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강분남 씨 1924년 울산에서 ‘함양집’ 창업… ‘진주’이 뿌리
미나리 큰 비중, 날전복 올려, 놋그릇 사용…‘’ 처음 선보여
4대 윤희ㆍ윤정아 자매 ‘전통’ 새롭게 이어가…손님이 만족한 식사에 최선
울산 시청 부근의 ‘함양집’. 업력 95년의 노포다. 여러 가지 메뉴가 있지만 대부분 ‘ 전문점’으로 기억한다.
‘음식 장사’의 시작은 1924년. 울산 교동에서 1대 창업주 강분남 씨가 가게 문을 열었다. 정식 영업허가를 받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강분남 씨는 경남 진주를 거쳐 울산에 정착, 1924년 문을 열었다. 며느리와 딸로 승계되었다. 4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대표 윤희 씨를 만났다.
울산 ‘함양집’의 뿌리가 진주라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예전의 진주는 진주 인근의 크고 작은 고을을 모두 포함했다. ‘범 진주권’이다.
‘함양집’의 은 ‘대도시 진주’ 음식의 한 갈래다.
1대 강분남 씨, 2대는 강씨의 딸 안숙희 씨, 3대는 안씨의 며느리 황화선 씨 그리고 현재 4대는 황화선 씨의 딸 윤 희, 윤정아 씨 자매다. 이들 자매가 남편과 더불어 본점, 분점을 운영하고 있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진화, 변화하면서 오늘날의 ‘함양집’ 은 완성되었다. 곁들이는 음식들 역시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혹은 가게의 결정으로 진화하고 변화하였다. 중심에는 이 있다. 다른 음식들도 의미가 있지만 ‘함양집의 진주’은 각별히 의미가 있다.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의 을 두고 ‘원조’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전주의 기세, 세계로 뻗어가는 모양새를 보면 “무슨 소리야, 전주이지!”라고 할 법하다. 굳이 의 원조를 따지자면 경남 진주가 맞다.
부풀려지고 잘못 전해진 부분도 많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의 마지막 날, 군관민이 소를 도축해 육회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엉터리다. 양측 10만 명이 죽는 전쟁 와중에 소를 도축해서 육회을 먹었다? 명백한 엉터리다.
진주이 ‘기생들이 지켜낸 아름다운 칠보화반(花盤)’이라는 표현도 틀렸다. 진주 기생 운운하는 것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일본식 권번 제도 하의 기생들을 이른다. 조선시대 기생은 일제강점기의 기생과 다르다. ‘기생들의 칠보화반’도 엉터리다.
‘함양집’의 1대 강분남 씨는 진주에서 요정, 여관 등을 운영했던 이다. 강분남 씨는 진주를 거쳐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4년이다. 이해에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진주의 쇠락이 시작된 시점이다.
“1대 창업주 할머니의 고향이 함양이라서 함양으로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요. 워낙 오래 전 일이라서 저희들도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1대 강분남 씨는 104세까지 살면서 ‘함양집’을 창업하고, 한편으로는 ‘함양집’ 음식의 뼈대를 세우고 지켰다. ‘함양집’ 역사의 절반 이상이 창업주 강분남 씨의 몫이다.
함양집 은 고사리, 미나리, 콩나물 등 대여섯 가지의 나물을 주재료로 한다. 나물의 양이 밥의 두 배 이상 된다. 육회와 황색 계란지단을 올린다. 은 쇠고기, 무, 두부 등이 들어 있다. 제사에 사용하는 과 닮았다.
진주의 원조인 진주 ‘천황식당’과는 다르다. ‘천황식당’은 이 아니라 선짓국에 가깝다. 나물을 사용하는 방식도 다르다. 고추장 사용도 다르다.
“1대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시절 이미 전복을 사용했습니다. 창업주 할머니의 음식인 셈이죠. 울산 지역은 미나리가 좋으니까 미나리도 많이 사용하셨고요.”
일제강점기 초기에 문을 열 때 영업허가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대 안숙희 할머니는 창업주 할머니의 딸이셨는데 가게 운영에는 큰 뜻이 없었습니다. 창업주 할머니가 100세 너머까지 장수하셨으니까 가게도 오랫동안 운영하셨지요. 당연히 2대 할머니가 혼자서 운영한 기간도 길지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2대 할머니의 며느리입니다. 어머니는 스물두 살에 시집 와서 쭉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식당일 하시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약 40년 정도 운영하셨나요? 어머님은 1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미 가게 일에 참여하셨으니까 음식이나 음식점 운영 등 많은 부분을 1대 할머니께 배우셨지요.”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바뀌고 또 바뀌지 않았다.
“한때는 ‘함양집’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구구집’으로 바꾼 적도 있습니다. ‘구구집’인지 ‘구구식당’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다른 이름으로도 운영한 적이 있지요. 90년 넘는 세월동안 늘 평탄했던 건 아닙니다.”
육회도 마찬가지다. 날고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으니 익혀서 얹어보기도 했다. 음식, 음식 만들기는 묘하다. 부모님들이 운영할 당시 아버지는 고명을 담당하고 어머니는 나물을 맡았다. 부부의 의견, 음식 만지는 방식도 달랐다. 두 분의 조합에 따라 맛은 달라졌다.
‘요정’은 밥집이라기보다 요릿집, 술집이다. 이 음식 중 몇몇이 한식, 한정식 집의 음식으로 살아남았다. ‘함양집’도 마찬가지다. 이런 음식이 하나, 둘 새로운 모양으로 ‘밥상’에 나타난 것이다.
한때는 ‘아침밥 주던 여관’이 있었다. ‘방값’에 아침 식사 값을 포함했다. 이유가 있다. 40∼50년 전에는 이른 아침 식사를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을 자는 여관에서 아침밥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노포들 중에는 ‘아침식사 내놓는 여관’을 운영하다가 식당으로 재 창업한 경우도 많다.
‘함양집’도 마찬가지다. 요정에서 ‘아침밥 주는 여관’으로 그리고 과 불고기, 묵사발이 있는 전문 음식점이 된 것이다. ‘함양집’의 역사 95년 그리고 앞으로 일들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 경주 ‘함양집’에서 울산 본점으로
경주 ‘함양집’에서 처음 선보인 ‘’도 마찬가지다. 방송에 소개되고 인기를 얻었다. 울산의 본점도 경주 ‘’를 정식 메뉴로 받아 들였다. 찬반은 있다. “경주는 분점이니 아무래도 울산 본점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다.
‘함양집’의 4대는 윤희 씨와 동생 윤정아 씨다. 동생은 울산의 ‘함양집’ 분점을 맡고 있다. 자매가 남편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함양집’을 운영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교직에 있었습니다. 동생이 ‘함양집’ 운영에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분점을 내면서 어머님이 너무 힘들어서 저희 자매들에게 ‘가게 일을 도와 달라’고 하셨지요. 동생이 먼저 들어오고 제가 나중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함양집’을 맡은 지 10년이 되었네요. 100년에 가까운 역사 중 이제 겨우 10% 쯤 한 겁니다. 학교 다닐 때도 주말이면 가게 일을 도왔습니다. 그저 도와드리는 정도였죠. 가게 일을 도우면서 어머님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게 가게 운영하는 ‘비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고추장 등 장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곁에서 보고 꾸중을 들으면서 배웠습니다. 꾸중이고 구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저도 그 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함양집’도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3대에 걸쳐 만든 가게잖아요. 제가 운영하겠다고 용기를 냈죠.”
‘함양집’은 변하고 있다. 때로는 새로운 길을 간다. 이 길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돌아오면 된다. 멈추지 않고 변화, 진화한다. 잊지 않고 있는 목표는 하나다. 손님이 식사를 하고 나가면서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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