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300회…음식 통해 우리의 삶ㆍ정서ㆍ문화ㆍ역사, 지켜야할 가치 전해

첫 회 가장 한국적 음식 비빔밥 의미 담아…우리 문화의 정수, 한민족 미래와 연결

노포 ‘경당고택’ 소박한 아침상은 ‘최고의 한식밥상’…한식 공부의 잣대 음식

전설적인 호남의 100첩 밥상 ‘남원집’ , 물려받을 이 없어 사라질 위기

한국인의 밥상에만 오르는 산나물…‘백양국수’ ‘황골 엿’ 힘겹게 명맥 유지

연재 300회를 맞았다.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린다. 모두 독자들 덕분이다.

‘현재 주간지 연재 중 최장기’라는 찬사는, 꼼꼼히 읽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맞장구쳐주신 독자들 덕분이다.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예리하게 틀린 내용을 지적해 주신 분들, 이메일로 격려해주신 분들, 모두모두 고맙고 감사드린다.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번도 빼먹지 않고 연재하면서 느낀 뒷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자화자찬일 수도 있고, 자기비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진솔하게 이야기를 남긴다.

그래, 첫 회는 비빔밥이다

'천황식당'의 비빔밥.
진주비빔밥 노포 '천황식당'의 3대 주인 김정희 씨.
2011년 10월 첫 회, 연재를 시작하면서, 과연 어떤 음식을 첫 회 주제로 정할 건지 고민했다. 결론은 비빔밥이었다. 비빔밥이 한국음식, 한식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 강변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 한국적인 음식, 외국에는 없는 음식이라는 표현은 정확하다. 비빔밥, 쌈밥 등은 외국에는 없는, 한국적인, 한국에만 있는 음식이다. 비빔밥을 연재의 첫 회 주제로 정한 이유다.

일본에는 가마메시(釜飯, 부반)가 있다. 솥밥이다. 우리의 비빔밥과는 다르다. 중국에는 골동반(骨董飯)이 있었다. 우리의 비빔밥도 한자 표기로 골동반이라 했다. 그러나 중국 골동반은 더 발전하지 않고 사라졌다. 게다가 우리의 비빔밥과는 다르다.

쌈밥도 마찬가지. ‘월남쌈’도 있지만 우리의 쌈밥처럼 다양하지 않다. 모든 채소를 쌈의 재료로 사용하고, 된장, 젓갈, 각종 생선, 고기 등을 모두 쌈 위에 올리는 우리의 쌈밥과는 거리가 있다.

울산 '함양집'의 비빔밥도 진주비빔밥이다.
진주(晉州)비빔밥과 전주비빔밥을 이야기했다. 이제 많은 이들이 진주비빔밥을 알고 있지만 불과 6년 전에는 “진주에 비빔밥이 있다고?”라고 되묻는 이가 많았다. 19세기 후반에 편집한 걸로 추정되는 ‘시의전서’의 비빔밥도 소개했다. 골동반을 ‘부?」沈?繭箚?한글 표기한 책이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은 “나의 예술은 동양과 서양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서로 충돌, 화합하며 융합하는 ‘비빔밥 예술’이다” “비빔밥을 잘 비비는 한민족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선두에 설 것이다”라고 했다. 1995년 무렵의 대담, 인터뷰 내용이다. 본격적인 컴퓨터 시대를 맞기도 전에 이미 백남준 선생은 비빔밥과 한민족의 장래에 대해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다. 첫 회 연재를 하면서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다.

노포, 이야기가 있는 인터뷰? ‘경당고택’으로 가자

2016년 3월, 216회 연재부터는 ‘오래된 노포들, 이야기가 있는 맛집 주인들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고 때로는 슬프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음식점의 주인, 주방 실장이 세상을 떠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문을 닫으면 슬프다. 잘 매만진 음식도, 그 음식을 만들던 이도 사라질 때, 문득 슬프고, 서글픈 생각이 든다. 오래된 노포들, 이야기가 있는 식당들의 주인, 주방장 인터뷰를 시작한 이유다. 이분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분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노포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곧이어 1면에서 2면으로 증면했다. “쓸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지면이 좁다”라고 하자, 편집국에서 선뜻 지면을 늘려주었다.

'경당고택'의 하늘하늘한 '국시'.
'경당고택'의 종부 권순 씨가 국수를 홍두깨로 밀고 있다. 이제 경당고택에서 국수를 더 이상 내놓지 않는다.
첫 회는 경북 안동 서후면 ‘경당고택’의 국수 이야기였다. 이 인터뷰 후 곧 ‘경당고택’에서는 건진국시, 제물국시 등 국수를 내놓지 않았다. 예상대로 종부(宗婦) 권순 님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종부는 50년 동안 집안을 찾는 손님들을 접대했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새 신부는 상복 차림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일 년에 제사만 열댓 번, 크고 작은 일로 손님은 끊이질 않았다. 많은 집안 행사를 종부는 묵묵히 해냈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행사 중 가장 큰 것들이다. 어른이 되고(관), 결혼하고(혼), 죽으면 초상을 치르고(상), 죽은 후 기일에는 제사(제)를 모신다. 중요한 순간마다 손님맞이, 제사상 차림에 국수는 필수적이었다. 미리 날짜가 예정된 ‘관혼제’에는 국수를, 미리 예상치 못하는 초상에는 육개장(개장국)을 내놓았다. 경당고택의 국수는 바로 그런 관혼상제에 사용한 국수였다.

종손은 국수와 더불어 반가의 아침밥상을 보여주었다. 간고등어구이와 몇몇 반찬이 정갈한 소박한 밥상이었다. 마음 한켠에 늘 ‘최고의 한식밥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행히 ‘경당고택’의 아침밥상은 지금도 가능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문화를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표현했다. 최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이 표현을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경당고택의 아침밥상이 바로 그러하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경당고택 ‘반가의 아침밥상’은 한식공부의 잣대가 되는 음식이다.

평생 먹을 욕을 한나절에 다 들었다

2012년 9월의 일이다. 주간한국이 48주년 기념호를 낸다고 해서 지면을 2면으로 늘리고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우리나라 맛집 33’이란 기사를 썼다. 원고를 보낸 다음 주 초, 지인이 전화를 해서 “빨리 모바일 네이버 초기 화면을 보라”고 했다. 들어가 봤더니 가관이었다.

전북 순창 '남원집'의 전설적인 100첩 반상. 정확하게는 86 그릇이다.
사건(?)의 시작은 전북 순창의 ‘남원집’ 사진 한 장이었다. 이 집의 밥상이 유명한 ‘전설적인 호남의 100첩 밥상’이다. 장, 김치까지 따져서 85그릇 정도. 큰 상에 다 올리지도 못해서 두 겹, 세 겹으로 반찬그릇을 올린다. 겹겹이 쌓인 반찬 그릇을 보면 누구나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음식 사진이 네이버 모바일 화면 초기에 떡하니 올랐다. 댓글이 야단이 났다. 대부분이 ‘욕’이다. 뭘 얻어먹고 썼느냐, 이런 음식을 소개하다니, 기자(?)가 돈을 받았겠지 등등(필자는 기자가 아니다). 그중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욕설도 많았다. 한나절이 되지 않아 욕설만 500개쯤 달렸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서 당황스러웠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어쩔 수 없다. 두고 보는 수밖에. 댓글은 1000개를 곧 넘어섰다.

이 칼럼은 반응도 좋았다. 필자가 운영자인 네이버 카페 ‘포크와젓가락’에 링크를 걸었더니 7000회 가까운 클릭 수를 기록했다(2011년 9월에 포스팅한 추석 특집도 1만회 클릭을 기록했다).

이 집도 참 애잔하다. 60세를 훨씬 넘긴 할머니 두 분이 이 많은 반찬을 다 꾸려낸다. 설마, 싶겠지만 사실이다. 반찬의 상당수는 저장식품이다. 장류와 젓갈, 김치 등등이다. 저장해둔 것을 내놓는다지만 음식 수준은 대단하다. 숫자로만 채운 밥상이 결코 아니다. 주문은 5인 이상만 받는다. 밥값도 재미있다. 9인이면 1인당 2만2000원이다. 숫자가 적으면 1인분 가격은 올라간다. 5인이면 2만5000원이라는 식이다.

언젠가부터 쉬는 날도 많아지고 있다. 언젠가 식사 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이 몇 있는데 아무도 이 음식점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2만 원대의 가격을 받으면서 85그릇의 반찬을 내는 일은 이젠 불가능하다.

산나물, 가난해서 먹었다?

산나물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대명사다.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고 살았다는 뜻이다. 과연 우리는 가난해서 이토록 많은 산나물을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유럽도 중세에는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수백만이 죽었던 것은 그들 역시 먹지 못했고,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모두 기근, 대기근의 시대를 겪었다. 어느 나라나 탐관오리의 탐학에 시달렸다.

왜 유독 한국사람들의 밥상에만 산나물이 오르는 것일까?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고 홍승면 씨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봄에는 나물을 캐고, 나물을 먹는 DNA가 있다”고 설명한다. 누구도 우리처럼 나물을 일상적으로 먹지 않는다.

'마당넓은집'의 나물 반찬 일부.
경기도 곤지암의 ‘마당넓은집’은 영주 소백산 한우를 내놓는 식당이다. 이 식당 단골손님의 상당수는 ‘마당넓은집’은 나물이 좋은 집으로 기억한다. 실제 나물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 나물이 비교적 흔한 5, 6월에는 20여 종류의 진귀한 산나물이 밥상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산나물, 사찰음식 등을 이야기할 때 늘 빠트리지 않는 집이 바로 여주 ‘걸구쟁이’다. 역시 나물 밥상이 대단하다. 두부도 좋고 고추부각, 김부각 등도 아주 좋다.

여주 '걸구쟁이'의 밥상차림.
'걸구쟁이' 안서연 대표.
‘마당넓은집’이나 ‘걸구쟁이’의 주인장들은 모두 인터뷰로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필자가 검증위원으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만났다. 이래저래 인연이 깊은 셈.

균형 잡힌(?) 썩 괜찮은 나물 밥상은 속리산 관광단지의 ‘경희식당’이다. 노포 인터뷰를 통해 이 식당도 소개했다. 현재 가게 주인 이두영 씨는 창업주 고 남경희 할머니의 손자다.

속리산 '경희식당'의 밥상차림.
'경희식당' 3대 대표 이두영 씨.
1949년 이전에 개업했으니 대략 70년에 가까운 업력이다. 인터뷰 덕분에 이두영 사장과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1993년 8월 17일, 필자는 창업주 남경희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남경희 할머니의 책에 사인을 받았고 지금도 그 책을 가지고 있다. 특정 식당의 3대 주인을 모두 만나기는 힘들다. 운 좋게도 25년 만에 손자를 또 인터뷰했다.

사라지는 것은 슬프다

늘 마음이 짠한 집은 전?임실의 ‘백양국수’다. 곽강찬, 이명희 부부가 국수를 만든 시간이 100년이다. 지금도 태양건조국수를 만들고 있다. 국수를 뽑아서 일정 시간 건조, 숙성한 다음 바깥 볕에 내다 건다. 이 국수를 며칠 동안 말리면서 낮에는 밖에 내다 걸고, 밤이면 모두 들인다. 비라도 오면 화급하게 국수를 들이고 볕이 좋으면 또 내다 걸어야 한다. 습기가 많은 계절에는 국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백양국수'는 지금도 태양건조 방식으로 국수를 말리고 있다.
전북 임실 '백양국수'의 곽강찬.이명희 씨 부부.
국수 값이 너무 싸니 가격을 좀 올리라고 하면 늘 대답은 한결같다.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만드는 국수보다 비싸게 받을 수 없다”다. 일일이 손발을 놀려 국수를 뽑고, 태양건조 과정을 거치고, 작두로 자르고, 포장을 해서 내놓는 국수가 2kg에 5000원이다. 부부가 연세가 많다. 한쪽이 아프면 국수공장 일은 중단된다.
강원도 원주 황골마을 '황씨네엿집'의 황골엿이다.
'황씨네엿집' 이현순 할머니. 아흔의 나이에 지금도 가마솥에 불을 때서 엿을 만들고 있다.
원주 황골에는 가마솥에 불을 때서 엿을 고는 이현순 할머니가 계신다. 역시 연세가 많다. 이 할머니가 아프시면 가마솥에 불을 때는 황골 엿은 끝이다. 가스불로 엿을 고는 집들은 몇몇 있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서 엿을 고는 집은 드물다.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고 슬프다.

누군가는 우리 시대 제대로 만든 음식에 대한 기록들을 남겨야 한다고 믿는다. 독자들의 격려와 비판이 큰 힘이 된다. 감사 드린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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