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전승 80년 넘어, ‘황등비빔밥’의 원조… ‘주인’이 만든 최상의 비빔밥

시장의 ‘상업용 비빔밥’에서 ‘역사’ 담긴 고유 비빔밥으로

깊은 맛 우러난 국물에 토렴…3대 걸쳐 본래 모습 유지해 가

‘음식은 주인이 만든다’ ‘아낌없이 내놓는다’ 원칙 지켜

이종식 대표. 황등비빔밥의 원조 '진미식당'의 3대 전승이다.
‘법적’으로는 50년 정도의 업력이다. 사업자등록증에는 “1973년 문을 열었다”고 적혀있다. 실제로는? 그 훨씬 이전이다. 1936년 혹은 그 전이다. 일제강점기다. 등록하지 않고 영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 음식점의 역사는 80년을 넘긴다.

전북 익산시 황등면의 ‘진미식당’. ‘황등비빔밥’의 원조다. ‘진미식당’을 찾았다. 그리고 3대 전승, 황등비빔밥 이야기를 들었다.

황등리, 황등면, 황등산 그리고 황등비빔밥

조금 혼란스러운 황등비빔밥의 역사에 대해서 짚는다.

‘진미식당’이 황등비빔밥의 원조다. 황등비빔밥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깊은 맛이 우러난 국물에 토렴을 한다. 밥알 하나하나에 맛이 밴다. 손님상에 비빔밥을 내기 전, 그릇째로 덥힌다. 자칫하면 손을 델 정도로 뜨겁다. 다른 비빔밥과는 차이가 난다.

황등비빔밥과 선지국.
‘진미식당’은 이런 황등비빔밥을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이 비빔밥을 내놓고 있다. 맛있다. 그리고 푸짐하다. ‘진미식당’의 업력도 길다. 인근 황등비빔밥 식당들의 역사는 겨우 20∼30년이다. 원조라고 써붙이지 않았지만 원조임에 틀림없다.

3대 전승 중인 이종식 대표. 1969년생이다. 쉰살. 늦깎이로 비빔밥 집 운영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15년쯤 되었다. 아버님이 병환 끝에 돌아가셨다. 남자 손이 필요한 비빔밥 집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빔밥 일을 지겹게 보았다.

1936년 이전에 이 지역에 상업적인 식당이 문을 연 이유가 있다. ‘황등’은 상당히 번화한 지역이었다. 돌 채취장과 기름진 농지가 있다. 덩달아 큰 우(牛)시장도 있었다.

황등은, 한때 인근 함열, 임피 등에 속했다가 황등리와 인근 황등산의 이름을 따서 황등면으로 불렀다는 게 대체적인 설명이다. 익산, 이리가 합쳐지고 곧이어 익산시 황등면이 되었다.

한때 황등석 관련 돌 가공 공장만 150개쯤 있었다. 하루 종일 돌 가공공장의 기계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황등석은 생산되고 있으나 양이 많이 줄었다. 황등석은 건축물에 사용하는 국내 생산 최고급 화강암이다. 철분이 적어 쉬 마모되지 않으니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건축물에 사용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영빈관, 독립기념관 등이 황등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황등석이 생산되고 이 일대에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황등면 일대의 경기는 흥청거렸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식당이 생긴다. 인근에 우시장이 있고, 도축장도 있었다. 바로 옆이 군산, 김제 등 농산물 생산지다. 바다도 멀지 않다. 경기가 좋은 곳에 더하여 농, 축, 수산물이 흔하다. 시장이 발달하고 황등비빔밥이 생긴 이유다. 집안에서 일상적으로 먹던 음식이 시장, 음식점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시장의 ‘상업용 비빔밥’으로 먼저 자리매김한 특이한 경우다.

이미 비빈 밥이 그릇속에 있다
비빈 밥이다. 이 상태로 손님 상에 나온다.
홍산에서 태어나 익산 황등으로

이종식 대표의 고향은 충남 부여 홍산이다. 홍산은 한때 홍산면을 비롯하여 인근 지역을 아우른 홍산현이었다. 황등은 외가 있는 곳.

홍산 출신의 아버지와 황등 출신의 어머니는 중매로 결혼했고 친가인 홍산에 자리잡았다. 양쪽 모두 농사를 짓는 집안. 1969년 이 대표가 태어나고 서너 해가 지났다. 살림살이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마침 황등에서 음식점을 하던 이 대표의 외할머니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황등에 와서 식당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딸과 사위는 황등으로 이사했다. 1973년, 이 대표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대표는 황등에서 살았다.

“음식점 일이 싫었습니다. 음식점 일을 물려받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요. 부모님이 모두 식당 일에 바쁘시니 어린 시절 부모님과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게 싫었지요. 어린 시절부터 식당 일은 저에게서 부모님을 빼앗아 간 것이니까요.”

이 대표가 황등으로 이사 갈 무렵, ‘진미식당’은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영업허가를 얻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국가에서는 세금과 위생적인 관리를 위해 영업장의 등록을 강하게 강제했다.

지금의 ‘진미식당’ 자리. 시장 바깥, 큰길가의 목이 좋은 곳이다. 가게도 제법 넓다. 70평.

큰 우시장이 인근의 강경과 익산에 있었다. 도축장이 황등 언저리에 있었으니 질 좋은 고기, 선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한때 익산시 중앙시장에 도축장이 있던 시절에는 어머니가 그곳까지 가서 직접 고기와 선지를 구했다. 돈이 잘 도는 석재 채취장과 우시장이 가까이 있었다. 손님들은 꾸준히 ‘진미식당’을 찾았다.

“그 무렵 다른 식당들은 돼지고기로 육회 비빔밥을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쇠고기 육회 비빔밥을 내놓았지요. 처음부터 쇠고기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쇠고기를 써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고요.”

황등이 쇠락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다. 석산(石山)의 석재 채취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매장량이 줄어드니 생산량도 줄었다. IMF로 경기가 얼어붙으니 석재 채취를 해도 판매가 쉽지 않았다. 건축 경기가 좋지 않은 판에 석재 채취장 경기가 좋을 리 없었다.

이종식 대표가 비빔밥을 그릇째 덥히고 있다.
황등비빔밥 원조 ‘진미식당’을 물려받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2대 사장 원금애 씨가 자리를 비웠다. “어디 가셨냐?”고 물었더니 이종식 대표가 슬며시 웃으면서 “오늘 지인들과 놀러 가셨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놀러 가셨다고 하면서 웃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 대표가 왜 웃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제 저도 가게 운영한 게 15년쯤 되었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일할 사람이 없으니 제가 가게에 들어왔지요. 15년간 일해도 늘 불안하니 가게를 비우지 못하셨을 겁니다. 최근에는 가끔 이렇게 자리를 비웁니다. 솜씨 없는 아들이지만 이제 겨우 믿을 만한가 싶습니다.”

국물 솥이다. 토렴을 하고 국물로 떠내기도 한다.
‘이제 아들을 믿고 가게를 비우는가?’ 싶어 슬며시 웃었다는 이야기다.

이 대표는 두 형제다. 형은 외지로 나가서 건축 일을 하고 있다. 달랑 남은 아들 하나. ‘진미식당’에서 일을 하기 전, 이 대표는 황등 인근의 금융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금융회사였는데 저는 집 가까운 곳으로 지사에 나와서 인근 군산이나 전주 등지에서 근무를 했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식당에는 남자가 필요하고, 결국 가까이 있던 제가 식당으로 들어왔지요.”

그게 시작이었고 그동안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님은 여전히 제 일하는 솜씨가 불안하시죠. 어머님이 정해 놓은 음식 맛이 무너질까봐 늘 걱정입니다. 최근에야 이렇게 잠깐식이라도 자리를 비우시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엄두도 못 냈던 일입니다. 국물이나 반찬 등 간 보는 일은 모두 어머님 몫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른 아침부터 음식 간을 꼼꼼하게 챙깁니다. 그동안 놀러가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어머님이 여든 살을 넘기셨는데 단 하루도 음식 챙기는 일을 손에서 놓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새벽 3시에 육수 끓이는 일부터 어머님이 다 챙기셨지요.”

15년간 참 많이 배웠다. 음식 대하는 태도부터 생활습관까지.

“이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원래 주량이 많질 않았고,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음식 간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술은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진미식당 외부 모습
일하는 원칙 두어 가지

주력 메뉴가 황등비빔밥이다. 겉으로 보기엔 비빔밥 만드는 일이 그리 까다로운 게 아니다.

“처음에는 편하게 하려고 덤볐습니다. 어머니 하시는 방법이 비과학적이고 괜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제 마음대로 해봤지요. 제가 생각하는 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더니 어느 순간 음식 맛이 이상해졌습니다. 시행착오였지요. 힘든 과정, 어려운 과정을 다 거친 음식을 내놓아야지 손님들이 편하게 드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윗대가 했던 방식을 부정할 게 아니라 그 과정을 다 배우고 나서 제가 생각하는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윗대 어머님, 외할머님 하셨던 걸 부정하고 제 방식을 고집하면 결국 시행착오가 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윗대의 방식을 다 배우고 이해한 다음 제 방식을 찾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도 있었다. 외할머니 고 조여아 씨, 어머니 원금애 씨가 입버릇처럼 했던 이야기다.

“아낌없이 내놓아라.”

음식은 푸짐하게 내놓아야 한다. 식재료는 제일 좋은 것을 골라라. 이윤을 욕심내고 음식을 만들면 그 식당은 반드시 망한다. 좋은 식재료로 정성껏 만들고 푸짐하게 내놓아라.

더 중요한 이야기도 있다. 음식은 ‘주인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쓰되 음식은 주인이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만든 음식과 종업원이 만든 음식은 차이가 있다는 거지요. 아무리 요리솜씨가 뛰어난 조리사라도 주인만큼 정성을 기울이기는 힘듭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십 년 동안 꾸준하게 음식점을 운영하려면 결국 주인이 주방장이 되어야지요. 저도 어머님 말씀대로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늘 제가 만집니다.”

다행히 아내가 주방에서 일을 돕는다. 큰 힘이 된다.

3대 전승. 긴 세월동안 음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예전에는 고추장을 만들 때 대나무 막대기로 저었다. 힘든 작업이었다. 이젠 기계로 쉽게 저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해진 부분이다. 나쁜 점도 생긴다. 국산 깨로 짜낸 참기름은 구하기 힘들어졌다. 비빔밥 맛이 아무래도 예전과 다르다. 참기름 때문이다. 고춧가루도 달라졌다. 예전처럼 국산 100%를 고집하기 힘들다.

식재료가 달라지니 음식도 달라진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비빔밥을 만드는 정성과 노력이다. 황등비빔밥과 ‘진미식당’. 다행히도 3대 전승, 순항 중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익산 맛집 4곳]

일해옥

익산 시내 콩나물 국밥 전문점이다. 업력은 그리 길지 않지만 맑고 시원한 콩나물에 기울인 노력이 놀랍다.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맑은 콩나물 국밥이다.

정순순대

익산시 중앙시장 부근의 순대국밥 집이다. 업력이 제법 길다. 50년. 지금도 수제순대를 내놓고 있다. 남도 풍의 피 순대다. 국물이 맑고 맛이 깊다. 순대 국수도 있다.

소주한잔

이름이 소줏집 같지만 익산 시내의 삼겹살 전문점이다. 질 좋은 고기를 지속적으로 내놓는다. 냄비 밥이 압권이다. 삼겹살을 먹으면서 미리 냄비 밥을 주문해야 한다.

분도정육점

익산 황등시장 안의 정육점이다. 육회와 더불어 호남식 생고기인 ‘육사시미’를 내놓는다. 육사시미를 꽈배기처럼 꼬았다. 쇠고기 구이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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