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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창덕궁 후원… 왕의 고독과 풍류가 담기다

겨울, 창덕궁은 다소곳하다. 눈 덮인 인정전에는 정적이 흐르고, 선왕의 흔적은 서까래 위에 덧씌워져 뿌리 깊은 사연을 만들어낸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의 왕이 사랑한 휴식처였다.

창덕궁을 알현하는 템포는 ‘안단테’다. 속도를 줄이면 임금님의 얘기가 가슴 깊이 내려앉고, 몸을 낮추면 선현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경계가 되는 궁 담벽 위로는 3층집 빌라 발코니가 나란히 흐르고, 세탁소 간판이 고개를 비쭉 내민다. 창덕궁은 이런 풍경이 제법 잘 어울린다. 궁은 위세등등 해야 하며, 크고 강직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창덕궁 안에서 퇴색된다.

창덕궁은 경복궁을 창건한 지 10년만에 태종이 다시 올린 궁이다.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은 혈육의 피로 얼룩진 경복궁에 머무는 걸 원하지 않았다. 창덕궁을 지었고 ‘두개의 궁’체제로 나라를 운영했다.

최고의 절경 뽐내는 부용지

인정전, 선정전 등 내전을 거쳐 후원으로 향하면 궁궐의 뒷동산이 펼쳐진다. 창덕궁이 왕의 사랑을 받은 연유에는 후원이 큰 몫을 했다. 자연과 어우러져 골짜기마다 조성된 정원을 거닐며 임금은 고독을 씹고 풍류를 즐겼다. 창덕궁 후원이 일반에 개방된 것은 2004년 5월의 일이다.

후원에는 왕들의 세월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최고의 절경을 뽐내는 부용지에는 세조, 숙종, 정조의 스토리가 부용정, 영화당, 규장각 등의 건물이 함께 담겼다. 정조가 시 짓기 내기로 신하를 연못 안 섬까지 유배 보낸 얘기며, 왕이 물고기를 낚으면 풍악을 울렸다는 비화들은 부용지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다.

숙종이 즐겨찾던, 불로문 옆 애련지에서 맞는 일화는 정겹다. 숙종은 조선왕 중 고양이를 사랑한 임금으로 ‘금손’이라는 노란 고양이를 키웠다는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에 북한산 호랑이가 출몰했으며 사람을 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권위를 털어낸 아담한 정자들

내전에 선비집을 닮은 낙선재가 있다면 후원에는 연경당이 있어 궁궐 아닌 양반집에 놀러 온 기분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집으로 마굿간, 아궁이, 굴뚝 담 등이 소박하게 담겨 있다. 이밖에 두 겹의 지붕을 올리고 정조의 정치철학을 현판에 기록한 존덕정, 부채 모양의 관람정, 논농사를 살폈던 청의정 등이 후원이 간직한 아담한 정자들이다.

후원에서 내전으로 연결되는 길목의 낙선재는 궁궐 건물로는 이례적으로 단청 없는 건물이다. 헌종은 낙선재를 올리며 선비들의 사랑채처럼 수수하게 지을 것을 주문했다. 검소한 듯 보여도 창살 등에는 섬세함이 묻어난다. 낙선재는 사람이 살던 체취가 있어 더욱 사랑받는 공간이다.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 낙선재였고, 마지막 황세손인 이 구의 장례식 역시 낙선재에서 치러졌다

후원 산책은 자연스럽게 담벽 너머 북촌 나들이로 연결된다. 창덕궁에서 느꼈던 사람 향기는 수더분한 한옥 골목의 북촌에서 풍요롭게 다독여진다.

글ㆍ사진=서 진(여행칼럼니스트) tour0@naver.com

여행메모

▲가는길=3호선 안국역에서 도보로 이동한다. 후원은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가이드투어에 참가하면 창덕궁 이해에 도움이 된다. 궐내에서 음료 외에 음식섭취는 금지된다.

▲둘러볼 곳=현대사옥에서 중앙고로 이어지는 계동 골목은 오래된 목욕탕, 의원, 이발소 등 토박이 주민들의 삶이 카페들과 어우러진 공간이다. 가회동 31번지 일대 골목은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인기 명소다.

▲기타정보=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인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창덕궁의 인정전은 국보이며 돈화문, 금천교, 인정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 부용지 등이 보물로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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