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넘긴 나이, 신산한 삶에서 일궈낸 김치찌개 명성 자자
김치 직접 담가, ‘김치찌개+제육볶음’ 인기…단골들 많아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김치찌개 노포, 장사가 잘 되는 김치찌개 전문점, ‘굴다리김치찌개’. 주인 김정숙 씨를 만났다. 나이가 적지 않다. 1936년 생. 여든을 넘겼다. 아직도 이른 아침 매일 가게로 출근한다. 매일 손님상에 내놓을 찌개와 반찬 하나까지도 일일이 챙긴다.
‘아들 가게’가 가까운 곳에 있다. “내가 밑반찬, 김치까지 다 담가준다”고 자신한다. ‘굴다리김치찌개’ 본점이자 ‘굴다리김치찌개-엄마 집’의 대표 김정숙 씨를 만났다.
신산한 삶이다.
어두운 밤, 망망대해에 불빛 하나 없이 혼자 떠 있는 것같았을 것이다. 신파극 조로 표현하자면 “누구 잘못도 아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법하다.
서울 공덕로터리 부근 ‘굴다리김치찌개’의 주인 김정숙 씨의 삶이다. 인터뷰 대상자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지으면 당황스럽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도, 매몰차게 질문을 이어갈 수도 없다. 난감하다. 모른 척하고 인터뷰를 계속한다. 질문을 이어간다. 하지만 질문은 이미 김이 빠질 때가 많다.
고향은 황해도 장단이다. 진동면 무슨 마을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한다. “내가 거기 사람이여. 지금도 또록또록 기억혀”라고 말하면서 얼핏 고향 생각에 잠긴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가사처럼, “1ㆍ4 후퇴 때 피란 내려”왔다. 열여섯 살. 그해의 추위는 대단했다. 그 추위 속을 양말도 신지 않고 임진강을 건넜다.
피란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5남매가 동그마니 남았다. 맏이. 동생들을 모두 건사해야 했다. “내가 고아원 원장 같이 살았어”라고 말한다. 애당초 학교는 접었다. 북에서도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남에서도 마찬가지. 처음 정착한 곳은 경기도 파주. 농사를 짓는 것도 호사였다. 피란민이다. 농토가 있을 리 없다. 땅이 없는 마당에 무슨 농사랴.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피란민 장돌뱅이였다.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남편 이기동 씨는 서울에서 이발사를 하던 이였다. 경기도 파주가 고향.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옮겼다. 노량진 사육신 묘 부근의 군부대에서 남편은 이발사를 하고 김정숙 씨는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대단할 것 없다. 1950년대 중후반의 군부대 구내식당이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 그나마 군부대 식당은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6년을 넘기며 구내식당에서도 쫓겨났다. 군부대가 구내식당을 직영했다.
서울시내 군데군데를 다녔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오늘날은 번화한 상업 중심지 중 하나인 공덕로터리 부근. 이름이 ‘굴다리김치찌개’인 이유가 있다. 철길이 남아 있던 시절 인근에 기찻길과 굴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길가의 ‘하꼬방’ 같은 가게였으니 임대료가 쌌다. 그래서 얻었다.
처음부터 김치찌개를 내놓은 것도 아니었다. 설렁탕, 냉면, 닭곰탕 등 대부분의 ‘인기메뉴’를 선보였다.
“어느 날 방송국 사람들이 와서 김치찌개를 해달라고 하더라고. 그 사람들이 기잔지, 누군지 나야 모르지. 나중에 이야기 들으니까 어느 방송국 기자들이래. 김치찌개를 해달라고 하니까 해줬지.”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곳에서의 삶도 굴곡이 많기는 마찬가지. ‘하꼬방 같은 가게’가 불이 났다. 15년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수리를 하고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맏아들이 가게를 하겠다고 해서 인근의 자그마한 장소를 구해서 ‘분점’ 같이 운영 했다. 맏아들은 ‘다른 사업’을 하겠다고 나가고 둘째 아들이 현재 ‘분점 굴다리김치찌개’를 운영하고 있다. 흔히 ‘아들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예전에 철길 옆에서 가게를 할 때 하루 벌어 하루 살았어. 가난한 살림살이니 어떡혀. 일수라도 얻어서 살아야지. 일수 돈도 아무나 빌려주는 게 아니야. 일수 내고 그걸 갚고, 그렇게 살았어.”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그래도 외국 갔던 이들도 이 집 김치찌개 못 잊어서 찾아오곤 하잖아요?”라고 되묻는다. “그건 그려. 그럴 땐 김치찌개 집 하길 잘했다 싶어.” 겨우 눈물이 잦아든다.
“가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힘이 더 들어. 손님들이 많으니까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번 것도 없어. 아이들 하고 먹고 살았지. 내가 평생 모은 재산이라는 게 다 낡은 한옥 집 한 채야. 쉰 평 조금 넘어. 그게 내 전 재산이야.”
“평생 자랑거리는 있어. 내가 세금을 많이 내. 지금 내 나이에 일하는 이가 누가 있어. 다들 연금 타고 국가에서 주는 돈 받고 그러잖아. 여든을 넘기고 매년 수천만 원씩 세금 내는 사람 드물잖아.”
맞는 말이다. 재벌회사 회장이라면 몇 천 억 원의 세금을 낼 수도 있지만 김 씨는 30평 언저리 작은 ‘김치찌개 집’의 주인이다. 1년 365일의 대부분을 출근한다. 추석, 설 명절, 새해를 모두 합쳐 5일을 쉰다. 나머지는 늘 출근한다.
“아침에는 택시 타고 출근해. 저녁에는 아들이 집에 데려다 줘. 1년에 닷새를 빼고 하루 종일 가게 일 하니 어딜 가볼 수도 없고 가본 적도 없어. 가게, 집만 오가는 거지. 나이 여든을 넘겨서도 매일 일하고, 세금을 이렇게 많이 내면 나라에서 표창장이라도 줄 법 하잖아.”
“그래도 음식은 내손 거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돼”
잘되는 가게는 이유가 있다. 음식점의 본질은 음식이다. 손님이 많은 것은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인테리어를 한 것도 아니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니라면 순전히 음식 때문에 주목받는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갓 돌아온 이들, 해외교포들도 있지만 마포, 여의도 일대에도 단골들이 많다. 꿉꿉한 날 저녁, 비라도 뿌리면 사람들은 옹기종기 ‘굴다리식당’에 모여든다.
왜 이 집에 가면 편할까, 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갈 때마다 늘 푸근했다.
‘굴다리김치찌개’는 미리 끓여둔 김치찌개를 스텐 그릇에 한 그릇씩 퍼준다. 한때 이집의 김치찌개가 경상도 식 ‘갱시기(更食)’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갱시기는 경북 북부 지역에서 널리 퍼진 음식이다. 신 김치에 두부나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다. 마치 ‘갱시기’처럼 ‘굴다리김치찌개’도 한 그릇씩 퍼준다. 한 솥 가득 끓여둔 다음, 한 그릇씩 퍼주는 식이다. 양이 넉넉하다.
인터뷰 도중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들었다.
“음식은 넉넉해야 혀.”
가끔 식당 주인들에게 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다음 말이 놀랍게 들렸다.
“나는 질보다 양이야. 음식은 넉넉하게 줘야 혀. 먹다 남기면 몰라도 음식 부족한 건 못 봐. 손님들이 먹고 ‘아, 배부르다’ 해야 나도 마음이 편해. 그게 잘 먹은 거야.”
이 집 단골들은 가게에 들어서면서 묘한 주문을 한다. “하나, 하나 주세요.”라고. 김치찌개 하나에 제육볶음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 하나를 시켜서 나눠 먹어도 김치찌개는 넉넉하다. 1인분이지만 둘이 먹어도 된다. 여기에 큼직하게 썬 제육볶음을 더하면 술자리는 풍성해진다. 그렇다고 맛이 없지도 않다. 식재료도 웬만큼 가려 쓴다. 국산 고춧가루에 중국산 섞는 것을 마음 아파한다. “고춧가루 사용량은 많고, 특히 올해 같은 경우에는 국내산 고춧가루 가격이 엄청나. 국산만 쓸 수가 없어.”
인근의 ‘아들 가게’는 둘째 아들 이강우 씨가 운영하고 있다. 음식은 비슷하다. 아니 같다. 두 집 모두 같은 곳에서 12년쯤의 세월을 보냈다.
철길 가 ‘하꼬방’ 같은 집에서 불나고, 이사한 집은 재개발에 걸리고….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살다가 신산한 날, 추적추적 비 오는 날, 김치찌개’, 역시 푸근하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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