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70년 이어온 한식당…나물 등 식재료 각별, 요즘 드문 음식들 선봬

‘태호’ 식당으로 시작, 할머니 이름‘남경희’에서 상호 따와

피난길의 이승만 대통령 비빔밥 식사, 박정희 대통령 현재 자리 열어줘]

궁중ㆍ반가ㆍ서민의 음식 모아 ‘남경희 스타일’로 새로운 한식 밥상 차려

식재료에 최고의 정성 쏟아…다른 식당에서 보기 드문 음식 맛 볼 수 있어

3대 물림. 70년 가까운 업력을 지닌 ‘경희식당’의 3대 주인 이두영 대표. 이 대표는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를 직접 재배할 농장을 만들었다.스스로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속리산 주차장 무렵에 있는 ‘경희식당’. 잘 차린 한식밥상이다. 정과(正果)가 있고 보기 드문 여러 산나물이 즐비하다. 법도(法度)가 있는 밥상이다. 외꽃버섯 등 보기 드문 버섯도 여럿 있다. 평가는 엇갈린다. 좋다는 사람도 많고, 고기, 진귀한 요리가 없으니 별 볼일 없다고 폄하하는 이도 있다. ‘속리산 경희식당’의 3대 주인 이두영 씨를 만났다.

‘경희식당’ 3대 전승되다

이두영 씨. 1955년생, 올해 예순 넷이다. 대전 언저리에서 자라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대학(경영학)을 졸업하고, 사업체도 열었다. 결혼도 했고 미국에서 아이들도 태어났다. 1995년 12월 불쑥 귀국했다.

“아버님도 아프시고, 할머님은 연로하시고 결국 제가 ‘경희식당’을 물려받았지요. 부끄럽지만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경희식당’ 일을 시작한 건 아닙니다. 미국에서 벌였던 사업도 신통찮고(웃음) 이런저런 이유로 귀국했고, 결국 가게 일을 물려받았지요. 이제 가게 일을 물려받은 지 20년쯤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할머님의 음식에 대한 정성을 하나씩 깨우치고 있습니다. 할머님이 만지셨던 밥상을 기억하고 하나씩 따라하는 중이지요. 다행히 주방에 30년 이상 일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할머님하고 같이 일하셨던 분들이 계시니까 그분들과 더불어 하나씩 해나가는 중입니다.”

‘경희식당’의 한상 차림

‘경희식당’. 1949년 ‘경희식당’의 전신인 ‘태호’ 창업, 창업자는 이두영 씨의 할머니 남경희 씨다. ‘경희식당’은 할머니의 이름 ‘남경희’에서 따왔다. 이두영 대표의 아버지 고 이병종 씨를 거쳐 3대 전승됐다.

“할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식당 일을 시작하셨겠지요. 일제강점기에는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까. 할머니는 2002년에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200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비교적 장수하셨지만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요. 1932년생이니까 일흔 다섯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은행 일을 오래 하시다가 잠깐 ‘경희식당’ 일을 하셨습니다. 은퇴하고 나서지요.”

어머니의 식당일을 반대하던 아들도 은퇴 후 식당일에 개입한다.

“아버님은 잠깐 식당 일을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음식점 운영을 하신 건 아닙니다. 장 보는 일을 조금씩 하셨고, 식당 운영을 경영학적으로 바꾸셨지요. 식당에 퇴직금 개념이 없던 시절인데 10년 차 되시는 분들 퇴직금을 정산하고, 다음부터는 매년 퇴직금을 드리는 걸로. 당시 10년 근무한 분들에게는 500만 원정도의 퇴직금을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집 한 채 장만할 정도의 돈이었지요. 아버님은 ‘외식업 경영자’이셨죠.”

이제는 거의 사라져가는 들깨 송이부각
‘경희식당’, 대통령의 밥집

이두영 대표의 어린 시절 기억은 대전 선화동의 ‘태호’에서 시작된다. ‘태호’는 고 남경희 씨가 처음 문을 열었던 식당이다.

“갈비, 불고기 등을 팔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1960년대, 1970년대 초반에 할머니 음식을 많이 먹고 자랐습니다. 갈빗살을 뜯어먹고 나면 뼈 쪽에 피가 배어 있지요. 그걸 다시 구워서 주시곤 했습니다. 할머님은 처음 ‘태호’에서 시작했고 곧이어 ‘국군휴양소(유성 계룡스파텔)’에서 식당을 열었지요.”

외꽃버섯무침
전쟁 통이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 한 토막.

피난길의 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닿았다. 식사를 남경희 씨의 ‘태호’에 주문했다. 비빔밥. 피난길의 대통령은 이 비빔밥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관리를 시켜 일삼아 “참 잘 먹었다”는 말을 전했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졌다.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남아 있다. 1974년, 박 대통령이 속리산에 왔다. 경호실 직원들이 당시 ‘경희여관’에서 식사를 했다. 지금과는 달리 여관에서 아침밥을 내놓던 시절이다. 경호원들이 ‘경희여관’에서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가 대통령에게도 전해졌다. 경호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역시 ‘경희여관의 밥’을 먹어본 박 대통령이 경호원을 통해 ‘경희식당’ 주인에게 물었다. “도와 줄 일이 없느냐?” “지금 있는 자리가 식당을 열 수 없는 곳이다. 합법적으로 식당을 할 수 있게 도와 달라”. ‘경희여관’이 지금의 ‘경희식당’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고추를 집장에 묵혔다가 내놓는다
충청도 반가음식인가?

가끔 ‘경희식당’의 음식을 ‘충청도 반가(班家)음식’이라고 표현한 글을 본다. 틀렸다. 정작 충청도 음식, 충청도 반가음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내용은 없다. 충청도 보은 속리산 언저리에서 음식을 만드니까 ‘충청도 반가음식’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한양, 서울의 반가음식을 바탕에 두었다고 표현해야 한다. ‘경희식당’의 음식은 궁중, 반가, 서민의 음식을 골고루 모았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두고 ‘남경희 스타일’대로 새로운 한식 밥상을 차려낸 것이다.

남경희 씨는 서울 태생이다. 어떤 연유로 대전에 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마 충청도 출신인 남편을 따라서 대전에 오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할 뿐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지로 대전을 택했다는 말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피난민이 이승만 대통령 일행의 식사를 챙겨주었을 리는 없다. 이미 1949년 ‘태호’라는 음식점을 열었다는 걸 보면 한국전쟁 이전에 대전에 정착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남경희 씨는 당시 서울의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여고)’를 다녔다. 대략 1930년대 초반의 일이다. 결혼 전 서울에서 살았다는 뜻이다.

“할머님 친정아버님이 당시 영월군수를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의 대가 집안이었던 셈이죠. 20대에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충청도 논산의 대가 집안 출신이었고요.”

대가 집안에서 자라서 대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음식은 한양 식, 서울식 음식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을 잘 만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시가에서 또 여러 가지 새로운 음식들을 보았을 것이다.

궁중음식을 배웠다는 말은 엉터리다. 시누이가 요리학원을 다녔다.

“예전에는 혼사를 앞둔 여자들이 대부분 요리학원을 다녔습니다. 학원에서 음식을 배웠는데 그게 궁중음식으로 와전되었을 겁니다. 할머님은 궁중음식을 배운 적도 없는데 누구는 궁중음식 전수자라고 하더라고요. 엉터립니다.”

오른쪽 위의 하얀 것은 더덕이다. 잘게 찢어서 양념 후 내놓는다
‘경희식당’, 남경희식 음식

속리산 언저리로 온 것은 1970년대 초중반이다. 남경희 씨는 1981년 ‘간추린 우리음식만드는 법’이란 책을 엮었다. 사진도 별로 없이 글로만 음식 만드는 법을 상세히 적었다.

집장(汁醬)은 속성 된장이다. 곡물 가루 등을 이용하여 빠른 시간에 된장과 비슷한 장을 만든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인스턴트 장’ 만드는 방식이다. 1540년경에 쓴 ‘수운잡방’이나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 ‘시의전서’ 등에 즙장, 즙장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오래된 방식이다. ‘간추린 우리음식 만드는 법’에도 즙장, 즙장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나름대로 익혀온 즙장 만드는 법을 꼼꼼히 적었다. ‘경희식당’의 집장은 이미 1980년대에 음식 관련학과 교수들의 눈길을 끌었다.

남경희 씨는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음식, 시집와서 보고 만들었던 음식 그리고 나름의 솜씨로 만들어본 음식을 꼼꼼히 적었다. ‘정확히 계량해서 음식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정확하게 밝혔다. “계량기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다. 정성을 기울여서 균형을 맞추면 음식은 맛있다.”

현재 ‘경희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손자 이두영 대표도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식재료를 판단하기 힘들면 가장 비싼 것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비싼 식재료는 비싼 이유가 있다고 하셨죠. ‘최고의 재료를 써라. 맛의 90%는 재료에서 결정된다. 나머지 손맛은 비율이다. 굳이 계량하지 않아도 된다. 음식을 오랫동안 만져보고 정성을 다하면 손맛이 나온다. 손맛은 정성과 경륜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손자 이두영 대표, 농장을 열다

누군가가 ‘경희식당’ 반찬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물었다. 남경희 씨가 대답했다. “간소한 식단을 만들고 싶지만, 계절별로 나오는 나물들이 다르고 식재료의 맛이 다르다. 알면서 손님상에 내놓지 않을 수 없다. 계절별로 바뀌는 식재료를 반찬으로 내놓고 원래 있던 것들 중에 계속 내놓아야 할 것들도 또 내놓으면 자꾸 반찬 가짓수가 늘어난다.”

식재료가 달라지고 손님들 기호도 달라진다. 박고지 정과가 있다. 흔하디 흔한 박으로 만든 정과(正果)다. 재료는 흔하지만 손이 많이 간다. 국산 박이 귀해졌다. 이젠 재료를 구하기 힘들다. 인건비 때문에 박을 손질하는 이도 드물다. 국산 박고지가 있으면 쓰고 싶지만 구하기 쉽지 않다.

“오래 전부터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려받은 땅이 조금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사용할 산나물이나 두릅 같은 나무들을 심었습니다. 할머님이 원하셨던 대로 좋은 식재료를 조금 편하게 쓸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경희여관’이었다가 ‘경희식당’으로 바뀌었다. 여관에서 아침밥을 내놓던 시절이다
외꽃버섯(꾀꼬리버섯), 홑잎나물, 박고지 정과 등 몇몇 정과류들, 북어보푸라기 등은 다른 식당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런 음식들이 생각나면 ‘경희식당’으로 갈 일이다. 많은 음식들이 사라지고, 또 새롭게 나타난다. ‘경희식당’ 3대 70년. 새롭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음식들을 늘 상위에 내놓고 있다.

“아이가 둘 있습니다. 두 명 모두 식당 운영에 관심이 있습니다. 딸은 잠깐 ‘경희식당’에서 일하다가 현재 미국에서 식당 취업 중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판단할 일이지요. ‘경희식당’을 운영할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일을 할는지. 아이들 판단에 맡길 생각입니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산나물이 좋은 식당 4곳]

걸구쟁이
여주의 사찰음식전문점. 여주인이 어머니로부터 배운 나물 고르기, 나물 다듬기를 식당에 적용했다. 직접 채취한 산나물과 오랜 단골로부터 구입한 산나물을 내놓는다.

마당넓은집
2월의 전호나물이나 눈개승마 등 평소 보기 드문 나물들이 가을까지 줄을 잇는다. 생나물과 묵나물을 적절히 사용한다. 소백산 한우전문점이지만 나물 전문점으로 알려졌다.

부일식당
강원도 정선 하진부의 오래된 나물 전문점. 두부 요리도 수준급이다. 시골 나물 밥상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나물 전문점이 되었다. 희귀한 산나물과 버섯이 아주 좋다.

점봉산산나물
서울 교대역 부근의 산나물 전문점이다. 산나물 위주의 비빔밥이 아주 좋다. 보리밥도 가능하다. 설악산 인근 점봉산의 산나물을 사용한다. 밑반찬들도 수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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