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흔해져 가장 많이 먹어…
“여름철 돼지고기 잘 먹어야 본전”

“한국의 연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51.3㎏이다. 돼지고기(24.4㎏)를 가장 많이 먹고 이어 닭고기(15.4㎏), 쇠고기(11.6㎏) 순이다. OECD 평균과 비교하면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닭고기와 쇠고기는 덜 먹는다.”(농림축산식품부, 2014년 통계) 그동안 닭고기 소비량이 더 늘어났을 가능성은 있다. 여전히 한국인들의 돼지고기 사랑은 별나다. 한국인의 돼지고기 사랑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오래되지 않았다.

돼지갈비도 돼지 생산량이 늘어나고, 도축법이 발달하면서 시작된 음식이다.

돼지고기, 널리 퍼지다

11세. 나이 어린 국왕이다. 달이 밝다. 국왕이지만 할 일이 없다. 증조할머니 정순왕후가 섭정을 한다. 노 대신들도 몇 달씩 섭정을 한다. 깊은 밤, 달구경을 나선다. 궁궐 밖에서 냉면을 가져오기로 했다. ‘냉면 테이크아웃’이다. 냉면을 기다리는데 옆의 누군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뭐냐고 묻자 ‘돼지고기’라고 답한다. 냉면이 도착했다. 순조가 말한다. “그이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냉면은 줄 필요가 없다.”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에 실린 내용이다. 순조는 1800년에 즉위했다. ‘임하필기’의 돼지고기는 대략 60~70년 후의 기록이다. 이유원이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이유원은, “순조가 속이 좁다”고 말한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열한 살 어린아이다. 어린아이 이야기를 두고 속이 좁다고 평할 것은 아니다. 신하가 숨겨둔 것은 돼지고기 수육[熟肉, 숙육]이었을 것이다. 돼지고기를 물에 찌거나 삶은 것이다. 특별한 조리법이 없었으니 귀한 돼지고기는 삶거나 쪄서 먹었다.

정조대왕 시절 ‘사검서’ 중의 한 명이었던 실학자 영재 유득공(1748-1807년)도 ‘서경잡절’에서 “냉면과 돼지고기 값이 오른다”는 문구를 남겼다. 18세기 후반부터 평양에서도 돼지고기가 일상적으로 팔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돼지고기가 비교적 흔해졌지만 조선초기에는 돼지고기가 귀했다. 궁중에서는 ‘전구서’ ‘예빈시(禮賓寺)’ 등에서 돼지를 기르거나 돼지고기를 관리했다.

세종 7년(1425년) 4월, 호조에서 상소를 올린다. “전구서에 암퇘지 508마리가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으니 300마리만 남기고 나머지 200마리는 시세대로 팔아서 민가에서 두루 번식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궁중에서도 돼지를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민간으로 암퇘지를 팔자는 것은 여전히 민간에서는 돼지 다루는 게 서툴렀음을 알 수 있다.

단종 1년(1453년) 4월에는 ‘돼지 사육을 잘하는 탐관오리’의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별좌 이흥덕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헌부에서 처음 정한 벌은 곤장 100대에 3000리 밖 유배, 벼슬길 금지다. 중형이다. 의정부는 ‘곤장 80대, 벌금, 파직하되 벼슬길은 열어준다’는 걸로 강도가 낮아진다. 이유가 재미있다. “이흥덕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양돈을 배웠고 세종대왕이 예빈시에서 일하도록 했다. 돼지 기르는 일에 힘썼고 공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의 돼지 기르는 솜씨가 부족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국가차원에서 중국으로 유학생을 보내서 양돈법을 배웠다.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돼지 사육법을 배워 오고, 시행했다는 이유로 벌을 낮추었다. 돼지 사육법은 중요했다. 10년 쯤 후인, 세조 8년(1462년) 6월에도 돼지 사육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조가 말한다. “우리는 닭, 돼지, 개 기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손님 접대와 제사가 늘 넉넉하지 못하다. 한양 도성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수령이 직접 관리하라. 매년 그 숫자를 보고하고 양돈 성적에 따라 상벌을 적용하라”는 내용이다. 수도는 특별시장이, 지방은 도지사와 각 기관장, 군수, 시장 등이 돼지 사육을 직접 관리하라는 뜻이다. 심지어 양돈성적에 따라 기관장을 상벌 처리하라고 말한다.

세종, 단종, 세조 시대는 조선 초기로 15세기다. 순조, 영재 유득공의 시대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이다. 약 35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이 사이인 1670년 경 발간된 ‘음식디미방’에는 돼지고기 음식이 두어 종류 정도 실려 있다. 다른 음식에 비해서 아주 적은 숫자다. 그마저도 ‘가제육[家猪肉]’ ‘야제육[野猪肉]’이다. ‘가제’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 ‘야제’는 멧돼지다. 기르는 돼지와 멧돼지로 만드는 음식 두어 가지가 모두다. 여전히 돼지고기 음식은 귀했다.

수육은 오랫동안 돼지고기 먹는 방식으로 전해져 왔다. 오늘날에는 삼겹살이 수육의 인기를 넘어섰다.

18세기, 돼지가 비교적 흔해지다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구는 소빙하기(little iced age)를 겪는다. 지구 온도가 1~2도만 낮아도 농산물 등은 심한 타격을 받는다. 유럽의 중세는 소빙하기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다. 기아와 질병이 만연했다. 조선도 마찬가지. 조선은 여기에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남과 북에서 왜와 만주족이 쳐들어왔다. 17세기 초반부터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처를 치유한다. ‘음식디미방’은 임진왜란 후 70년이 지난 시점에 발간된 음식 조리서다. 1636년의 병자호란도 조선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18세기, 숙종(1661~1720년)시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경제가 안정된다. 곡물의 생산량도 늘어난다. 고기를 만지는 이들, 도축을 하는 이들의 이름도 바뀌기 시작한다. 화척(禾尺), 양수척(楊水尺) 등으로 부르다가 숙종 시대에는 대부분 ‘백정(白丁)’으로 부른다. 화척, 양수척은 ‘도적’의 이미지가 강하다. ‘백정’은 일반 백성, 평범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화척, 양수척이 조선사회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 사회와 떨어져서 살았다. 원래 북방의 유목민족들이다. 조선에 진입한 후 자신들끼리 무리지어 살았다. 결혼도 부족들끼리 치렀다. 하는 일도 조선에서는 어색한 도축과 고기 만지는 일이었다. 조선도 이들을 ‘도적’으로 취급했다. 세금도 내지 않았고 병역의 의무도 없었다. 조선에서 살지만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숙종 시대 무렵에는 이들이 조선사회에 편입된다. 조선 사람들과 결혼을 하면서 핏줄이 섞이기 시작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고기가 조금씩 흔해진다. 이들의 역할이 생긴 것이다. 몰래 도축하던 일이 합법적으로 바뀐다. 부르는 이름도 ‘백정’으로 바뀐다.

순조와 영재 유득공의 ‘돼지고기’는 19세기 초반의 이야기다. 숙종, 영조, 정조 시대를 지나면서 고기 생산량도 늘어나고, 도축, 고기 만지는 일도 증가한다. 당연히 백정도 한반도에 흡수된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돼지고기는 한반도에서 조금씩 소비가 늘어난다.

돼지고기, 돼지가 귀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흔히, 전통, 재래, 우리 것을 고집하지만 돼지에 관한 한,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예전 돼지와 우리가 지금의 돼지는 품종이 전혀 다르다. 불과 50~60년 전 시골의 큰 돼지는 ‘100근’이었다. 60kg이면 아주 큰 돼지로 여겼다. 지금은 대부분의 도축 대상 돼지가 120~125kg 정도다. 반세기만에 두 배 이상 커진 것이다. 사육 환경, 먹이, 품종이 모두 달라졌다.

전통적인 재래 품종도 마찬가지다. 불과 50~60년 전의 돼지품종일 때가 많다. 아무리 길어도 100년 전의 품종 정도가 ‘재래’의 이름을 달고 시장에 나온다. 흔히 ‘재래’ ‘토종’으로 생각하는 돼지와는 다르다. 한반도는 돼지가 자라기에 적절치 않았다, 돼지는 습도와 기온이 높은 곳을 좋아한다. 품종개량이 되기 전이다. 건조하고 겨울에는 추운 한반도에서 잘 자라는 돼지는 없었다. 중국에서 사육법을 배웠던 이유다.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

돼지고기는 찌개, 구이, 수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된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수육과 국물 음식으로 소비했을 것이다.

불과 30~40년 전에 쉽게 들었던 이야기다.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표현은 돼지고기가 잘 상하는 고기라는 뜻이다. 냉장, 냉동고가 귀했던 시절이다. ‘수육’은 ‘숙육(熟肉)’이다. 익힌 고기라고 하면 늘 돼지고기였다. 쇠고기 소비는 찌개, 국, 구이로, 돼지고기는 물에 삶거나 찌는 행태였다. 대부분의 돼지고기는 수육의 형태이니 지금도 수육이라고 하면 대부분 돼지고기 수육을 뜻한다.

돼지고기를 이용한 삼겹살 구이 등이 늦게 등장한 이유가 있다. 돼지를 기르는 일, 도축 등이 서툴렀다. 냄새가 난다. 돼지고기를 구이 등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이유다. 양돈과 도축 기술이 발달하고 냉장, 냉동 기술, 유통이 좋아지면서 냄새가 심하지 않은 고기가 등장한다. 구워서도 먹을 수 있다. 1970~80년대 삼겹살이 시작된 이유다.

흔히 일본으로 수출하고 남은 부위를 삼겹살 구이로 활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는 않다. 조선시대에도 돼지고기를 먹었다. 조선 말기에는 민간에서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흔해졌다. 여전히 수육으로만 먹었다. 삼겹살도 다른 방법으로 소비했을 것이다. 삼겹살 구이가 유행하기 전에도 ‘삼매육(三枚肉)’이라는 이름으로 삼겹살을 소비했다. 단지 지금처럼 굽지는 않았다. 유통, 냉장, 냉동의 문제 혹은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 돼지국밥 맛집 4곳

1.

서울에서는 돼지국밥 전문점도 흔하지 않다. 돼지고기로 만든 국밥, 탕을 먹지 않던 서울에 ‘돼지곰탕’을 알린 공로가 있다. 국물이 맑고 깊다.

옥동식/서울 합정동

2.

돼지국밥 전문점으로 노포다. 맑은 돼지국밥이 일품이다. 돼지국밥 맛을 해치기 때문에 부추 겉절이도 내놓지 않는다. 머릿고기와 ‘암뽕’ 위주의 수육도 아주 좋다.

성화식당/대구 경북대 앞

3.

부산의 노포 돼지국밥 전문점이다. 오래 전부터 내놓았던 돼지국밥, 돼지고기 수육 등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잡냄새가 없으면서 돼지고기 특유의 맛을 살렸다.

할매식당/부산 범일동

4.

신생 돼지국밥 전문점이다. 메뉴는 돼지국밥과 수육이 전부. 부부가 주방과 홀을 관리한다. 분위기도 깔끔하고 음식도 정갈하다. 수육과 국밥 모두 잡냄새 없이 맑다.

그레이스국밥/서울 공덕동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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