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심, 사람 모이는 서울에서 시작, 발전…소 부산물 이용한 서민음식
‘이문옥’, 설렁탕의 시작인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 음식점은 ‘이문옥=’이다. 굳이 ‘이문옥(里門屋)’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의 역사, 당시의 음식점들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옥(屋)’은 일본 발음으로 ‘야(YA)’라고 읽는다. 가게, 상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의 전신인 ‘이문옥’이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창업,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설렁탕 전문점, 설렁탕 프랜차이즈 등은 우리 시대의 것이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점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내놓는데 설렁탕이 메뉴의 중심이라는 정도였다. 개업 초기 설렁탕도 팔았던 ‘이문옥’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마을 입구를 알리는 ‘이문(里門)’이 있는 곳의 가게 이름이었다. 여러 가지 메뉴를 내놓았다. 그 집의 주요 메뉴가 설렁탕이었다는 정도.
당시의 주요고객은 몇 부류가 있다. 가장 먼저 ‘이문옥’에서 식사를 하는 이들은 이른 새벽일에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한양 도성 주변에 농촌, 산촌 지역이 있다. 그중 하나가 양주군이다. 이 지역에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지고 이른 새벽 도성 안으로 들어온다. 나중에 한양이 경성이 되고 서울로 바뀌면서도 이 사람들은 꾸준히 장작을 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십리에서 채소 재배하는 이들이 여러 가지 채소를 사먹는 것은, 자신들이 재배하지 않는 채소를 먹기 때문”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집중, 특화하기 때문에 다른 나물은 인근의 시장 혹은 농장에서 사먹어야 했던 것이다. 200∼300년 전에 채소 재배는 분화되었고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소비자는 당연히 시장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이다. ‘이문옥’ 주변은 종로통과 가까이 있다. 육의전이 있던 곳이다. 자연스럽게 시장, 놀이터가 형성된다. 시장이 서고 일제강점기에는 극장도 들어선다. 지금도 남아 있는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등이 바로 오래 전부터 이곳이 극장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왜 한양의 설렁탕인가?
음식점은 유동인구가 있어야 생긴다. 밥을 사먹는 ‘매식(買食)’은 집안이 아니라 바깥, 길, 시장 등에서 시작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지방의 관청 등을 중심으로 식당이 생겼다. 산업이 발전하지 않으면 매식은 관청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생긴다. 한때 ‘기사식당’이 인기를 얻었던 이유도 마찬가지. 움직이는, 유동인구는 택시운전기사들이다. 바깥에서 일을 하니 당연히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이들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한때 기사식당이 인기를 끈 이유다.
조선시대 내내 음식은 역원, 주막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음식점의 음식이 아닌 것은 집안의 음식이다. 집안의 음식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음식이다. 제사, 집안 대소사의 음식, 손님맞이 음식이다. 돈을 받고 파는 음식이 아니다.
역원(驛院)은 역과 원이다. 원(院)에서는 잠자고, 식사하고, 말을 재정비하는 등 여행자의 모든 편의가 가능하다. 역은 서류를 전하거나 챙긴다. 말에 대한 간단한 정비, 물을 마시는 정도의 간단한 편의만 가능하다. 조선시대 여행자의 음식은 원(院)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사리원, 조치원, 이태원 등이 바로 조선시대 역원의 흔적이다. 역원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관리가 아닌 일반인들의 이동은 제한적이다.
조선중기를 넘기면서 ‘개인적인 여행’이 늘어난다. 장사를 하는 이들, 과거를 보러 가는 이들이 주요 고객이다. ‘사적인 역원’이 필요하다. 주점(酒店)과 주막(酒幕)이다. 사설 역원이다.
주막은 간이 시설이다. 술 한 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정식 건물이 아니라 천막 정도 두른, ‘막(幕)’을 둘러친 곳이다. 주막은 점차 발전하여 주점형태로 변한다. 봉놋방 정도를 갖춘, 식사, 숙박이 가능한 곳으로 바뀐다. 여전히 밥값, 술값은 받되 잠자리는 무료다.
소머리국밥, 내장탕, 순대, 선지해장국, 설렁탕 등이 가능하다. 저잣거리의 음식, 서민들의 음식이다. 고기가 귀한 시절이다. 정육을 들어내고 남은 고기, 허드레 부위를 버리지 않는다. 귀한 소의 여러 부위를 저잣거리의 서민들이 소비한다.
한양, 경성,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이다. 고기 소비가 가장 흔한 곳이다. 정육 소비량이 늘어나면 부산물, 허드레 부위도 많이 나온다. 고기, 허드레 부위로 만든 음식을 먹을 소비자들도 다른 곳보다 많다. 서울에서 설렁탕, 곰탕이 상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고기 소비가 많은 수도에서 허드레 고기를 소비하는 양도 많았다.
성균관 유생들의 쇠고기
쇠고기는 금육이었다. 도축부터 엄하게 막았다.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는 숙종, 영조 시대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쇠고기는 금육이었다. 도덕군주였던 영조의 금육, 금주는 엄했다. 그 시절에도 영조는 한정적으로 쇠고기 식육을 풀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에게는 매월 일정량의 쇠고기를 허가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쓴 오주 이규경은 1788년에 태어나 1863년에 죽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대략 19세기 중반에 쓴 책이다. 이 책에 “반촌에 사는 반인들이 추두부탕(鰍豆腐湯)을 즐겨먹는다”고 적었다. 추두부탕은 추어탕의 전신쯤으로 여기는 음식이다. 미꾸라지를 손질해야 하고 두부를 이용해 추어숙회를 만든 다음 지져서 탕을 끓인다. 제법 복잡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걸 보면 19세기 중반에는 이들이 사회 세력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반인들이 한양 도성으로 들어오는 소를 매점매석하여 도축, 판매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소를 구해서 도축한 다음, 성균관에 납품한다. 나머지 부산물 및 허드레 부위는 자연스럽게 반인들이 관리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같이 저잣거리에서, 허가를 받은 가게들에서 팔지는 않았지만 주막 등을 통하여 ‘설렁탕 비슷한 음식’의 판매는 있었을 것이다. 1904년 ‘이문옥’은 상업적으로 설렁탕 판매를 했던 숱한 음식점 중 하나다. 참 다행히도 그때의 음식점이 지금까지 남은 것이다.
[설렁탕 맛집 4곳 ]
안일옥
하영호신촌설렁탕
마포양지설렁탕
강릉 가마솥설렁탕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