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 없는 메밀 100% 냉면…끊임없는 연구, 수준급 맛 이어가

30년 넘게 면 다뤄… 식품공학과 출신의 ‘냉면 전문가

‘우래옥’에서 냉면 배워… “완성도 높은 냉면 만들고파”

'평양옥' 김영규 대표. 100% 을 선보이고 있다. 업력 40년에 가깝다.
서울 강남 역삼동 ‘평양옥’의 주인 김영규 씨. 1962년 생, 올해 57세다. ‘평양옥’, 업력이 짧다. 올봄에 문을 열었다.

김영규 씨의 경력은 길다. 1983년부터 면(麵)을 만졌다. 외도도 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뛰쳐나간 적도 있다. 돌고 돌아 다시 냉면으로 돌아왔다. 식품공학을 전공하다가 냉면을 배웠다. 음식 사업을 하다가 다시 면의 세계로 돌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평양냉면
비빔냉면
‘평양옥’ 메밀 100%, NO MSG 냉면을 선보이다

제법 고민했다. 인터뷰 대상자일까, 아닐까? 인터뷰를 하기엔 김영규 대표가 운영하는 ‘평양옥’의 업력이 너무 짧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냉면 전문점의 대표를 인터뷰하는 것은 생뚱맞다. 노포라야 이야깃거리가 많은 법이다.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다. 김영규 대표가 음식, 음식점, 음식 관련 사업을 한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1980년대 초반부터 셈하자면 30년을 훨씬 넘겼다.

이력도 이채롭다. 식품공학과 출신의 면 전문가다. 냉면, 메밀, 육수, 제분기, 메밀가루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식품공학을 공부한 ‘티’가 난다. 20대 초반부터 음식 현장에서 일한 경력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장 체험은 힘이 있다. 마치 외톨이 무사처럼 여기 저기 떠돌았다. 이 이야기도 재미있다.

냉면도 수준급이다. 100% 메밀 냉면이다. 메밀 100%를 사용하는 냉면 전문점은 흔치 않다. 냉면 노포들은 메밀 40∼90% 냉면을 내놓는다.

100% 막국수를 내는 ‘막국수 전문점’은 제법 있다. 100% 메밀을 고집하는 냉면 전문점은 흔치 않다. 100% 메밀 냉면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100% 메밀이나 40% 메밀 냉면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르다’고 표현해야 한다.

냉면 원료인 녹쌀 혹은 메밀쌀
김영규 대표, 오랫동안 100% 메밀 냉면을 고집했고 만들어왔다. 여기저기 냉면 가게 오픈 시, 도움을 주었다. 100% 메밀 냉면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가게를 내면서도 여전히 100% 메밀 냉면을 선보이고 있다.

조미료 사용을 절제하는 부분도 특이하다. 조미료가 몸에 좋다,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미료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해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쇠고기로 국물을 내면 쇠고기 맛이 나는 것이 정상이다. 쇠고기 맛 조미료를 사용하면 쇠고기 맛을 내기는 쉽다. 그러나 이 ‘맛’은 재료 본연의 맛은 아니다.

말은 쉽다. 하지만, ‘조미료 없는 메밀 100% 냉면’은 쉽지 않다.

어복쟁반
메밀전
데모 피해서 ‘우래옥’에 입사하다

충남 청양 출신이다. 어린 시절은 대부분 대전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임지가 바뀌면 이사를 가야 한다. 할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 왔다. 할머니가 아프시고 더 이상 손자를 돌보기 힘들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다. 2남3녀의 장남. 아버지는 제대 후, 건설업을 했다. 합천댐, 대청댐 등 큰 댐 공사만 여러 개 했다.

음식을 만지거나 음식점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뛰어났다. 음식을 잘 만진다는 평가를 들으면 모두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한산소곡주를 직접 빚고 있다.

업진살로 만든 수육
대전 모 대학 식품공학과로 진학했다. 할아버지가 “음식 잘 만지면 식당 차려 주겠다”고 하신 적은 있어도 흘려들었다. 식품공학이 어떤 학문인지, 정확히 몰랐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 식품공학과로 진학한 건 아닙니다. 성적이 그 정도였습니다.(웃음) 1980년대 초반입니다. 식품제조사도 별로 없었고, 요즘은 흔한 표현입니다만, 음식 관련 ‘기술 연구 개발(R&D, Research and Development)’에 관심 있는 기업도 별로 없었습니다.”

‘음식과의 인연’은 엉뚱하게 찾아왔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 시절이다. 대학교 안팎에는 데모가 잦았다. 친구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일이 생겼다. 도무지 이해 못할 일들이 벌어지던 시절이다. 엉뚱한 일에 엮였다. 김영규 씨 역시 마찬가지. 아차, 하는 순간이면 군대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상황이었다.

“지금으로선 설명해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우선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대학 3학년, 마땅하게 취직할 곳도 없었습니다. 먼저 대전을 벗어나 서울로 가기로 하고 여기저기 지낼 만한 곳을 수소문했습니다. 대전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지요.”

친구 중에 유명 갈비 집 사장의 친척이 있었다. 그이에게 부탁해서 ‘숙식을 해결하고 일을 배울 수 있은 곳’을 찾았다. ‘우래옥’이었다. ‘우래옥’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불고기와 냉면이 유명한 곳이라는 말만 들었다.

만두 속
전설적인 면장으로 알려진 김태원 대선배를 그곳에서 만났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우래옥’에서 일했습니다. 겁이 없는 건지 용감한 건지, ‘우래옥’에서 냉면 뽑는 걸 배우고 나니 당장이라도 가게 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우래옥’은 냉면을 가장 많이 파는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하루에 2천 그릇의 냉면을 팔기도 했다.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곳이 마치 앞마당 같은 공터였다. 손님들은 그곳에 비닐을 깔고 냉면을 먹었다.

충청도 출신의 냉면 기술자

냉면 뽑는 사람들을 ‘냉면 기술자’라 부른다. 면장이라고도 한다.

유압제면기에서 메밀면이 나오고 있다.
‘냉면 기술자’들은 기술자로서의 고집이 있다. 1980년대, 4:6 혹은 6:4 면이 유행했다. 여름철에는 메밀 함량이 40%, 겨울에는 메밀 함량이 60%다. 나머지는 전분 혹은 밀가루. ‘냉면 기술자’들은 이 원칙(?)을 쉬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100% 메밀 냉면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의문을 표시하면 ‘이상한 놈’ 취급을 했다. 냉면 기술자들의 고집은 높고 높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을 넘겼다. ‘월남 1세대’는 대부분 고령이다. 냉면 업계도 마찬가지. 냉면 기술자 중, ‘월남 1세대’는 거의 없다. 김태원 면장 역시 남쪽 출신이다. ‘냉면 사부’가 북한 출신이라고 들었다. 1980년대 초반, 김태원 면장의 전성기였을 터다. ‘우래옥’의 주방에서 냉면을 배웠다.

“1986년 아시안게임 무렵에 ‘우래옥’을 그만두었습니다. ‘ㅌ’이라는 식품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들어서 덜렁 ‘우래옥’을 그만두고 ‘ㅌ’이 아니라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몇 푼 가진 돈으로 대전에서 냉면가게를 열었습니다. 쫄딱 망했지요.”

그 사이 2년쯤의 시간이 지났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냉면 집을 접고 원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ㅌ’에 입사했다. ‘장터국수’ ‘일본 사누키 우동 면’ 등을 개발했다.

“그동안 여러 번 일본을 다녔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간 적도 있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여동생을 통해 혼자서 공부하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부러웠지요. 일본은 이미 100% 메밀 소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방을 완전 공개하는 게 참 부러웠습니다. 면에 대한 연구도 활발했습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비밀 레시피, 주방장의 비밀 기술이라고 해서 잘 알려주지 않을 때였습니다. 일본은 소개 받아서 가면 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냉면공부’를 하다가 다시 냉면 집을 열기도 여러 차례. 과천, 양재, 대전 등을 거치며 때로는 ‘대박가게’를 운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쪽박’을 차고 가게 문을 닫기도 했다.

“가게를 운영하든 않든 간에 머릿속에는 냉면, 국수에 대한 생각이 늘 가득했습니다. 1990년대, 2000년대를 지나며 ‘함흥냉면 전성시대’가 왔습니다. 서울 강남의 웬만한 길가에는 함흥냉면 집이 몇 개 씩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당수 문을 닫았지만 당시에는 대단했습니다. 저는 을 배운 사람입니다. 함흥냉면이 한창 유행할 때는, ‘앞으로 영원히 시대가 오지 않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993년,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도 팔과 다리에 큰 흉터가 남아 있다. 조리사가 팔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음식 공부, 음식점 운영도 접어야 했다. 음식 말고 다른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떠돌이 무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게를 열어서 큰돈을 벌기도 하고 망한 적도 있었다. 다른 이들의 가게 오픈을 도와주기도 했다. 냉면을 떠나자고 마음먹어도 그때뿐. 오래지 않아 메밀가루를 만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맷돌제분기
“맷돌 제분기로 수백 번, 수천 번 실험을 해봤습니다. 여러 종류의 메밀을 사용해봤습니다. 제분기 속도를 늦춰보기도 하고 빠르게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큰 맷돌을 사용하면 메밀가루가 열을 적게 받습니다. 제분할 때 열을 적게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도 맷돌을 바꿔봤습니다. 큰 맷돌이고 통풍장치가 좋아서 열을 잘 식힙니다. 메밀가루가 열을 적게 받았을 때 냉면이 가장 쫄깃합니다. 반죽도 마찬가집니다. 메밀가루가 열을 많이 받으면 냉면가락이 쉽게 끊어집니다.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는 소비자의 선택입니다. 저는 ‘냉면전문가’라는 호칭이 제일 좋습니다. 제가 볼 때 완성도가 높은 냉면가락을 뽑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할 무렵, 남북정상회담에 등장한 ‘’ 덕분에 냉면 집들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섰다.

“제 경험으로는 냉면이나 국물 맛을 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입니다. 3년 간수 뺀 소금을 사용합니다. 여러 번 시험해보았습니다. 좋은 고기, 좋은 소금 사용하면 국물 맛은 어느 정도 보장됩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과 같습니다. 고기, 다시마, 표고버섯 등을 사용합니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냉면/메밀국수 맛집 4곳]

권오복분틀메밀국수

막국수와 냉면의 경계는 없다. 주인 권오복 씨가 강원도 횡계 출신. 어린 시절 먹던 ‘국수’를 내놓는다. ‘100% 국산 메밀국수’다. 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능라도

100% 메밀 냉면, 조미료 절제로 시작해서 널리 알려진 집이다. 만두 등에 대한 평가도 좋다. 분당에서 출발, 서울로 진출, 분점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광명 정인면옥

수준급의 메밀 냉면이다. 가격도 착하다. 원래 광명 ‘명인면옥’의 주인은 여의도로 이주, ‘여의도 명인면옥’을 운영하고 있다. 음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우래옥

한국전쟁 전인 1949년 문을 연 집이다. 현재 서울에서는 가장 오래된 노포다. 냉면 외에 불고기를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 메밀 함량이 높은 ‘순면’도 가능하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