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 와인

한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놀랍게도 200여종이 넘는다. 그런데 이름을 기억해두고 또 찾게 되는 와인이 있었나? 비로소 기억해둘만한 이름이 하나 생겼다. 대부도에서 난 화이트 와인 ‘청수’다.

넓은 개펄이 펼쳐진 서해안의 대부도는 와인이 나는 섬이다. 울창한 나무와 숲,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풍경 속에 청포도가 무르익는데 딱 이맘 때인 9월 초에 수확해 와인을 빚는다. 와인의 이름은 품종과 같은 이름인 ‘청수’.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맑고 깨끗한 물을 바라보다가 향을 맡는다고 상상해보라. 배꽃, 살구꽃, 과일 향이 달콤한데 호로록 한 모금 적셔보면 바닷바람을 타고 포도에 스며든 미네랄리티가 느껴진다. 바닷물에 젖어 있는 돌이나 간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해산물 본래의 짭짤한 풍미, 도톰한 성게알을 입 안에 넣었을 때의 바다 향 같은 것 말이다. 흔히 미네랄리티라고 부르는, 입에 침이 자꾸 고이게 하는 짭쪼롬한 그 느낌을 자아내는 화이트 와인이 김, 굴, 미역으로 대표되던 섬 대부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대부도는 서울에서 60km 정도 떨어져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에 있지만 경기도의 하와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알고 보면 포도 재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으로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일교차가 심하고 뜨거운 열기와 습기를 머금은 기후가 당도 높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대부도 전체 농가의 90%가 포도 농사를 짓고 바다의 향을 머금은 와인을 빚는다.

청수포도

대부도의 ‘청수’ 와인이 ‘2019아시아와인트로피’에 출품해 골드상을 받고 국내의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국내 와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품종에 있다고들 말한다. 청수 품종은 1993년 농촌 진흥청에서 개발한 청포도 품종이다. 씨가 없고 알이 많은데다 다른 품종에 비해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특성이 있어 생과로 먹기 위해 보급됐다. 하지만 익을수록 떨어져 나가는 알이 많아 수확이 어렵자 외면 받았고 거봉이나 새콤달콤한 캠벨얼리에 밀렸다. 1954년 캠벨얼리 품종 포도나무 50그루를 심은 것을 시작으로 포도 재배를 시작했던 대부도에서도 청수는 관심 밖의 품종이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대부도에서는 30여개 포도 농가가 함께 그린영농조합을 만들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부(한자) 큰 언덕을 뜻하는 지역 명을 따서 그랑꼬또라는 이름을 붙였다. 3대째 포도 농사를 짓고 국내의 와이너리를 돌며 기술을 익힌 김지원 대표가 양조를 도맡았다. 그러다 2014년 청수의 쓰임을 고민하던 농촌 진흥청에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볼 것을 권했던 것이다. 독일의 유명 포도 품종인 리슬링 와인에 들어가는 효모를 사용해 화이트 와인을 만들었고 결과는 국내 와인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사실 국내에서 재배, 수확하고 빚은 와인을 우연히 맛본 적이 있다면 대개 발견의 기쁨보다는 익숙한 실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와인은 과일에 설탕을 가득 넣고 재운 담금주가 아닌데 국내에서 만들었다는 와인의 달고 시금털털한 맛이 황당했던 기억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청수’의 매력적인 맛은 잔을 들어 색을 감상하고 향을 맡고 입안에 굴려보는 등 열심히 공부해온 와인 문법을 따라 마셔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청수’를 개발한 김지원 대표는 기성 와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즐겨볼 것을 권한다. 유럽의 식탁에서는 요리에서 신맛이 드물기 때문에 식사 중간 중간 입맛을 돋우는 산미를 더해주고 물을 대신하는 음료로 와인을 페어링 해온 반면, 한식 문화에서는 김치나 장아찌처럼 신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 풍성한 데다 목을 축일 필요 없이 국까지 차려내니 와인의 역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포도는 그 자체로 즐겨오던 과일이니 포도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 차원에서 ‘청수’를 바라본다. 향을 한껏 내뿜는 맑은 자태는 알알이 반짝이는 청포도의 정수만 담아낸 달콤한 과즙 같기도 하다. 리슬링 와인을 페어링할 때처럼 짜장면, 매콤한 사천 탕수육이나 부드럽고 신선한 팔보채 한 젓가락에 함께 마시면 더 술술 들어가는 그런 맛.

전통주갤러리

‘청수’는 1년에 3000~4000병만 생산되는데다 인기가 워낙 좋아 대부도의 와이너리에 직접 방문해야만, 그것도 1인 2병까지만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6만원대.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전통주 갤러리에서 구입하는 경로인데 최근 인사동에서 강남으로 자리를 옮긴 전통주 갤러리는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전통주 홍보 공간이다. 우리 술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상설 전시와 매달 테마에 맞는 술 4~5가지를 맛볼 수 있는 시음회가 열린다. 무엇보다 전통주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으로 양조장, 판매점, 외식업장 등을 대상으로 전통주 구매처, 교육 기관 안내를 비롯해 음식과 전통주의 페어링 컨설팅도 진행한다. 소매로 ‘청수’를 구입하기 위해 방문해보니 2000여 종이 넘는다는 전통주 중에서 와인 종류도 제법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국내에서 생산한 와인 종류 만해도 200여종이 넘을 거예요. 찾으시는 ‘청수’ 와인이 특히 인기가 좋은데 내추럴 와인의 인기 비결이 자연스러운 산미에 있는 것처럼 향은 달콤하지만 입 안에서는 기분 좋은 산미가 짙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많이 찾으시는 것 같아요.” 주세법 상으로 전통주에 속하기 때문에 국내 와인은 온라인 통신 판매도 가능하다. 화이트 와인이니 전통 양조 방식을 따르지는 않지만 전통주로 취급되는 것은 우리 농부가 우리 농산물로 직접 만드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신대륙 와인이 만들어진 테루아를 아무리 상상해도 직접 가보지 않으면 그 풍경을 생생하게 떠올리기 어려운 데 비해 국내에서 빚은 와인은 마음만 먹으면 그 경관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는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국내의 실력 있는 양조장을 선정해 와인 품질 향상은 물론 지역 관광 자원으로 성장하게끔 지원한다. 여기에 선정되면 2년간 연 60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지원 받을 수 있고 환경개선과 품질관리, 체험 프로그램 개선, 홍보 등에 관련한 컨설팅 등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선정된 곳은 대부도의 그린영농조합을 포함해 전국에 총 38곳으로 올해는 네 곳이 더 추가 됐다. 경기도 평택에서 ‘천비향’을 생산하는 ‘좋은술’, 강원도 횡성에서 ‘1000억 유산균 막걸리’를 만드는 국순당, 충북 영동에서 ‘여포의 꿈 와인’을 생산하는 ‘여포와인농장’, ‘샤토 미소 와인’을 생산하는 ‘도란원’ 등이다. 술이란 그 곡식이 심겨 무르익는 환경과 날씨, 풍경까지도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터넷에 찾아가는 양조장을 검색해볼 것.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된 양조장이 만든 술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풍미를 느낄 수 있어 전통주나 국내 생산 와인 등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믿음직스러운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체험과 관광이 결합된 지역 명소로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니만큼 직접 방문을 계획해봐도 볼거리가 풍성하겠다. 가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알알이 맺힌 청포도가 무르익는 지금, 와인 축제를 권한다.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충북 영동에서는 영동 와인 축제가 열린다. 소백산맥 추풍령 자락에 있는 영동은 짙은 향과 선명한 색, 높은 당도를 자랑하는 포도 산지다. 영동에 자리한 40여개의 와이너리 농가에서 만든 와인을 살펴볼 수 있고 와인 시음과 마리아주 찾기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고. 영동에 가면 ‘청수’만큼이나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도 있다.

‘여포의 꿈’이라는 와인이다. 영동의 환경에 알맞은 품종을 탐색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포도 품종 중 하나인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 품종을 발견한 것인데 산뜻한 머스캣 향을 지녔다. 포도로 만들었지만 살구와 복숭아의 과육처럼 황금빛 색상을 띠는데 맛 역시 과일의 신선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감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이 방한 했을 당시의 만찬주로 미국 나파밸리의 화이트 와인과 함께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 세상의 포도를 다 모아 놓은 듯 넓게 펼쳐진 포도 밭을 둘러보고, 생산자의 철학을 만나고, 양조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은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멀리 떠날 수 없는 미식가라면 전통주를 소개하는 국내 호텔을 방문해봐도 좋겠다.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에서 ‘오미나라’의 ‘오미 로제 스파클링’을 식전주로, 그랜드하얏트서울의 철판구이 전문점 ‘테판’에서는 ‘그랑꼬또’의 ‘청수’를 만날 수 있다. 역삼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에빗’에서는 한국의 산과 들에서 나는 갖은 식재료를 찾아 다니는 채집 요리사 조셉 리저우드 셰프의 요리와 전통주 페어링 코스를 경험할 수 있다. 파인 다이닝 요리에 곁들이기 좋은 드라이한 전통주를 찾아 다니다 발견한 보석 같은 술들이라고. 누군가는 국내 생산 와인에 대하여 너무 달고 복합적인 매력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이제 와인을 마시고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눈 앞의 식탁 풍경 너머를 바라본다. 포도가 자라는 곳의 하늘과 땅이 바람과 물이 만들어내는 맛은 우리가 맞이하는 계절과 궤를 같이하고 있지 않은가. 유럽 어느 시골 풍경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부도 테루아를, 영동의 테루아를 담아낸 와인은 계절마다 다른 술을 즐겼다는 선조들의 풍류를 따르기에도 그만이다.

김주혜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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