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담백한 개성식 음식들… 2대 전승, 예전의 ‘본래맛’ 유지

만둣국 대표 메뉴…보쌈, 빈대떡, 소머리국밥도 수준급

30년 남짓한 업력, ‘기본’에 충실, 단골들 꾸준히 찾아

2대 전승 중인 박정옥 대표

만두가 좋다. 만둣국에 반해서 단골 된 이들이 많다. 보쌈도 좋다. 소박하게 나오는 소머리국밥도 수준급이다. 대단한 메뉴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퓨전하고는 거리가 멀다. 담담한 예전의 음식 그대로다. 업력도 그리 길진 않다. 이제 30년 남짓. 목동 언저리의 ‘개성집’. ‘개성’이 고유명사니 어느 집이나 ‘개성집’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이집 단골들은 ‘목동 개성집’이라고 한다. ‘목동 개성집’을 찾았다.
박정옥 대표가 주방에서 머릿고기를 다루고 있는 모습.
‘개성집’, 생계형으로 문을 열다

‘개성집’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개성 관련 음식을 내는 집들은 대규모, 혹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식당일 때가 많다. 깔끔하고 음식, 음식점 관련 스토리도 넉넉하다. ‘목동 개성집’은 그런 대단한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창업을 한 것도 불과 30년 남짓이다. 1980년대 중반이다. “이북 개성에서 만두집을 했다”는 식의 스토리는 없다.

개성집의 실내 모습.
창업주 이유순 씨는 1934년 생, 올해 85세다. 몸이 많이 불편하다. 몇 해 전부터 가게를 먼 친척인 박정옥 씨에게 맡기고 요즘은 병원과 집만 오가고 있다.

이 집의 단골들은 기억한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유순 할머니는 늘 식당 뒤편의 작은 공터에 나와 있었다. 단골들이 밥을 먹기 전 혹은 식사 후 이유순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곤 했다.

오후 나절,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큰 나무 아래 공터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늘 마음이 포근했다.

“재작년까지는 오후 나절에는 늘 가게에 나오셨습니다. 식당 음식이야 이미 잘 알고 계시니까 별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주방과 홀에서 일하는 이들 얼굴 보고, 인사 하고 늘 가게 뒤에 앉아 계시다가 가시곤 했지요. 이제 많이 불편하셔서 가게에는 거의 못 나오십니다. 음식은 할머니와 같이 일했던 분들이 주방이나 홀에서 일하고 있으니 달라질 게 없지요. 그분들이 만드시는 게 예전 할머니 음식 챙길 때와 같지요.”

만둣국. 2013년 촬영한 것이다.
창업주 이유순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平山)이다. 외가는 개성.

처음부터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게를 한 것은 아니다. ‘개성집’은, 말하자면, 생계형 가게다. 크기도 작다. 큰 길에서 보면 지하층에 있다. 사업적으로 기획하고 문을 연 대형 식당이 아니다. 더더욱 북에서 시작한, 전통(?)있는 가게도 아니다.

‘생계형 가게’는, 밥 먹고 살자고 문을 여는 경우다. ‘이유순 할머니의 개성집’은 대형 기획 식당들과는 거리가 있다. 마흔 살 무렵 목동에서 문을 열었다. 주방이라고 할 것도 없고 혼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북한 음식’을 내놓았다. 그뿐이다. 음식점이나 음식점을 시작한 이의 대단한 스토리가 없는 이유다.

음식이 전체적으로 담백하다. 요란한 맛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슴슴’하다. 그런데 단골들은 늘 ‘개성집’을 찾는다.

과일장사에서 ‘함바집’으로 그리고 ‘개성집’ 창업

이유순 할머니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30대 중후반부터 할머니는 장사에 나섰다. 1970년대 초반, 이유순 할머니는 서울 중구 정동 MBC 앞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중구 정동은 예나 지금이나 도심이다. 광화문이 지척이다. 무허가, 과일 리어카를 단속하는 이들이 그냥 두었을 리 없다. 귤, 사과 등을 파는 과일 리어카를 뒤집어엎거나 심지어는 빼앗아 갔다.

종로경찰서에 잡혀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오래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10년쯤을 버텼다.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다. ‘도시 미화, 도시 경관’을 위해 리어카는 철거대상이었다. 무허가 리어카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1980년대 초반, 누군가가 서쪽에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 있다고 알려줬다. 공사가 벌어질 터이니 공사장 인부들을 위한 ‘함바집’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일러주었다.

과일 리어카는 더 이상 힘들다. 게다가 ‘경향신문, 문화방송’이 분리되던 시점이다. ‘문화방송’은 여의도에 신사옥을 마련하면서 이사를 갔다. 길거리에 오가던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매출도 전과 같지 않았다.

1980년대 초중반, 목동신시가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마흔을 갓 넘긴 이유순 씨는 함바집을 운영하면서 그나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목동으로 오면서 정했던 메뉴는 보쌈과 소머리국밥 등이다. 오늘날 ‘목동 개성집’의 시작이다.

만둣국 2018년.
만두속 애호박이 눈에 띈다.
왜 만두인가?

‘개성집’은 목동의 공사장 ‘함바집’이 시작이다. ‘공사장 함바집’에서 얼마간의 돈을 모은 이유순 씨는 곧이어 인근의 작은 가게에 자리를 잡고 ‘개성집’을 열었다.

친가가 평산이고 외가가 개성이다. 예전에는 음식은 어머니로 전수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곁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힌다. 음식 잘 만들고, 바느질 솜씨가 일정 수준이면 “이제 시집보내도 되겠다”고 했다. 이유순 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외가 개성의 음식을 봤을 터이다.

조선시대 개성은 대 중국 통로의 주요 도시였다. 한양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한양-개성-평양-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향했다. 우리 측 사신들이나 중국 측 사신 모두 이 루트를 이용했다.

만두는 혼란스러운 음식이다. 중국인들은 만두(饅頭), 교자(餃子), 포자(包子)를 엄격하게 나눈다. 우리는 곡물 피로 싸서 만든 음식을 통칭 ‘만두’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노래인 ‘쌍화점(雙花店)’은 배경이 개성이다. 쌍화는 우리식 만두다. ‘쌍화점’에는 ‘회회아비’가 등장한다. ‘회회(回回)’는 ‘회족’이다. ‘회회’가 지금의 위구르 족 혹은 터키와 연관 있는 투르크 족이라는 설도 있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다. 조선의 수도 한양과는 불과 70Km 정도다. 멀지 않은 거리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것은 긴 여정이다. 대규모 인원들이 밥을 먹을 공간도 마땅찮다. 길 중간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를 해야 할 때도 잦았다.

조선시대 사신 단에는 반드시 주자(廚者)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조리사, 주방장이다. 중국에 갔던 주자들은 중국의 음식을 보고 왔다. 그들은 중국음식을 보고 한반도에서 그 음식을 다시 만들어 보였다. 음식은 오고가면서 뒤섞이게 마련이다. 대 중국 통로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기록에도 개성음식의 특장점이 보인다. 돼지고기, 배추의 맛이 좋다고 했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음식들이다. 반가의 음식, 서민의 음식들이 골고루 발달했다. 조랑이 떡국, 개성 편수 등은 개성 고유의 음식이다.

왜 ‘개성집’의 주력 메뉴가 만두, 만둣국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유순 씨의 외가가 개성이기 때문이다. 만두, 보쌈, 빈대떡은 개성의 일상적인 음식 혹은 행사 음식이다. 상민(常民)들이라도 행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만두를 빚고 보쌈을 내놓았다.

보쌈의 수육
재미있는 2대 전승, 음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재 이유순 할머니를 이어서 ‘개성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는 박정옥 씨다. 두세 해 전부터 이유순 할머니가 연로해서 일을 못하시니 햇수로 두해 전부터 먼 친척 박정옥 씨가 대신 운영하고 있다.

“큰 손자가 애착을 가지고 ‘개성집’을 운영하려고 오랫동안 일을 했습니다.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가게를 떠났지요. 할머니 자녀분들도 나이가 많아서 가게 운영을 할 형편이 못 되고요.”

박정옥 씨가 가게를 맡아 운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할머니와 일하던 주방 직원들을 그대로 일하게 했다. 길게는 10년 씩 이유순 할머니와 손발을 맞췄던 이들이다. 자그마한 가게다. 주방에서 일하다가 홀에 나와서 손님 식탁을 정리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도 대부분 1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만두를 늘 직접 빚습니다. 만두 속에 들어가는 것도 일정합니다.”

담백한 만두다. 필자가 드나들었던 십 수 년 동안 만두는 변하지 않았다. 만두 속이 특이하다. 개성식 만두니 돼지고기가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 채소는 부추, 애호박, 마늘, 표고버섯 등이다. 애호박을 사용하는 것이 특이하고 생강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맛이 담백하다. 속도 제법 촉촉하다. 군더더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보쌈김치의 김치
만둣국의 국물도 재미있다. 남쪽, 서울의 만두, 만두전골의 국물은 맛이 강하고 깊다. 대부분의 경우 만두와 건더기를 먹고 나서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개성집’의 만둣국 국물은 그저 무덤덤하다. 별 맛이 없다. 마치 중식당의 물만두처럼 남은 ‘물’은 먹기 곤란하다.

“소머리국밥에 쓰는 소머리고기의 경우, 할머니가 여러 번 시험하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한우와 육우를 두고 몇 번씩 삶아보고, 칼로 썰어보고, 먹어보고 시험을 하시더라고요. 한우가 아무래도 비싸지만, 가격과 관계없이 ‘육우가 부드럽다’고 하셔서 그 후에는 쭉 육우를 사용합니다.”

평양식, 북한식 빈대떡은 돼지고기를 많이 갈아 넣는다. ‘개성집’의 빈대떡은 버섯, 부추, 계란, 녹두가 주 재료다. 역시 담백하다.

“저는 인천에서 분식집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주방 일을 해봤지만 여기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로 할머니의 레시피를 새로 익히고 있습니다. 주방에 오래 일하신 분들이 있으니 당분간 그분들에게 음식을 배우려고 합니다.”

묘한 2대 전승. 음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박하고 ‘슴슴한’ 맛이 좋다. 엉뚱하게 전래된 서민적인 개성음식이다. 가게 뒤편에 ‘할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왠지 허전하지만.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이북식 만두 맛집 4곳]

봉산옥

예술의전당과 멀지 않다. 현재 주인의 윗대가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황해도 음식을 정갈하게 내놓는다. 얼마 전까지는 ‘삯국수’ 메뉴도 있었다.

개성집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개성음식전문점이다. 개성순대가 특이하다. 식사로는 조랑이 떡국이 들어간 만둣국도 가능. 만두를 직접 빚는다.

평안도만두집

서울 광화문에 있다. 전통 깊은 북한 음식을 내놓는다. 자리가 협소하다. 지하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 음식 내공은 깊다. 만두전골을 추천한다.

이북식손만두국밥

인천 청천동 골목 안의 자그마한 가게다. 인테리어 등은 보잘 것 없다. 특이한 만둣국을 내놓는다. 양도 푸짐하고 맛도 강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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