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박사의 북엇국 집… 익히고 실천한 결과 3년도 안돼 명성 자자

고려대 전자공학과 출신, 연구소장ㆍ교수도 …50 중반에 음식 장사

‘모르면 배우고, 배우면 해본다’ 실천, 한ㆍ중ㆍ일ㆍ양식 4개 자격증

‘북엇국 전문점에 대한 알고리즘’ 따라 수준급 북엇국 내놔

진시황북어국

흥미롭다. 외식업은 늘 위태위태한 영세사업이다. 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외줄타기를 하는 음식점 주인. ‘흥미롭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례일 수 있다. “컴퓨터 공학박사가 북엇국 집을 운영한다”. 흥미로웠다. 북엇국도 수준급이라는 이야기였다. “한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포구 공덕로터리 부근의 ‘’ 이규호 대표를 만났다.

‘진시황’, 진짜 시원한 황태국

북엇국 집 운영 경력? 불과 2년 남짓이다. 식당 크기? 작다. 처음 시작은 8평, 한번 이사하고 나서 넓혔다고 하지만 겨우 15평이다. 식탁 대여섯 개 정도. 빼곡히 앉아도 20명 정도. 메뉴도 단출하다. 북엇국 하나로 승부(?)를 건다. 카운터도 없다. 주문은 입구의 ‘무인주문기’로 한다.

2015년 가을에 문을 열었으니 채 3년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 짧은 기간 동안 이사도 한 번 했다. 예전에는 10명 남짓 앉는 좁은 공간이었다.

북엇국은 이미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블로그 등에도 호평이 뜬다. 점심시간에는 늘 빈 좌석이 없이 빼곡하다. 이른바 ‘대기 손님’도 있다. 비교적 일찍 문을 닫는다. 공식적으로 7시30분이면 영업을 마친다. 대신 아침식사가 가능하다. 7시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이래서 장사가 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시황’은 ‘진짜 시원한 황태국’이라는 뜻이다.

'진시황북어국' 이규호 대표

이 대표의 원래 직업은 ‘연구소장’ 혹은 대학교 교수 ‘쯤’ 된다.

‘컴퓨터 공학박사’라는 표현은 얼마쯤 맞고 얼마쯤은 틀렸다. 정확하게는 ‘음성 통신 관련 분야’의 박사이자, 관련 업무를 진행하는 연구소의 소장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음식, 음식점, 음식점 주인 인터뷰를 하면서 공학, 컴퓨터 공학, 음성통신, 음성신호처리, 음식 압축기술, 음성 합성 등의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북엇국 집 주인’과의 인터뷰에서 SKT, KT, LGT 같은 이동통신 회사 이름이나 음성정보통신에 대한 여러 이론, 단어를 듣는 것은 참 생경스러웠다.

이규호 대표는 ‘연구소장 15년’ ‘학교 교수 노릇 6년’의 업력을 거쳤다. 문득 “어, 인생 2모작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북엇국 전문점이지만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문을 연 집이다.

모르면 배우고, 배우면 해본다

이규호 대표, 1960년생이다. 50대 중반을 훌쩍 넘겨서 가게 문을 열었다. ‘음성’ ‘정보통신’ 등과 음식은 거리가 멀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 두 가지를 예전이나 지금 모두 잘 해냈거나, 해내고 있다. 이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관된 원칙’이 있다. ‘모르면 배운다. 배우고 나면 직접 해본다’는 평범한 원칙이다.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10살 무렵 서울 마포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두 종류다. 하나는 부유하게 자랐던 시골생활이다. 할아버지가 인근 도시에서 대학 학장을 지내셨다. 살림살이도 윤택했다. 서울로 이사한 것은 ‘빚보증’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사업하는 집안 식구의 빚보증을 섰다. 집안 식구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보증을 섰던 아버지의 살림살이도 무너졌다. 서울에서도 가난했던 마포로 이사했다. 공덕초등학교, 경서중학교, 마포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는 건성건성 겨우 학교만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1980년대다. 고려대 전자공학과? ‘건성건성 학교 다니던’ 수준으로 입학할 정도는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인데 우연히 ‘기술책’을 한 권 봤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진공관과 라디오 회로도 등이 빼곡하게 있더라고요. 흥미가 생겨서 라디오도 분해해보고, 직접 인두로 땜질도 해봤습니다.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요. 그 무렵 아버님 봉급이 10만원 정도였는데 만 원짜리 인두를 사서 땜질을 하곤 했지요.”

'아버지의 마음을 담다'. 가게 문을 처음 열 때부터 써붙인 문구다. 밥 한끼 따뜻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다.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아버지의 ‘실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어느 날 아버님이 실직하셨다고 하고, 경제적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 시킨다고 하시더라고요. 희한한 건 ‘돈 때문에 대학 진학 못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공부해서 대학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은 ‘관(棺)’을 하나 짰다. 아끼던 공구들을 장례 치르듯 관에 모두 담아서 멀리 두었다. “대학 진학 후, 다시 공구들을 만지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아끼던 공구를 작은 ‘관’에 넣어서 ‘장례 치르듯’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후의 과정도 재미있다. ‘작심 3개월’이었다.

“석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다시 공구를 만지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번엔 좀 더 모질게 대처했다. 망치 하나로 그동안 애지중지했던 공구들을 죄다 부쉈다. 결국 망치 하나만 남았다.

중고교 때 ‘무선 앰프’ ‘오디오’만 만졌으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다. 대학 진학이 힘들었다.

평범한 원칙, “모르면 배워야 한다”

예비고사 성적으로 정원의 일정부분 인원을 선발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른바 ‘특채 선발’이다. 고려대가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예비고사 준비를 철저히 해서 본고사 없이 고려대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이 대표는 ‘참 흥미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돈이 없으니 일단 취직을 한다. LG전자에 취직한다. 대학원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일단 취업한 다음, 1년 동안 열심히 다녔다. 얼마간의 돈이 모인다. 대학원에 진학한다. ‘음성신호처리’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통신기술에 다시 취업했다. 정시출퇴근을 하지 않더라도 ‘특정 부분 기술만 개발하면 봉급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봉급을 받기 위해 직장을 다녔고, 그 사이 ‘음성압축기술’ ‘음성인식, 합성’ 등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돈이 없으면 직장을 다니고,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다시 학교로 되돌아갔다. 특이한 삶이다. 음식, 음식점도 역시 그러했다.

‘마지막 연구소장의 마지막 업무’는 허망했다. 일반인들도 자주 들었던 3G, WIBRO, 4G 등의 신기술이 등장하면서 몸담았던 연구소의 매출이 떨어졌다. 매출이 800∼900억 원이었다가 400억 원 대로 떨어졌다.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연구소장 이 대표가 ‘총대’를 맸다. 190명이던 인력을 90명으로 감축했다. 감축 작업을 끝낸 후 그도 스스로 옷을 벗었다. 외식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북어찜

음식 만들어 파는 일.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음식’은 남아 있지 않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자랐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유교 전통’적 생각을 가진 분이셨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진 분이셨다. 이 대표는 대학 입학 때까지 “누가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차라리 굶는다”고 생각했다.

음식점을 운영하겠다고 결심한 작은 계기는 있었다. 대학교 앞의 음식들은 대부분 시원찮다. 가격이 싸니 업주들 입장에서도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기 힘들다. 맛없는 학교 앞 식당의 밥을 먹으면서 늘 “은퇴하고 나면 학교 앞에서 맛있는 밥을 내놓는 식당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2015년 ‘’을 문 열었을 때 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선후배, 동기들이 이 대표에게 말했다. “이제 30년 전 이야기를 실천하네”라고.

북엇국 전문점을 위한 ‘알고리즘’

직장을 그만둔 50대의 남자. 음식 만드는 요리학원부터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등 4개 분야의 조리사 자격증을 모두 땄다.

“저녁 술장사를 하려면 고기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고기 만지는 발골(發骨) 과정도 거쳤다.

밥을 짓는 것도 나름의 원칙을 지킨다. 식당에서는 가격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철원 오대미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황태칼국수’를 하고 싶었다. 국수를 배워야 했다. 배우는 김에 냉면을 배우고 싶었다. 속초의 유명한 냉면 집에 청을 넣었다. 엄청난 ‘조건’이 붙었다. 수강료 2000만 원에 6개월 간 무급으로 일하는 조건이었다. 숙식도 본인 해결.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약 5000만 원의 경비가 드는 일이었다. 포기했다.

“마침 친분 있는 이가 부산에서 유명한 고기 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냉면도 내고요. 그이에게 말했더니 자기네 집에 와서 무급으로 일하라고 제안하더군요. 봉급은 없지만, 밥과 잠자리는 챙겨주겠다고. 그곳에서 한 달 반 일했습니다.”

허튼 짓도 해봤다. ‘’을 하기 전, 프랜차이즈 가맹점도 운영해봤다.

“경기도 안양에서 프랜차이즈 스파게티 집을 운영해봤습니다. 불과 6개월 만에 쫄딱 망했지요. 돈도 제법 날렸습니다. 수업료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면 손대지 않는다”는 교훈은 얻었다.

북엇국을 끓이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 배웠다. 무교동과 여의도의 유명 가게에서도 배웠다. 이런 저런 ‘벤치마킹 투어’도 참여했다.

2015년 9월 ‘’을 열면서 몇 가지 숫자를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국 한 그릇에 들어가는 말린 북어 무게는 20g이다. 아침밥은 쌀 5컵, 점심은 3컵, 예전 장소에서의 손익분기점은 100그릇 판매, 이사한 지금 장소의 손익분기점은 150그릇 판매.

여러 가지 음식점 경영, 음식에 대한 갖가지 숫자, 경로들이 그의 머릿속에 가지런히 모여 있다. 북엇국 육수를 낼 때 북어 대가리의 아가미 부분을 떼느냐, 마느냐, 혹은 몇 분 정도 우려내느냐, 북어를 어디서 구하느냐는 등등 소소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허망하다. 이미 그의 ‘북엇국, 북엇국 전문점에 대한 알고리즘(algorithm)’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공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사족으로 붙이자면, 구조도 혹은 업무 순서도 ‘쯤’을 뜻한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황태, 북엇국 맛집 4곳]

무교동북엇국집

황태, 북엇국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손꼽는 노포다.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널리 알려져서 늘 줄을 서야 하는 집이다. 조미료 없이 끓여내는 북엇국이 일품.

현대기사식당

명절에도 문을 여는 집으로 이미 마니아들에게는 유명하다. 택시 기사들이 추천하는 맛집. 가격이 싼 편이고 작은 북어 한 마리를 내놓는 장점도 있다.

진미식당

서울에서 속초로 향할 때 미시령 터널 전 가장 마지막에 있는 황태 전문점이다. 황태와 더불어 산나물 반찬 등이 수준급이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가게들은 한적하다.

백담황태구이

서울-속초를 잇는 도로에서 백담사 입구 우회전, 약 100여 미터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다. 황태도 수준급이지만 나머지 반찬들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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