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거쳐 한반도화 된 만두… 한국 특유의 만둣국 탄생
간장 직접 담가, 화학조미료 안 쓰고 식재료 본래의 맛 살려
조랭이 떡국, 편수, 엄나무순 만두 등 요즘 드문 음식 맛볼 수 있어
사람은 음식을 만든다. 음식은 사람을 만든다. 음식을 보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을 보면 음식이 보인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하손만두’. ‘자하손만두’의 만둣국만큼이나 단아한 박혜경 대표를 만났다. 60대 중반의 나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마치 소녀같이 톡톡 튀는 웃음소리가 맑았다.
자하문(紫霞門) 언저리가 고향이다. 부암동. 서울 토박이들은 대부분 기억하는 ‘하림각’ 뒤에서 나고 자랐다.
가정집 마당에 테이블 3개를 놓고 직접 빚은 만두를 내놓았다.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두 번 들렀던 이들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테이블은 3개에서 4개로 그리고 다섯 개로 늘어났다. 그 사이 인왕산 등산로가 개방되었다. 한적했던 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걸 장사나 사업으로 생각하면 못할 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온 가족이 만두를 빚어 먹었어요. 내가 잘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니 하는 거지요. 이게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면 더 좋고요.”
친정 할머니는 서울 이화동 출신이다. 부암동으로 시집 와서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윤순이 할머니. 2011년에 102세로 돌아가셨다. 필자도 윤순이 할머니를 뵌 적이 있다. 그날 촬영한 사진의 기록을 보니, 2009년 4월 26일 일요일, 오후 6:56:18. 돌아가시기 두해 반전의 사진이다. 손으로 일일이 잣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물화 같았다.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상황이 신통치 않았으니 작은 가게를 시작했지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학교 졸업할 때였으니까. 처음 만두집을 열었을 때 친정 할머니에게 많이 배웠지요. 원래 집안 분위기가 외부 손님들 불러서 음식 나눠먹고, 작은 ‘잔치’하는 걸 좋아했어요. 음식은 나눠먹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예전에는 할머니가 이런 음식들을 모두 장만했으니까 할머니는 서울사람들의 일상적인 음식은 꿰고 계셨지요.”
마당에서 시작해서 집안의 ‘오른쪽 방’으로, 그리고 좀 더 큰방으로. 큰방에 살던 가족들이 작은 방으로 이사(?)하고 큰방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자하손만두’는 그런 소박한 과정을 거쳐서 자랐다.
“만두를 좋아하니까 통만두나 찜 만두를 자주 사다 먹었습니다. 맛있긴 한데 어릴 적 먹던 ‘집 만두’는 아니었지요. 소박한 집 만두를 먹고 싶었고 또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집 만두’와 통만두, 찜 만두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반도의 만두, 박 대표가 이야기하는 ‘집 만두’는 어떤 것일까? 그 만두는 지금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화상 만두’ ‘중국집 만두’와 어떻게 다를까?
만두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전해졌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쌍화(雙花)는 상화(霜花), 곧 만두다. 상화는 서리꽃이다. 만두를 찌면 통 속에 마치 서리꽃이 피듯이 하얗게 김이 오른다.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다. 고려 가요 ‘쌍화점’의 한 구절에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회회아비는 중앙아시아, 중동남자다. 당시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북방 이민족, 중동인이 운영하는 만두 전문점’이 있었다.
만두는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차례 대륙에서 한반도로 전해진다. 개성이나 한양을 출발, 의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도, 평안도는 대 중국 통로다. 만두는 이 지역을 통하여 한반도에 전해진다. 한번 전래되고 멈추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 고려시대에 전래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형태의 발전된 만두가 한반도에 소개된다.
‘자하손만두’의 만둣국은 한반도형 만두다. 북방의 만두는 서서히 ‘한반도 화’ 되기 시작한다. 그중 한반도 고유의 만두 음식이 바로 만둣국이다.
한국 사람들은 밥과 더불어 반드시 국물을 먹는다. ‘너 앞으로 국물도 없어’라고 말하면 절교하겠다는 의미다. ‘국물 없는 밥상’은 슬픈, 목이 메는 밥상이다. 만둣국은 ‘만두+국물’이다. 만두는 한반도에서 국물을 만나면서 한반도 특유의 만둣국이 된다.
‘자하손만두’의 만둣국은 모양도 아름답다. 각종 채소 등으로 색을 내고, 옹기종기 그릇 안에 소담스럽게 담는다.
‘자하손만두’에서 조랭이 떡국을 만났을 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조랭이 떡국은 개성음식이다.
“고 민관식 장관 부인 고 김영호 씨가 개성 출신이지요. 그분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처음 조랑이 떡국을 봤습니다. 너무 귀엽고 예뻐서 그대로 따라했지요. 만둣국에 조랭이 떡국을 넣은 음식은 그분 덕분에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자하손만두’에서 내놓고요.”
고 김영호 씨의 고향은 개성이다. 조랭이 떡국은 개성 음식이다. 북한, 개성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자하손만두’애서 개성 음식을 만났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편수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오해가 있다. 편수는 북, 개성의 음식이 아니다.
흔히 ‘개성편수’라고 표현한다. 편수가 마치 개성의 향토음식인양 말한다. 그렇지 않다. 편수는 오히려 경기도 음식, 한양 음식이다. 만두피는 둥그런 모양이지만 편수는 피 모양부터 다르다. 사각이다. 사각 모양 피의 귀퉁이에서 위로 붙이면 바닥이 네모난 만두가 된다. 편수는 한양이나 개성, 한양 인근에서도 먹었던 음식이다. 개성편수는 편수를 개성식으로 살린 것일 뿐이다.
여름철 편수는 채소로 만든다. 고기가 없으니 차가운 물에 담가 먹어도 맛있다. 버섯, 오이 등을 위주로 만든 만두다. 잘 상하지 않고 맛이 정갈하고 시원하다.
지금도 간장은 직접 담가서 사용한다. ‘자하손만두’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는 부분이다. 화학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간장의 은은한 맛만 취한다. 화학조미료가 좋거나 나빠서가 아니다. 좋든 나쁘든 화학조미료의 그악스런 맛은 식재료 고유의 맛을 넘어선다.
음식은 식재료와 양념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식재료다. 양념은 보조의 역할을 맡는다. 화학조미료로 양념을 만들면 조미료의 맛이 식재료의 맛을 넘어선다. 조미료, 양념이 주인공이 된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다.
이야기 도중 박 대표의 소녀 같은 감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아주 외진 구석 자리를 배정 받았어요. 조용하고 좋다고 생각했지요.”
백화점 내 식당은 위치에 따라 매출이 달라진다. 그런데 조용해서 좋다니. 참 엉뚱한 발상이다.
“백화점 관계자들이나 주변 지인들의 성화가 힘들었습니다. ‘자하손만두’는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담근 간장으로 맛을 내고 있습니다. 식재료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가격을 보고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재료를 써야 우리 맛이 나겠다 싶으면 그대로 사서 썼지요. 그런데 ‘조미료를 써야 손님이 온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지요.”
우연히 엄나무 순을 보고 만두에 사용한 적이 있다. 스스로 좋은 식재료다 싶어 지금도 엄나무 순이 들어간 만두를 빚는다. 깊은 정을 느끼는 음식이다. 파, 마늘도 넣지 않고 참기름, 간장으로 소(素)만두를 만든다. 파, 마늘이 몸에 나쁘기 때문에 넣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나무 순의 맛을 가리기 때문이다.
백화점 전문식당가 운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자하손만두’라는 이름을 걸고 내는 음식이 아닌 것. 장사, 매출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회가 와서 가게를 접었다.
“그동안 ‘자하손만두’를 꾸준히 찾아주신 손님들, 제 음식을 인정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사업, 장사 생각하지 말고, 음식점은 제대로 된 음식 만드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만두 맛집 4곳]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