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면’ 고집하는 이태리음식 전문점…30여년 인고의 세월 ‘장인’이 되다

국내 유명 식당 거치고 세프들 만나 공부, 외국 경험 등 통해 내공 쌓아

“생면을 포기하는 것은 조리사를 그만두는 것”… ‘차별화된 맛’ 인기

장작 화덕 ‘서울 시내 3대 피자집’ 얘기도…3대, 11명이 조리사로 일해

‘키친 485’ 홍대 합정역 부근의 자그마한 이태리식당이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홍대 지역에 흔하게 있는 그저 그런 이태리식당이겠거니, 라고 생각하고 지나친다.

파스타, 피자 등 이태리 음식 전문점이다. 고기 요리도 아주 좋다. 내공이 깊다. 가게 밖에는 생면 파스타가 진열되어 있다. 가게 안에는 장작 화덕이 있다. 이태리음식을 참 잘 만지는 집이다. 주인이자 주방장인 태재성 씨를 만났다.

왜 ‘키친485’의 태재성 세프 인터뷰인가?

방송에 나오는 유명 세프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를 인터뷰하는가? 음식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키친485’에 갔다. 음식이 놀라웠다. 자그마한 이태리식당에서 생면을 사용하는 것은 힘들다. 품이 많이 든다. 여러 종류를 만들어내는 것도 버겁다. 음식 값을 비싸게 받더라도 인건비를 계산하면 못할 일이다. 생면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제법 있다. 그러나 생면을 내놓는 가게는 드물다. 간단하다. 꾸준히 생면을 내놓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건비 부담도 엄청나다. 결국 사장이 가장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 크지 않은 가게 한 구석에 화덕이 있다. 장작 화덕이다. 한때 ‘서울 시내 3대 피자집’이라고 손꼽혔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름이 묘하다. ‘키친485’다. ‘485’는 화덕의 윗부분 온도를 뜻한다. 485도 정도에서 굽는 피자는 드물다. “제대로 구운 피자”라는 생각이 든다. 485도에서 1분 30초 동안 굽는다고 소개한다. 가게 이름에 피자 굽는 화덕의 온도를 표시한 경우는 드물다.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 한번 들러서 피자, 파스타 등을 맛보고, 그 후로 가끔 갔다.

두 가지 음식을 보면서 놀랐다. 한번은 디저트로 구운 수박을 내놓았다.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서 굽고, 그 위에 팝핑슈가(Popping Sugar)를 올렸다. 재미있는 음식이었다,

한번은 불쑥 올리브 오일을 내놓았다. 처음 맛보는 올리브 오일이었다. 스페인 산, 올리브 오일에서 올리브의 풋내가 확 풍겼다. 특이한, 제대로 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었다. 몇몇 허브는 서울 인근의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다. 식재료에 기울이는 노력이 놀랍니다.

네이버 맛집카페 회원들과 어울려 모임도 가졌다. 다들 만족했다. 생면 파스타의 종류도 다양하다. 스파게티 면부터 푸질리, 리가토니까지. 외국에서 음식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인터뷰도 어렵게 살아온 어린 시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주인 태재성 씨의 살아온 흔적이 궁금했다. 54세. 세프로는 완숙의 단계다.

가난은 사람을 일하게 한다

가난했다. 1964년, 전북 임실 태생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흔히 ‘농사짓는 가난한 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나마 농사라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땅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 3대째의 가난이었다. 아버지의 몸도 건강하지 않았다. 농사도 못 지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는 5남1녀의 둘째였다.

“초등학교 내내 염소 키우는 게 일이었습니다. 스무 마리쯤 키웠던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염소를 강변에 데려다 놓고 말뚝에 줄을 달아서 염소를 매놓고 학교에 갔습니다. 염소를 몰아보면 이게 바로 강변으로 안 갑니다. 중간에 염소가 좋아하는 풀이라도 있으면 그걸 먹느라 계속 흩어집니다. 놀러 다닌다는 건 생각도 못했지요. 어린 시절 추억은 염소 키운 거 밖에 없습니다.”

10대 후반, 온 가족이 전북 임실에서 경남 함양으로 이주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 새로운 소 품종을 농촌에 권장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융자를 해주고 그 돈으로 소를 사게 만들었지요. 소만 있고 제대로 된 사육법은 없었습니다. 겨울철에 소가 병이 생기고 상당수가 죽었습니다. 저희 집은 이런저런 일로 동네 이장 소까지 모두 맡아서 20마리 쯤 있었는데 이게 다 죽었습니다. 융자금은 빚입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으니 야반도주한 겁니다.”

전북 임실에서 경남 함양으로, 그리고 함양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여 다시 전북 고창으로 이사를 했다.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돈이 없으니 졸업도 못했다. 먹고살 길이 막연했다. 인근의 직업훈련학교에 들어갔다. ‘입에 밥 넣는 일’은 현실이었다.

“명절에 어머니하고 도토리 따러 갔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당장 먹을 게 없으니 명절에도 도토리를 따러 갈 수밖에요.”

직업훈련학교에서는 목공일을 배웠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학교에, 서울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사촌형이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한다고 했다. 운명이었을까? “식당에서 일하면 밥은 굶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조리사가 평생 직업이 될는지 모른다

스무 살이었다. 목동 언저리의 한식집이었다. 먹는 것은 해결이 되었다.

“가난했으니까 어머니가 조미료도 못 썼죠. 육수도 만들지 않고 설탕도 못 썼죠. 어머니 음식은 늘 씁쓸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서울생활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양념이나 조미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사용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친구 소개로 스탠드 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술집 안주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어쩌면 조리사가, 평생 직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쉽지 않았다. 요리를, 음식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이도, 학교도 없었다. 아는 이도 없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친구든 선배든 조금만 안면을 트고 나면 “배우고 싶다, 알려 달라”고 매달렸다. 아는 가게 중에 ‘큰 가게’가 있으면 소개시켜달라고 떼를 썼다. 다음에 옮길 때는 다른 조건보다 ‘배울 수 있는 곳’을 택했다.

1988년 ‘장미의숲’을 거쳐 1990년대에는 청담동 ‘루이14세’로, 그 다음엔 상계동 ‘뽀뜨르’로 옮겼다. 신라호텔에 근무했던 세프들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달랐다. 음식도 달랐고, 자기 음식에 대한 확신이 깊었다.

“제가 그동안 만들었던 것은 음식도 요리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식세계에 새롭게 눈을 떴지요. 한 번도 체계적으로 음식을 배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죠.”

늘 갈증을 느꼈다.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며 같은 식당에서 일하던 여자와 결혼도 했다. 청담동 ‘궁’ ‘시안’ 등을 거치며 유명 컨설턴트와 더불어 많은 창업 식당에 컨설팅도 다녔다. 여전히 목말랐다. 배우고 싶은데 배울 기회가 없었다. 광화문의 ‘더 소호’에서도 일했다. 정치인 이회창 씨가 단골이었다. 제법 그럴 듯한 자리에 있어도 늘 목말랐다.

청담동 언저리에서 일하던 시절, 가까이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일본 조리사들이 와서 교대로 근무했다. 무턱대고 찾아가서 “1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밤을 새워서라도 음식을 배워보고 싶다”고 졸랐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음식을 배우기로 했다. 2명의 조리사에게 번갈아 음식을 배웠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매달 2, 3회 혹은 3, 4회 정도 배웠다.

“저로서는 상당히 비싼 수강료였습니다. 혼자 수강료 내기가 버거워서, 주변사람들에게 ‘같이 배우자’고 제안했습니다. 동료, 선후배들이 모여 들었지요. 한때는 30명까지 모였습니다. 외국에서 공부 하고 온 세프들에게 200만 원 정도를 주고 한 달에 한번 정도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리사들은 자기가 일하는 공간의 음식 밖에 모릅니다. 반대로 내 식당에 오시는 손님은 온 세상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먹고, 비교를 합니다. 그래서 늘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일이 끝나는 밤 11시에 시작해서 강의는 새벽 4, 5시까지 진행되었다. 8년간. 재료를 준비해서 같이 만들어보기도 했다. 억척스럽게 ‘공부하는 모임’을 유지했다. 목적은 단 하나. 음식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도 ‘공부에 대한 허기’는 여전했다.

“타워팰리스의 ‘그안’에서 일할 무렵에 처음으로 외국에 가봤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나아졌고요. 꿈도 못 꾸던 외국 레스토랑에도 가봤지요. 일본에 자주 갔습니다. 출장 겸 음식도 보고. 유럽, 이태리는 그 후에 갔습니다. 한번 가면 하루에 4, 5끼를 먹으니 식비가 많이 듭니다. 유럽의 경우, 한번 가면 먹고 자고 여행 경비 포함해서 2000만 원을 쓴 적도 있었으니까요.”

음식을 만든 세월도 이제 30년을 넘겼다. 힘들지만 작은 가게에서 생면을 고집한다.

“대치동 ‘그안’에서 일할 때 처음 생면(生麵)을 만들고, 만져 봤습니다. 확실히 다르더군요.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면은 건면과는 전혀 다릅니다. 생면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이를 낳아, 길러서, 공부시키고, 사회로 내보내는 것 같습니다. 전 과정을 다 책임지는 것이지요. 마치 자식같이….”

생면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제가 생면을 포기하는 것은 조리사를 그만둘 때입니다.”

가게 앞 나무판에 적어둔 내용 중 ‘11명’이라는 숫자가 있다. 태 세프를 비롯해 그의 집안에서 11명이 조리사가 되었다. 손재주가 좋은 큰형은 나무장작 화덕을 만들었다. 조리사다. 조카들도 상당수 조리사가 되었다. 장모님과 아내도 조리사다.

아들이 제대하고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식당이 바쁘거나 일손이 부족하면 가게 일을 돕는다. 장모님부터 아들과 조카까지. 3대, 11명이 조리사다.

천직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좋아하는 음식, 만들고 싶은 음식을 만든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 태재성 세프. 아직도 '공부'에 대한 허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뒤 오른쪽이 큰형이 만든 장작화덕이다.

-‘키친 485’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새우크림고추페투치네’.

-‘키친485’의 파스타.

- 콰트로 포르마지오 피자. 피자 도우에 고열에서 탄 흔적이 남아 있다.

-‘키친485’의 디저트다.

-가게 바깥에 진열한 각종 생면 파스타.

[파스타가 좋은 집 4곳]

도치피자

서울 역삼동에 본점이 있다. 가스화덕이 아주 좋다. 형제들이 피자와 피자 화덕 등을 개발했다. 콰트로 포르마지오 피자, 감베리크레마 파스타 등이 대표 메뉴.

몽로_서교동

‘글쓰는 조리사’ 박찬일 씨가 운영하는 편안한 주점이다. 음식의 국경을 허물어뜨렸다. 시기 별로 적절한 식재료를 구해서 사용한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란구스또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이탈리안 파인다이닝이다. 코스에 나오는 음식들도 좋지만, 에피타이저 종류들은 수준급이다. 저녁에는 코스 위주, 낮 시간의 파스타 코스도 아주 좋다.

노아

이태원 부근 해방촌에 있는 아주 작은 파스타 전문점이다. ‘노아’는 ‘노력하는 아이들’이다. 꾸밈없이 수수한 음식이 수준급이다. 치즈 얹은 피자 종류들이 강추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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