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40여 업력 ‘민어 집’… 질 좋은 민어와 후한 인심으로 명성 목포 ‘민어거리’ 원조 ‘유림’ ‘영란’ 꼽아

‘민어 전문점’으로 집안 일으키고 자식 교육시켜

목포 사람들이 알아주는 맛집… “운영하는 동안 최선”

민어 회와 부속물.

‘유림횟집’인지 ‘유림식당’인지 이름도 헛갈린다. 정확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유림생선횟집, ’이라고 이야기한다. 간판에는 ‘유림횟집’이라고 적혀 있다.

목포에는 ‘민어거리’가 있다. ‘거리’라기엔 작은 골목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란횟집’도 이 골목에 있다. ‘유림생선횟집’은 ‘영란횟집’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열었다. 지내온 이력도 비슷하다.

좁은 공간이다. 한때는 동동주도 팔았다. ‘민어 집’으로 자식들 공부시켰다. 꼬박 40년간 ‘유림생선횟집’을 운영해온 김양미 대표를 만났다.

김양미 대표.

7평으로 시작한 민어전문점

1951년 생, 예순여덟 살. 50년 이상을 목포에서 살았다. 민어와의 인연도 마흔 해 가깝다.

호남 사투리가 심하다. 고향은 전남 함평. 10대 후반에 목포로 와서 평생 목포에서 살았다. 그것도 ‘민어거리’에서만 40여년을 보냈다. 누군가가, ‘유림생선횟집’의 김양미 대표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려면 ‘전문통역사’가 필요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실제 인터뷰는 ‘통역사’를 두고 진행되었다. 외지에서 공부하고 고향인 목포로 돌아온 이가 통역(?) 겸 중간 중간 설명을 곁들였다. 정겨운 호남 사투리를 고스란히 전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김양미 대표는 나이가 많으니 발음이 부실하다. 듣는 이의 능력 부족도 한몫했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가(내가) 원래 고향이 함평이여. 집안에서야 농사 지었제. 엄니가 많이 아프셨어. 어릴 때부터 엄니가 아파서 내가 일이라는 일은 다했어. 그때부터 일한 게 지금까지야. 일이라면 지긋지긋혀. 형제간? 나가 막내제. 1남2녀여. 그중 막내. 언니고 오빠고 모두 시집, 장가 가버렸제. 나 혼자만 고향에 남은 겨. 별 수 없제. 일해야제. 나락(벼) 베고 살림살이 하는 것도 나가 다했어. 반찬 맹글고, 제사 차리는 것도 나가 다했어. 힘들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어. 엄니가 해수병이 심했어. 일을 전혀 못혀.”

해수(咳嗽)병은 기침이 심한 병을 말한다. 해소라고도 한다. 기침, 해소, 천식이라는 표현도 있다. 심하면 일상생활도 힘들다.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목포로 왔어. 목포에 사촌 언니네가 있었어. 장사하고 있었제. 뭐 별다른 일이야 했겄어? 그냥 식당이야, 노전. 거기서 일했어. 삼학도 쪽에. 스물세 살 되던 해, 결혼했어. 남편? 건물 경비도 하고 그랬어. 바닷가니께 바람이 많이 불잖여. 어느 핸가는 남편이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병실에 두 달간 누워 있었던 적도 있었어. 얼추 1년간 장사를 못했지. 병 뒷바라지 하느라.”

1980년 무렵, 김양미 대표는 지금의 목포 ‘민어골목’으로 자리를 옮긴다. 남의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좁지만 자신만의 가게를 가진다.

“첨에 시작한 게 일곱 평이여. 좁았제. 손님들이 조금만 많이 오면 나래비(줄)를 서부러. 매일 가게 앞에 나래비가 섰제. 원래 식육점 하던 자리여. ‘유달식육점’이제. 식육점은 돈 많이 벌고 나갔제.”

복덕방을 통해서 100만 원쯤 주고 지금의 자리로 들어왔다. 그해 봄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먹고 살려고 가게 문을 열었다.

민어탕

동동주도 팔고 소라, 상어도 팔고

“한평생 처음 산 집이고, 결국 이 집 하나 남았제잉. 일곱 평에서 시작해서 열일곱 평이 되어 부렀어. 조금씩 사서 넣고, 또 2층도 짓고잉. 돈이 겁나게 들어 부렀어. 평생 벌어서 남은 건 이집 한 채야. 첨엔 동동주 팔고 그랬어. 나도 그랬고, 영란횟집도 그랬어. 쬐깐한 집에서 동동주 내놓고 잔술도 팔고, 상어, 소라나 생선을 되는대로 썰어서 내놓고 그랬제. 뭔 민어집이여,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싼 생선 사다가 동동주 팔고 그랬지. 당연히 밀주제잉. 직접 담아서 내놓은 게 가격이 싸니까, 사람들이 줄 서서 마시고 그랬지잉. 민어만 먹고 그런 게 어딨어. 나나 ‘영란횟집’이나 비슷하게 시작했어. ‘중앙’집(중앙횟집)이 조금 늦었고. 큰아들이 마흔둘이여. 딸이 서른일곱이고. 아들이 어리고, 딸애를 뱃속에 갖고 시작했응 게 이제 마흔해 다 되어가지.”

‘내 가게’를 운영하고 나서 엉뚱한 시련이 닥쳤다. ‘배 맹그는 회사’에 보증을 섰는데 그게 사달이 났다. ‘배 맹그는 회사’는 가까운 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배를 만드는 동안 돈이 필요하니 ‘유림횟집’을 담보로 은행 돈을 빌려 썼다. 문제는 이 선박제조 회사의 부도였다. 보증 선 만큼의 부채를 고스란히 받았다. 내 집이지만 내 집이 아니고, ‘만져보지도 못한 은행돈’을 갚아야 했다. 3000만 원.

“징글징글하제. 빚을 고스란히 떠맡아 부렀어. 나가 그 빚을 18 년 동안 갚았당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여. 징글징글혀. 잠깐만 이자를 못 내면 바로 압류가 걸리고 집을 빼앗아 간뎌. 몇 번 집이 넘어갈 뻔 했제. 남한테 돈을 빌려서 이자를 내고, 은행이자에 빌린 돈 이자에 정신이 없었어. 나가 그 빚 때문에 고생은 원 없이 해봤어. 서른여덟 해 동안 민어집 한 거? 후회 없어. 자식들 넷 모두 학교 공부 시켰고, 18 년 동안 은행 빚 다 갚았고 이젠 신간 편해. 애들 모두 출가시켰으니 바깥양반이랑 나랑 밥만 먹고 살면 돼야. 빚도 없고.”

‘유림생선횟집’을 필자에게 처음 소개해준 이는 목포 토박이다. 그는 “목포 사람들은 ‘영란횟집’ 못지않게 ‘유림횟집’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장사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야 이문이 많이 남제잉. 동네사람들이 자꾸 오면 장사는 재미가 없어(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뜻이다). 빤히 아는 처지에 안 좋은 걸 섞을 수도 없고, 아무래도 많이 퍼줘야 항께. 민어 값은 자꾸 오르고 재미가 없어, 잉.”

민어회, 민어전, 민어무침이다.

민어 제철은 8월이다

민어는 8월 한 달이 제철이다. 8월 10일을 전후해 민어가 살이 통통하고 기름기가 좋다. 임자도 등에서 민어축제를 7월에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왜 7월에 하는 지, 그런 건 모르겠고 7월 넘겨야 민어가 맛이 제대로 들제. 여름철에 폭폭 찔 때 민어가 맛있어잉.”

왜 7월에 민어축제를 하는 지 궁금하지만 ‘그건 모르겠고’라고 하니 더 물어볼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름철에만 민어가 잡힌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민어는 거의 사시사철 늘 나오는 생선이다. 대략 여름철이 되면 임자도를 중심으로 민어가 대량 잡힌다. 밤에 배를 띄워 두면 민어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여름철 이야기다.

‘왜 민어 축제가 7월에 열리는지 잘 모른다는 김양미 대표’도 민어에 관한 몇몇 이야기들은 확인해 주었다. 민어는 큰놈이 작은 놈보다 낫고, 수치가 암치보다 낫다. 특히 민어 암놈의 경우 알을 가지고 나면 살이 물러진다. 수놈은 대부분 살이 단단하다. 결국 민어 수놈 중 크기가 큰 것이 낫다는 뜻이다.

앞줄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민어무침이다.

목포 민어거리에는 민어전문점이 어깨를 맞대고 붙어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영란횟집’과 ‘유림생선횟집’도 골목 끝에 간판이 보일 정도 붙어 있다. 서로 간에 그동안 지나온 업력을 아니까 특별히 얼굴 붉힐 일도 없다. 그동안 많은 민어전문점이 생겼다. 모두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다. ‘민어 노포’에 속하는 영란, 중앙, 유림 세 곳은 서로 잘 알고 있다.

민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잡는다. 그물과 주낙이다. 주낙(long line)은 ‘연승(延繩)’이라고도 한다. 낚시의 한 방식이다. 긴 줄에 여러 개의 바늘을 달고 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시 방식이다. 주낙의 경우 민어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낮다. 그물로 잡을 경우 생선끼리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 주낙은 상대적으로 깔끔한 상태로 생선을 건져 올린다.

황석어젓갈
반찬으로 나오는 울외장아찌. 흔히 '나라즈케'라고 부른다.

김양미 대표는 ‘주낙으로 잡으나 그물로 잡으나 민어 맛은 같다’고 하면서도 가격은 주낙이 조금 더 비싸다고 했다. 능청스럽게 눙치니 더 이상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주로 7, 8kg짜리 주낙 수치를 사용하지만 11kg 정도 주낙 수치가 있으면 좋다.

“언젠가 어느 기자가 우리 집이 안주도 많이 주고 좋다고 썼어. 이젠 빚도 다 갚았고 애들 공부도 다 시켰고, 출가도 다 시켰고. 걱정거리가 없어. 동네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두 번째 접시는 회를 더 많이 줘. 가능하면 막 퍼줘. 그래야 담에 또 올 거 아냐? 인자 민어 팔아서 밥만 먹으면 된께. 남지 않는 장사가 어딨어? 내 손으로 항께, 내 손으로 썰고 싶은 대로 써니께, 많이 주고 싶으면 많이 주고, 그래도 인건비 안 나가니께 막 퍼줘도 되제잉. 여그 울 동네서 살다가 서울로 간 사람이 있어. 서울 서초동에 산다두만. 지금도 가끔 민어 먹으러 와, 잉. 민어 맛이 달라서 온디야. 차비가 들어도 민어 값 계산하면 서울서 먹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고 해, 잉.”

5년 정도 지나고 ‘가정집’으로 바꾸고 싶다

딸이 민어 집을 물려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딸도 나름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민어 집을 운영하면서 고생하는 부모님을 봤으니 아예 민어 집을 물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유림생선횟집. 간판에 매운탕이라고 썼다.

말투에 왠지 헛헛한 느낌이 배어 있다. 40년 가까이 지켜온 일터다. 이웃으로 알고 지내는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민어 원조는 ‘유림’과 ‘영란’”이라고 말한다. 목포 현지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편하게 찾는 곳이 바로 ‘유림생선횟집’이다. 그런 가게가 이제 5년 쯤 후면 문을 닫을는지 모른다.

“가정집으로 바꿔서 편하게 살고 싶어, 잉. 놀고먹고, 놀러 다니고 하는 게 소원이제.”

그래도 운영하는 동안은 그동안 민어 집을 운영했던 원칙은 지킬 터이다.

“그릇 바닥에 가베츠(양배추) 안 깔고 그대로 썰어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오니께 돈을 못 벌어. 많이 주니까, 어떤 손님이든 한 사라(접시)밖에 안 먹어. 많이 먹어도 돈은 못 벌어. 손님이 더 와도 힘들어. 와도 다 받지도 못해. 폴면(팔면) 뭐해? 남지도 않어, 잉.”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여름철 목포 맛집 4곳]

독천식당

낙지비빔밥, 낙지연포탕, 낙지탕탕이 등이 유명한 낙지 전문 식당이다. 주차장도 넓다. 낙지 음식도 맛있지만 간이 그리 강하지 않은 밑반찬들이 아주 깔끔하다.

영란횟집

‘유림생선횟집’과 더불어 민어거리 터줏대감이다. 민어회, 전, 탕이 모두 가능하다. 가게 바로 앞에 주차장도 있다. 오랫동안 전국구 맛집으로 알려졌다.

황금콩밭

서울 아현동의 원래 ‘황금콩밭’에서 두부, 청국장 등을 배운 이가 목포에 낸 가게. 서울의 ‘황금콩밭’과 비슷한 구조다. 생선 강세인 목포에서 두부, 청국장 등으로 선전하고 있다.

유달콩물

콩물, 콩국수 등으로 오랫동안 인기를 얻고 있는 목포의 노포다. 콩국물이 아주 걸죽하고 맛있다. 페트병에 담아주는 콩 국물을 테이크아웃하는 손님도 많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