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고향 음식 위주 해산물 전문점… 고유 음식 유지ㆍ발전, 명성 이어가

목포 자매 서울로 상경, 음식점 열어…남매ㆍ조카도 도와, 현재 백 대표 온전히 운영

낙지, 민어, 서대, 짱뚱이, 갈치 등 해산물 요리 유명세…주재료 목포 일대서 조달

단골들 콩나물국, 황석어젓갈, 칠게장 좋아해… 낙지탕탕, 낙지동동 처음 이름 붙여

‘목포자매집’ 서울 강남 경복아파트 사거리 부근이다. 골목 깊은 곳에 있다. 큰길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다. 남도음식이나 해물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이 집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의외로 업력은 오래되지 않았다. 아직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목포자매집’의 백송남 대표를 만났다.

왜 목포자매집인가?

‘목포자매집’이란 이름을 처음 들으면 누구라도 “목포에서 올라온 자매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여긴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고향이 목포는 아니다.

‘목포자매집’의 백송남 대표. 1958년 생. 실제로는 한해 이른 생일이다. 올해 환갑. 1950년대 생들 중에는 나이 한두 살 정도 늦게 기록한 이들은 많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던 시절이다.

“원래 고향은 전남 해남입니다. 해남이 고향이죠. 아버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부농이셔서 집안이 넉넉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지요. 고등학교 때 목포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목포에 있었고, 이래저래 목포와 인연이 깊지요. 그래서 서울 왔을 때 가게 이름도 목포로 정했고요. 해남은 목포에서 멀지 않으니 일이 있으면 전부 목포로 갔고,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는 광주보다 목포로 가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1980년,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던 남편과 결혼했다. 연애결혼이었다. 두 사람은 1남2녀를 두었다. 막내딸은 유복녀다. 불행히도 남편은 막내딸이 뱃속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지병이었다. 남편은 너무 일찍 떠났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어린 3남매를 데리고 혼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가 그 무렵 해남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을 넘긴 제법 오래된 음식점이었습니다. 그 언니와 더불어 음식점을 시작했지요.”

호남, 그중에서도 전남 서남해안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도 해산물을 좋아하고, 자주 먹는다”고 생각한다. 음식점을 창업할 때도 마찬가지. 평소 자신들이 먹었던 음식들 위주로 메뉴를 짠다. 홍어, 민어부터 갈치와 낙지에 이르기까지. ‘평소 먹었던 음식’을 내놓는다. 오늘날 홍어, 민어, 낙지 등이 실제 ‘전 국민의 음식’이 된 것은 이 지역 출신 사람들 덕분이다.

백 대표의 언니도 ‘집안에서 늘 먹는 음식들’로 음식점을 열었고 운영하고 있었다. 횟집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한 끝에 음식점을 하기로 하고, 언니한테 의논을 했지요. 언니가 이미 음식점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서울로 가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첫째, 넷째 언니가 합류했다. ‘목포자매’ 3명이서 서울로 상경, 음식점을 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목포자매집’으로 정했다.

식재료, 이젠 찾을 수 없는 것들

“처음 서울에서 음식점 문을 열 때는 세자매가 같이 시작했고 중간 중간, 조카들이 오기도 하고, 가족들이 가게 일에 많이 참여했지요.”

4남7녀, 적지 않은 남매들이다. 그중 백 대표는 여덟째다. “4남7녀 중 몇 번째냐?”는 질문에 “일곱 번째”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아래로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하나”라고 답했다. 그럼 여덟 번째라야 맞다. “그럼 일곱 번째가 아니다”라고 했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곱 번째가 아니라 여덟 번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번째냐고 물었던 이유가 있다.

필자도 한때 ‘목포자매집’을 자주 들렀다. 가끔 식사를 하는 도중, 주방과 홀 스텝들 사이에 이런저런 크고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진한 호남사투리다. 반쯤은 알아듣겠고, 반쯤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면 “저 사람은 언니고, 저 사람은 동생이고”라는 식이었다. 그 다음에 가보면 다른 이가 있었다. “지난번 그 언니는 시골 가고, 다른 동생이 왔다”는 식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형제, 자매가 많기에 늘 자매들이 가게에서 일하나, 싶었다.

“언니들은 대부분 주방에서 일했으니 잘 보이질 않았고 홀에서 일하는 가족들은 주로 조카들이었어요.”

음식점, 음식점 대표 인터뷰하면서 집안, 가족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다.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4남7녀도 보기 드물지만, 더불어 이들은 늘 끈끈한 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가족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백 대표네 자녀들을 포함해 자녀, 조카가 모두 33명이다. 남매, 조카들이 늘 ‘목포자매집’에 있었다. ‘목포자매집’이 늘 시끌벅적하고 훈훈했던 이유다.

“이젠 모두 떠났어요. 지금은 남동생이 도와주고 있고, 다른 자매들은 모두 돌아가고, 잠깐씩 일하던 조카들도 돌아가고.”

가족들이 일하는 것은 바뀌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이다.

“한때는 채소도 웬만한 건 목포 일대에서 가져왔는데 수송이 너무 힘들고 가져와도 쉽게 상하고…. 아직도 몇몇 채소는 고향 언저리에서 가져오는데 여러 가지로 힘이 듭니다.”

제일 큰 문제는 가격이다. 싸다, 비싸다의 문제가 아니다. 고르지 않다. 시장에서 쉽게 구하는 채소들은 가격이 싸고 고르다. 크게 변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구하는 채소들은 오히려 가격이 들쭉날쭉 이다.

상품으로서의 질도 문제다. 크기가 고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작은 것이 흔하다.

백 대표는 안다. 고향에서, 아는 이들이 재배한, 크기가 고르지 않고 가격도 들쑥날쑥한 것들이 좋다. 음식을 만들면 맛도 훨씬 낫다.

주방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 식재료가 불편하다. 크지 않으니 잔손질이 많이 간다. 감자 크기가 들쑥날쑥하면 손은 많이 가고 일거리가 늘어난다.

‘목포자매집’은 낙지, 민어, 서대, 병어, 짱뚱이, 갈치 등 생선으로 유명한 집이다. 해산물 전문점이다.

오래전부터 단골들이 손꼽는 음식(?)은 따로 있다. 단골들은 ‘목포자매집’의 콩나물국, 황석어젓갈, 칠게장 등을 좋아한다.

하루에 콩나물 3Kg를 모두 콩나물 국으로 내놓은 적도 있었다.

칠게, 칠게 젓갈은 심각하다. 칠게는 목포, 신안, 무안 앞바다에서 널리 잡는다. 귀한 게는 아니다. 갯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물이 빠지고 나면 발에 밟힐 정도로 칠게가 많다. 칠게는 3∼4c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게다. 크기가 작고 딱딱하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먹기 힘들다. 볶거나 젓갈로 만든다. 칠게장은 ‘목포자매집’ 트레이드마크였다.

“몇 달 동안 칠게장을 못 내놓은 적도 있습니다. 없으면 찾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평소에는 즐겨 먹지 않던 손님들도 막상 칠게장이 없으니까 찾더라고요. 목포에 사는 지인에게 아무리 부탁해도 그쪽에도 칠게를 잡는 이들이 없다고 하니. 결국 몇 달을 졸라서 겨우 칠게장을 구했습니다. 앞으로도 걱정입니다. 돈이 되질 않으니 잡는 이도 드물고 칠게장 담그는 이도 드뭅니다.”

간조 때 뻘에서 움직이는 칠게는 소리에 아주 예민하다. 가까운 곳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구멍으로 숨는다. 크기가 작으니 웬만큼 많이 잡아도 양은 늘 적다. 잡는 이들은 인건비도 건지기 힘들다. 결국 칠게를 잡는 이, 장을 담그는 이들은 별 생색이 나지 않고, 사는 이들은 별 생색나지 않는 물건을 비싼 돈 치르고 구해야 한다.

번거로운 칠게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음식이다. 그뿐이다. 백 대표의 기억 속에는 칠게장을 만드는 방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머니의 레시피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칠게장을 담그지만, 한 가지는 다르다. 어머니는 칠게장에 반드시 ‘끝물에 남는 풋고추’를 더했다. 지금은 ‘끝물 풋고추’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낙지탕탕이나 낙지동동이가 우리 가게에서 처음 시작한 음식이라는 건 틀린 이야깁니다. 오래 전부터 목포 일대에는 있었던 음식이지요. 낙지를 먹는 방식 중에 하나지요. 낙지를 먹기 좋게 ‘쪼사서’ 내놓는 것인데 도마에서 ‘탕탕’ 하는 소리가 나니까 ‘낙지탕탕’이고, 그 위에 계란 노른자위를 얹은 게 ‘낙지동동’이고. 식당에서 내놓으면서 이름 없이 내놓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 가게에서 처음 시작한 음식이 아니라 우리 가게에서 처음 이름을 붙인 거죠. 우리 가게에서 처음 시작한 음식은 ‘소낙비’입니다. 쇠고기와 낙지를 더한 것입니다.”

진한 호남 사투리로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호남사투리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표준말로 바꾸지만 ‘쪼사서’ 라는 말은 바꾸기 힘들다. 어감이 살질 않는다. 낙지를 도마에 얹고 칼로 잘게 다지는 것. 흔히 ‘쪼순다’ ‘쪼사서’ ‘쪼사부러’ 라고 표현한다. 그대로 쓴다. 그래야 맛이 살 것이다.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아이들 학교 보내고, 이만큼이라도 살고, 또 가게에 손님이 꾸준하고,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기도 하지요.”

어느 외식업체나 마찬가지로 백 대표 역시 식재료 값과 인건비 인상으로 힘들다. 그렇다고 음식 값을 쉽게 올릴 수는 없다.

“제 음식이면서 친정어머니 음식이고 고향 음식이니까 꾸준히 같은 걸 내놓습니다. 해산물도 오랫동안 거래하는 곳에서 늘 일정하게 구입합니다. 물론 목포 일대에서 일하는 분들이 보내오는 것들입니다.”

아들이 장가를 갔다. 며느리의 친정이 부안에서 된장을 만든다. 사돈댁에서 만든 된장을 구해서 쓴다. 재래 된장을 구하면 좋으련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목포에 있는 친척들도 장을 담가줄 정도로 시간이 넉넉지는 않다.

같은 걸음으로 걸을 것이다. 해산물과 더불어 콩나물국, 칠게장, 황석어젓갈. 오래 전에 먹었던 그 음식이 바로 지금 ‘목포자매집’의 음식이고 앞으로 지켜야 할 음식임을 잘 알고 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목포자매집’ 백송남 대표. 어린시절 어머니가 해주신 고향의 음식을 만든다.

-점심 메뉴로 나오는 짱둥이탕. 칠게장 위는 황석어젓갈. 고구마 순도 목포에서 가져온 것이다.

-낙지탕탕. 이름을 ‘목포자매집’에서 붙였다. 반드시 ‘낙지를 쪼사서’ 만든다.

-서대찜이다. 양념을 잘 발라서 굽거나 찐 서대도 아주 맛있다.

-갈치찌개. 갈치는 목포 일대에서 구해 쓴다. 큼직하게 썬 무의 맛이 일품이다.

[서울, 수도권 해산물 맛집 4곳]

신안촌-서울 광화문

남도 출신 여주인이 운영하는 노포다. 해산물 전문점은 아니지만 홍어, 민어 등 남도의 해산물을 이용한 음식들이 아주 좋다. 제철 해산물을 제대로 요리하여 내놓는다.

진도식당-경기도 안산

낡은 건물에 있는 허름한 분위기의 식당, 주점이다. 홍어, 민어 등 남도의 해산물과 더불어 각종 장류 등도 아주 좋다. 민어 뼈 등을 넣고 푹 곤 국물도 아주 좋다.

토담-서울 교대역

한식전문점이다. 주인이 해산물, 나물 등을 만지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호남 지역에서 직적 공수하는 식재료들이 아주 좋다. 저녁 코스에 나오는 삭힌 홍어전을 권한다.

노들강-서울 영동시장 부근

민어 등 호남해산물이 좋은 남도음식전문점이다. 가격 대비 음식의 질도 좋고 특히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와 젓갈들이 아주 좋다. 생선회, 조림, 탕 등을 모두 맛볼 수 있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