는 한국에 사는 한화(韓華)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신승관’의 3대 주인 장수영씨를 만났다.

‘신승관’ 3차례 이사해도 여전한 모습

종로 피맛골에 있었던 ‘신승관’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허름한 가게, 드나드는 손님들은 마치 가족 같았다. 만두 안주만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 튀김만두에 ‘빼갈’을 기울이던 손님들도 많았다. 제대로 된 중화요리를 주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급 청요릿집 대신 허름하지만 음식은 맛깔난 곳이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 피맛골로, 그리고 북창동을 거쳐 다시 종로로 돌아왔다.

현재 ‘신승관’을 운영하고 있는 장수영 대표는 1981년생, 37세다. “전 아무 것도 모르고 엉겁결에 ‘신승관’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야무지다. 허세를 피우지도 않지만, 설렁설렁 넘어가지도 않는다. 하나하나 꼼꼼히 짚어보고 결론을 얻으면 야무지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남자, 여자 구분할 일은 더욱더 아니다. 종로 ‘신승관’은 북창동 ‘신승관’ 시절보다 활기차다.

얼마 전까지 북창동에 있다가 지금의 종로로 이사를 왔다. 그 사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종로 피맛골 ‘신승관’ 시절, 음식 배달하는 일부터 성실하게 했던 종업원이 있었다. 종로 피맛골에서 북창동으로 이사 가면서 가게 운영 일체를 그에게 맡겼다. 장수영 대표의 아버지 장경문씨가 일에 진력이 날 무렵이었다. 50세를 넘긴 나이, 30년 이상 운영해온 중식당 일이 싫었다. 그 참에 양자처럼 생각했던 직원에게 가게를 맡겼다. 평소에 잘했던 이니까 잘 운영하리라 믿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상세히 밝힐 부분은 아니지만 몇 해 사이 가게는 망가졌고 그 종업원은 사라졌다. 이사 오기 전인 2012년부터 장수영씨가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불과 4년의 기간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가게는 완전히 망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장경문씨는 “이 참에 가게를 접자”는 의견이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딸 장수영씨가 나섰다. “내가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부모님들은 펄쩍 뛰었다. 화상들은 자식들이 중식당 일을 이어받는 걸 싫어한다. 멀쩡하게 다른 일을 잘 하고 있는 딸이 중식당을 하겠다고 나서니 우선 말렸다. 게다가 2012년 4월에 장수영씨는 출산을 했다. 불과 6개월, 산모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북창동 ‘신승관’은 건물주와의 마찰도 있었다. 주인은 건물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소송까지 갔다가 종로로 이사를 했다. 이 험한 과정을 아이 낳은 지 6개월 된 산모가 다 해내야 했다.

참 특이한 이력의 화교(華僑) 3대

대부분 화교들의 삶은 굴곡이 심하다. 국경을 넘어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 현대사 50년, 한반도의 굴곡도 심했지만 중국 대륙, 대만의 사정도 조용하지 않았다.

장수영 대표의 할아버지 장학맹씨는 특이한 경력을 지닌 이였다. 장학맹씨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었다. 1930년생. 한반도로 건너온 시기도 남과 달랐다. 1950년대 후반 장학맹씨는 인천을 통하여 한반도로 건너왔다. 중국 대륙이 시끄러울 때 그는 장개석 군대의 군인이었을 것이다. 모택동의 군대에 밀려 대만으로 갔을 테고, 대만에서 한반도로 건너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가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장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원주에서 학교를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요.”

장학맹씨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원주로 간다. 자신이 군인 신분이었으니 한국의 군인들과도 친분이 있었을 것이다. 원주는 당시 군사도시였다. 그는 원주에서 화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장 선생님으로 지낸다. 학생 수 겨우 30여명이었다니 장학맹씨가 교장 겸, 교사 겸, 직원 노릇도 하는 작은 학교였을 것이다.

그는 중식당도 열었다. 호구지책이었다. 다행히 가게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사람 사귀는 일을 좋아하고 또 지인들의 도움도 많았다. ‘부대에 돈을 쓸어담는’ 수준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장학맹씨는 1964년 서울로 진출한다. 피맛골 ‘신승관’이다. 지금도 을지로에 노포로 남아 있는 ‘안동장’의 주인이 친척이다. 자연스럽게 서울의 중심지에 중식당을 열었다. 이 ‘신승관’이 서울에서 오래 산 토박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 ‘신승관’이다. 2008년 북창동으로 이사 갈 때까지 피맛골에서 ‘신승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학맹씨의 셋째 아들 장경문씨는 재미있다. 왜 식당 일을 물려받았느냐고 물었다.

“배달하면 그게 전부 내 돈이야.”

짧지만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당시는 배달이 많았다. 적당한 사이즈(?)의 배달은 장경문씨가 맡았다. 스무 살이 되지 않는 나이였다. 아버지 장학맹씨가 운영하는 가게는 운영이 잘 되었다. 여야 정치인들도 드나들고 김두한씨 같은 이들도 단골이었다. 군인, 경제인, 문화계 인사들도 드나들었다. 중국 산동 출신의 군인이 운영하는 가게. 서울 중심지인 종로 피맛골에 있으니 오가기도 편했다.

손님들이 많고 매출이 많으니 그까짓 배달음식 대금 정도야 훔쳐도 표시가 나지 않았다. 소년 장경문은 배달 나가서 돈을 받으면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재미에 배달을 하고, 중식당 일을 배우고, 끝내 중식당 일을 물려받았다.

장학맹씨는 결혼한 후 한반도로 건너와서 장경문씨 형제를 낳았다. 장경문씨도 화교 출신 여자와 결혼해 장수영씨를 비롯하여 1남2녀를 두었다.

식당 기물을 박물관에 기증하다

2008년, 피맛골 재개발로 북창동으로 이사 갈 때 ‘신승관’은 기록에 남을 행사를 했다. 모든 집기류를 포함 273점을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주방의 각종 도구와 그릇들, 벽에 있던 장식품들, 외상 장부와 예약 장부 등 중식당에 있던 모든 물품을 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장경문 씨의 이야기다.

“박물관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피맛골이 사라지니까 앞으로 복원할 길도 막막한데 중식당 중 유명했던 ‘신승관’의 기물 등을 보관하고 싶다고. 흔쾌히 동의하고 모든 내용들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하고 물품들은 기증했지요. 사진, 동영상과 물건들이 다 박물관에 있으니 앞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3대 대표인 장수영씨는 북창동 ‘신승관’을 접고 다시 종로로 이사를 할 무렵의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소개팅으로 결혼을 하고 2012년에는 영어강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봄에 아이도 태어났고, 남편은 회사 잘 다니고 있었고요. 어른들은 모두 ‘제 정신이면 어떻게 가게를 한다고 하느냐?’고 하고 저는 ‘어떻게 신승관을 접겠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하고. 저는 갑자기 ‘신승관’이 없어진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앞서 밝혔듯, 5년 기한을 채우면서 건물주는 가게를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가게 운영을 엉망으로 하면서 하루 매출이 10만∼30만 원일 정도로 가게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가게를 물려받아 어렵게 살려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못나간다”고 버텼지만 결국 2016년 2월 종로로 이사를 했다.

시금치만두와 해삼주스

‘신승관’에서 처음 선보인 ‘해삼주스(海參肘子)’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중국식 돼지고기 요리인 동파육에 해삼탕을 얹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한자를 보면 해삼과 돼지고기를 요리한 것이다.

시금치만두도 ‘신승관’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푸른색의 피를 가진 시금치만두는 지금은 은퇴한 장경문씨가 직접 싸고 있다.

장수영 대표는 두 가지 음식의 유래에 대해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피맛골 시절에 개발한 음식들이죠. 할아버지가 2005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전에 당뇨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치아도 좋지 않았고요. 그래서 아버님이 할아버지를 위해서 만든 것이 바로 시금치만두였습니다. 당뇨에 시금치가 좋다는 말을 듣고 시금치를 속에다 넣다가 어느 날 시금치를 갈아서 그 물을 만두피 반죽하는데 써보자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해삼주스도 돼지고기만 있으면 퍽퍽한 부분이 있으니까 해삼을 넣으면 더 부드러워져 치아가 약한 어른들이 드시기 좋다고 만드셨지요. 실제 식당에서 시금치만두나 해삼주스를 할아버지께 드렸는데 그걸 손님들이 보고 좋다고 해서 결국 식당 메뉴가 된 것이지요.”

여전히 시금치만두와 해삼주스는 인기 메뉴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침 장수영 대표의 아버지 장경문씨가 가게에 있었다. 주말의 서울 도심지에 있는 가게. 손님들은 꾸준히 찾아왔다. 등산복을 입은 나이든 일행들은 천연덕스럽게 시금치만두를 먹고, 짜장면을 주문했다.

낡은 건물의 지하지만 식당 내부는 깔끔했다. 화교, 화상의 역사 50년을 넘긴 집이다. 3대 전승된 가게. 아직은 젊은 30대 후반의 여사장은 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 있는 화상노포들이 내놓는 중식은 중국식도 아니고 물론 한식도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만드셨던 음식, 아버지가 만드셨던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제가 만드는 음식도 내놓을 생각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신승관의 3대 사장 장수영 대표와 이제는 은퇴한 2대 대표 장경문씨. 아버지는 지금도 ‘신승관’에 출근해 시금치 만두를 직접 빚는다.

-‘신승관’의 시그니처 메뉴인 시금치만두. 색깔이 녹색으로 아름답다.

-해삼주스, 2대 대표 장경문씨가 아버지 장학맹씨를 위해서 만든 음식이다.

-시금치를 넣은 ‘신승관’의 탕수육. 탕수육 겉껍질이 녹색이다.

-여전히 인기있는 ‘신승관’의 짜장면.

[화상노포 4곳]

안동장

을지로2가의 화상노포다. ‘안동’은 산동성의 지명. 오래된 중식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맵지 않은 실고기 짬뽕 등이 특이하다. 물만두도 수준급. 예전 음식을 내놓는다.

매화

연희동 리틀차이나타운의 화상노포다. 원래는 명동 부근의 ‘금락원’이 시작. 3대 전승된 집으로 겨울철 굴짬뽕이 아주 좋다. 탕수육 등도 노포의 냄새가 물씬하다.

개화

서울 명동에 있는 화상노포다. 작은 건물의 1, 2층을 모두 사용한다. 국내 최장 화상노포 중 하나. 짜장면과 오향장육이 추천 메뉴. 오향장육은 전통적인 화상의 맛을 보여준다.

오구반점

오래된 음식점으로 1, 2층을 연결하는 계단만 봐도 화상노포의 냄새가 난다. 예전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다. 튀김만두가 특이하다. 낡은 분위기의 오래된 음식이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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