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어 '슈루' 기원설 유력…곰탕과 다른 평민의 자연발생적 음식

잘 차려진 설렁탕 한 그릇
상당수의 사람들이 설렁탕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한다. 자주 듣는 질문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설렁탕이 어떤 음식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묻는 이도 있다. “설렁탕과 곰탕이 어떻게 다르죠?” “설렁탕은 언제 시작되었지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식이지만 설렁탕의 ‘정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설렁탕을 알아본다.

설렁탕은 사골 곤 국물이다

설렁탕은 사골 등 소의 부산물을 곤 국물이다. 소나 돼지 등은 다리가 넷이다. 다리에는 큰 뼈가 있다. 그래서 이름이 ‘사골(四骨)이다. 실제로 소의 다리뼈는 8개다. 다리 하나에 큰 뼈가 두 동강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뼈 4개, 사골이라 부른다.

설렁탕은 소의 사골과 기타 부산물로 끓이는 것이 원칙이다, 라고 설명하면 바로 “그럼 ‘사골곰탕’은 뭐예요? 그건 곰탕이에요, 설렁탕이에요?”라는 질문이 나온다.

고음, 곰, 곰탕, 설렁탕은 혼란스럽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닌 설렁탕이지만 현재의 우리 설렁탕이 ‘변화, 변형, 진화, 발전’ 되었기 때문이다. 설렁탕과 곰탕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새로운 형태의 음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차이점은 분명하다. 곰탕은 고기 위주로 곤 국물이고 설렁탕은 뼈와 내장 등 소의 부산물을 곤 국물이다. 우선 ‘설렁탕’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서울 유명 설렁탕집의 설렁탕.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나왔다? 엉터리다

선농단에서 설렁탕이 나왔다는 말은 엉터리다. 많은 이들이 “선농단=설렁탕은 거짓”이라고 하니 이제 “선농단에서 설렁탕이 나왔다”는 말은 많이 줄었다. 이 엉터리 같은 말은, “그랬으면 좋겠네”지 “그렇다”는 아니다. 그간 제법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고 널리 확산된 이야기다.

“설렁탕은 조선시대 국왕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모신 후, 그 자리에 모여든 만백성들에게 널리 먹이기 위해서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넣고 국을 끓인 후 먹인 것에서 유래한다. 선농단의 탕이 설렁탕이 되었다.”

갑자기 비가 와서 어가(御駕)를 움직이지 못해서 다 같이 국밥 한 그릇씩 먹었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순진무구한 발상이다. 세종대왕 시절이라고도 하고 성종대왕 시절이라고도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랬다”가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네”다. 어떤 기록에도 ‘선농단=설렁탕’은 없다.

조선시대 유교 사회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만약 비가 와서 갑자기 설렁탕을 먹고자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불을 피우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그 많은 국물을 끓일 솥도, 그릇도, 땔감도 없었을 터이다. 순진무구한 발상이다. 귀엽기까지 하다.

언제부터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조선 왕들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자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소의 지라(비장)이다. 만하 혹은 미나라고 부른다. 설렁탕 노포에서는 지라를 내놓는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성종 6년(1475년)1월의 ‘조선왕조실록’에 선농단, 설렁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귀띔해준 적이 있었다. 뒤져봤다. 이 달에 선농단 행사는 있었지만 ‘설렁탕’은 없었다. 월산대군과 신숙주 등이 선농단 행사를 잘 진행했다고 말 한필을 받았다는 내용 등이 있다.

선농단 행사 다음날 대궐에서 ‘노주의(勞酒儀)’를 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노주의는, 행사를 치르느라 수고했다고 국왕과 군신群臣이 한잔 마시는 ‘연례(燕禮)’다. 잔치다. 예전 중국 기록에, ‘사(士)’는 천(賤)하여 경적(耕籍)에 참여하지 못한 까닭으로 또한 노주(勞酒)를 내려 주는데도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궁중에서도 그대로 하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음식에 대한 자학사관도 문제지만, 근거 없이 엉뚱한 역사와 뿌리를 갖다 붙이는 것도 난처하다. 설렁탕이 세계적인 음식이 되려면 정확한 뿌리를 찾아야 한다. 전국의 숱한 설렁탕 집 벽에는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시작되었다”고 써 붙이고 있다. 시장 통 허름한 실비집의 이야기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설렁탕 전문점이면 고쳐야 한다.

설렁탕은 몽골어 ‘슈루’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게 지금은 정설이다. 17세기 후반에 나온 <역어유해(譯語類解)>에 ‘슈루’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 근거다. 몽골의 한반도 침략이 13세기 언저리인데 무려 4백년이 지난 시점에 ‘슈루’라는 표현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다른 이야기지만 몽골군대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른 예가 있다. 몽골군대와 더불어 다녔던 아랍인들의 ‘아르크’ ‘아르흐’ 등의 표현은 지금도 경북 안동 지방에 ‘아락’ ‘아라기’ ‘아래기’로 남아 있다. ‘아락’은 아랍에서 처음 발명된 증류주 즉, 소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갖바치’ ‘장사치’ 등도 몽골식 표현이다. ‘마마’ ‘수라’도 몽골식 표현에서 나왔다. 결혼할 때 사용하는 족두리도 몽골에서 전래된 것이다. 문화가 되고 나면 생명력은 길다.

소뼈와 도가니 등으로 설렁탕을 고는 모습
설렁탕의 시작이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설렁탕과 곰탕도 혼란스러워 한다. 두 음식의 ‘시작’을 모르니 생기는 혼란이다. 눈앞에 보이는 음식을 두고 “이 음식의 어떤 부분이 다를까?”를 생각하니 혼란스럽다.

곰탕은 역사가 길고 시작부터 ‘정식 음식’이었다. 설렁탕은 자연발생의 음식이다. 기록된, 정식 음식이 아니라 민간에서 먹던 음식이 식당의 정식 메뉴가 된 것이다. 다르다.

곰탕은 동사 ‘고다’의 명사형 ‘곰’과 한자 ‘탕’이 합쳐진 말이다. 즉, ‘고은 탕’ ‘곤 국물’ ‘곤 탕’이다. 가정에서 정육을 중심으로 푹 곤 국물을 먹는 경우가 있다. 곰국이라고 한다. 가끔 ‘곰국시’라는 표현도 볼 수 있다. 곰국에 국수를 넣었다는 말이다. 곰탕이 중국 한자 표기 ‘공탕(空湯)’에서 나왔다는 말도 엉터리다. ‘공탕’은 몽골어 ‘슈루’의 한자식 표기다. 공탕은 설렁탕이다. 고기를 다 발라낸 뼈, 내장, 머리 등을 곤 국물은 공탕이자 설렁탕이다.

곰탕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대갱(大羹)’이다. ‘대’는 크다는 뜻과 더불어 으뜸, 바탕이라는 뜻이 있다. ‘대갱’은 모든 국물 음식 중 으뜸이 되는 국물이다. 고기를 곤 국물이다. 당연히 국가의 제사 등에 대갱을 사용했다. 귀한 국물이니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 조선의 반가에서도 먹었다. 기록이 없을 리 없다. 조선시대 내내 대부분의 기록에 대갱이 나온다. 곰탕은 ‘고기 곤 국물’ 즉, 대갱이다.

조선시대 말기의 조리 전문서적 “시의전서(是意全書)”에는 ‘고음(膏飮)’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오늘날의 곰탕과 비슷하다. ‘고음=곰’이라고 볼 수도 있다.

흔히 곰탕과 설렁탕을 두고 ‘재료의 차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곰탕은 질 좋은 고기를 중심으로 끓인 것이고 설렁탕은 뼈와 내장, 머리 등을 중심으로 끓인 것이다. 조선은 계급사회다. 계급사회에서는 음식도 계급별로 나뉜다.

곰탕은 반가班家의 음식이고 설렁탕은 상민常民들이 먹던 것이다. 반가의 음식은 기록으로 남고, 상민들의 먹었던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반가의 음식은 법도에 따라 만들기 때문에 레시피가 정확하고 상민들의 음식, 저자거리의 먹을거리는 처음부터 정확한 레시피가 없다. 설렁탕에 관한 기록이 드문 까닭이다.

국산뼈로 만든 설렁탕 국물(오른쪽)과 미국산 소뼈로 곤 국물. 겉모양이나 맛으로 구별하기 어렵다.
곰탕이 귀한 시절, 설렁탕도 귀했다

곰탕은 고기로, 설렁탕은 사골과 내장 등 부산물로 만들었다. 곰탕과 설렁탕은 모두 ‘소’에서 나온 것들로 만든다. 조선은 쇠고기를 금육으로 지정하고 도축을 엄하게 규제했다. 일반인들의 소 도축은 엄하게 막았고, 더러 적발되면 곤장, 유배, 가산몰수 등으로 다스렸다. 고기 한번 먹으려다 매 맞고 재산 빼앗기고, 유배 갈 일은 없다.

중앙정부와 지방 관아에서는 쇠고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종묘제사, 공자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나 향교의 제사에는 반드시 쇠고기를 사용했다. 국가에는 중국, 왜, 유구열도 등에서 사신이 온다. 손님이다. 지방 관아에도 끊임없이 외부 손님이 있다. 중앙의 관리, 상급관아의 관리들이 오간다. 고기, 쇠고기가 필요하다. 이런 쇠고기로 수육[熟肉]을 만들고 곰탕을 끓였다.

조선초기에는 화척, 양수척 등으로 불렀던 백정들이 소를 도축했다. 백정계급은 소 등 동물을 도축하고 살코기 등을 관청이나 궁궐에 납품한다. 납품 후 남는 부위가 있다. 뼈, 내장, 껍질, 소대가리 등이다.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부패는 빨리 일어난다. 부패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삶거나 굽는 것이다.

설렁탕은 시작이 언제인지 알기 힘들다. 설렁탕의 시작을 따지는 것은 “과연 언제부터 우리가 쇠고기를 먹었을까?”를 따지는 것과 같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궁궐, 관청에 납품하고 남은 부산물을 버렸을 리 없다. 서울, 한양, 경성을 설렁탕의 메카로 보는 이유다. 아무래도 나라의 수도에 소, 쇠고기가 가장 흔했을 것이다. 농사용 소는 시골에 있지만 소를 도축하는 일은 수도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설렁탕 노포 4곳]

이문설렁탕

‘이문(里門)’은 동네입구를 알리는 구조물. 이문이 있는 곳이어서 ‘이문설렁탕’이다. 지금도 만하(마나, 소의 지라)를 내놓는다. 가장 오래된 설렁탕의 모습이다.

잼배옥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설렁탕 집이다. 남대문 밖, 지금의 만리재 부근 ‘잠바위’가 있는 곳에서 문을 열었다. 오래된 설렁탕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문화옥

60년을 넘긴 설렁탕 노포다. 한국전쟁 무렵 생긴 가게. 설렁탕과 더불어 꼬리곰탕이 아주 좋다. 소금도 가려서 신안 염전의 천일염을 사용하고 있다.

홍익진국설렁탕

설렁탕 노포 중에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집이다. 지금도 밥+국물을 한 그릇에 내놓고 있다. 토렴방식이다. 소박하고 은근한 설렁탕. 업력에 비해서 덜 알려진 집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