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귀족 문화서 이어져온 ‘애프터눈 티’... 샌드위치^잼^디저트와 즐기는 ‘가을 낭만’

티 트레이 너머 시원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인터컨티넨탈의 애프터눈 티 세트.

커피 애호가들로 넘쳐나는 도시의 현대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17세기 북유럽을 뒤흔들었던 음료는 다름 아닌 차(茶)였다. 네덜란드, 포르투갈이 개척한 무역 항로를 따라 아시아의 신비로운 상품들이 북유럽으로 먼저 소개되었는데 후추, 비단, 도자기 등을 싣고 온 배 안에는 동양의 차도 있었다. 찻잎을 우려내었을 때의 향과 빛깔, 신비로운 느낌으로 퍼지는 찻잎의 모양새는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 같다. 먼 길을 떠나 구해오는 것이니만큼 차는 귀한 것이라 상당히 비쌌고 주로 귀족들이 즐기는 사치품으로 점점 인기를 더해갔다고. 이후 더 많은 양을 들여오게 되자 일반인들에게까지 전해졌는데 이때의 영향으로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차를 즐기는 문화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의 애프터눈 티타임이다.

샌드위치 백작이 간단히 끼니를 때우려는 아이디어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듯이 애프터눈 티를 즐기게 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1841년, 베드포드 가문 7대손의 공작부인이었던 안나 마리아가 그 주인공으로 그녀는 기운이 떨어지는 오후 4~5시 무렵이 되면 하녀에게 다기 세트와 빵, 버터를 쟁반에 담아오게 해 티타임을 가졌다. 당시 영국인들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을 챙겨 먹었기 때문에 베드포드 공작부인은 늦은 오후에 찾아오는 공복감을 달래기 위한 간식과 차를 즐겼던 것이다. 또 이러한 티타임에 이따금 친구들을 초대했고 이내 오후에 함께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으며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영국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며 사교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작은 안쪽 방이나 침실 옆 휴게 공간에서 가졌던 티타임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들어서면서 티가운을 입은 채 응접실,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이후 20세기 초 즈음에는 따뜻하게 조리된 음식이 준비되고 하인들이 둘러 서서 차를 따르고 음악 연주가 함께하는 보다 본격적인 규모의 행사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이런 문화는 중산층이 모방해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고, 애프터눈 티 외에도 오후에 마시는 차를 가리키는 말도 여럿 생겼다. 간단히 허기를 달랜다는 리틀 티(Little Teas), 퇴근 후에야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노동자들이 고기 요리나 감자 튀김에 차를 곁들이는 하이 티(High tea)와 상반된다는 점에서 로 티(Low Teas),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마시는 풍경을 담아 핸디드 티(Handed Teas) 등으로 불렸다.

기분 따라 샴페인과 칵테일, 와인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안다즈 호텔의 애프터눈 티 세트.

애프터눈 티는 귀족 문화에서 시작해 오래도록 이어져온 관습이니만큼 몇 가지의 정해진 방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3단 트레이에 담겨 나오는 티푸드다. 1단은 세이버리&티 샌드위치, 2단은 스콘과 잼, 클로티드 크림, 3단은 달콤한 디저트가 놓인다. 전통적인 애프터눈 티 세트라면 오이 샌드위치도 빠지지 않는다. 버터를 얇게 바른 식빵에 오이를 얇게 썰어 넣는 샌드위치로 배불리 먹기보다는 가볍게 허기를 달래기 좋아서 등장한 요리다.

또 스콘은 베드포드 공작부인의 쟁반에도 담겨 있었을 정도로 애프터눈 티 세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단단하면서도 부수어 먹으면 부드러운 식감을 가진 스콘은 쌉싸래한 홍차보다 담백한 밀크티에 곁들이면 맛이 조화롭고, 과일잼이나 클로티드 크림을 얹어 먹을 때 비로소 그 맛이 완성된다고 믿는 이가 많다. 테이블 세팅을 할 때는 자수 장식이 있는 흰 테이블보 위에 티포트, 찻잔, 밀크저그, 슈가볼, 티 푸드 접시 등을 가지런히 두고 시각적인 즐거움도 선사한다.

애프터눈 티는 귀족 계층이 따로 없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호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의 일과를 떠올려보라.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본격적인 오후 업무를 보느라 분주했던 것이 보통일 텐데 이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삶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래도 이따금은 커피의 각성 효과보다 차의 이완 효과가 업무 효율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산업 혁명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티브레이크(Tea break)를 갖기도 했다니 말이다. 쉬지 않고 일했던 산업 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따뜻한 차 한잔으로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녹였다. 지금도 영국 사람들이 커피보다 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다. 차의 향과 맛이 보다 부드럽게 실려오는 가을에는 친구들을 만나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져보면 좋겠다. 때마침 근사한 애프터눈 티타임을 준비한 호텔이 여럿이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의 ‘갤러리’에서는 11월 30일까지 ‘가을 애프터눈 티세트’를 선보인다. 사과, 배, 밤 등의 가을 햇과일로 사과 트라이플, 몽블랑, 밤 마카롱 등의 디저트를 만들고, 스콘과 사과잼, 배콤포트, 클로티드 크림과 함께 3단 트레이에 올린다. 그 외에 뷔페 스테이션도 추가로 이용할 수 있는데 배 타르트, 갓 구운 밤 호떡, 밤 머랭 파이, 사과 타르트같이 먹음직스러운 계절 과일 디저트가 기다린다. 송로버섯 달걀 샌드위치, 새우 만두, 채소 크레뒤테 같이 정성스럽게 만든 핑거푸드도 그랜드 하얏트에서의 애프터눈 티를 특별하게 만든다. 매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는 30층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1년 내내 애프터눈 티세트를 즐길 수 있다.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망고&베리, 트로피컬 테마로 진행했는데 지금부터 11월 30일까지 선보이는 테마는 밤, 호두, 단호박, 무화과 등의 제철 재료를 사용한 ‘골든 애프터눈 티 세트’다. 루카 카리노 셰프와 김창배 셰 프가 함께 신선한 이탈리안 조리법과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만든 티푸드는 송이버섯 스콘, 가을 연시 가스파초, 무화과 와인 마카롱 등의 10여 가지 디저트와 파르마 햄을 올린 사바이옹 팬케이크, 치킨 미트볼 튀김, 바나나 브레드롤, 단호박 미니 파스타 등의 세이보리로 풍성하게 준비했다. 티 소믈리에가 블렌딩한 차나 티 브랜드 타바론의 카모마일, 얼그레이, 루이보스 등의 차 6종 중에 한 잔을 선택하면 되겠다. 훌륭한 티푸드에 커피를 마시고 싶을 수도 있으니 일리 원두를 이용한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등의 6가지 커피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 화려한 3단 트레이 너머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도 특별한 시간을 약속할 것이다. 매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마치 20세기 초의 애프터눈 티타임이 그러했듯이 정원에 있는 듯한 자연 채광과 라이브 피아노 연주가 함께하는 티타임을 즐기고 싶다면 JW 메리어트 서울로 향해볼 것. 8층의 ‘더 라운지’에서 ‘골드 글램 애프터눈 티세트’를 11월 30일까지 선보인다. 페이스트리 셰프들이 계절감을 담아 완성한 창의적인 디저트가 2인 기준 12종류나 준비된다. 단호박 커스터드 크림으로 가득 채운 슈에 망고와 단호박 식혜 튜브를 꽃은 쿠키슈, 단호박 머핀 위에 버터크림으로 만든 해바라기 꽃을 장식한 케이크, 바삭한 샤브레 쿠키 위에 부드러운 단호박 크림치즈 무스를 올린 단호박 크림치즈무스, 커스터드, 치즈, 체스트넛 등의 3가지 맛이 풍성하게 담긴 체스트넛 에끌레어, 식감이 살아있는 고소한 밤 피낭시에 등이다.

그 외 세이보리 메뉴 7가지도 준비되는데 시금치 프리타타, 레몬 마요네즈 소스로 버무린 랍스터 볼오방, 쉬림프 타트렛, 허브 크림치즈 슈, 크랩롤, 치킨 소시지 크로켓, 비프 슬라이더 미니버거 등이다. 미국의 유기농 수제 티 브랜드 리쉬티 9종, 국내 명차 브랜드 쌍계명차 6종, 미국 트리니다드 커피 본사에서 JW 메리어트 서울만의 맛으로 블렌딩한 커피 등을 곁들이면 보다 조화로운 맛이 완성되겠다. 음료는 1735년 피렌체에서 시작된 포슬린 브랜드 리차드 지노리의 아름다운 블루 티팟 세트에 담겨 나와 호사스럽다. 매일 오후 2시30분부터 5시30분까지.

최근 문을 연 압구정의 안다즈 호텔은 2층의 ‘조각보’ 롱하우스에서 ‘레이지 애프터눈 세트’를 선보인다. 고급 샴페인과 초콜릿, 페이스트리 등을 즐길 수 있는 샴페인&초콜릿 섹션, 철판 요리와 스낵, 와인과 전통주를 준비한 바이츠&와인 섹션, 한국의 재료들로 풀어낸 감각적인 칵테일 바 등의 3가지 공간으로 구성된 ‘조각보’의 시그니처 요리들이 준비되는 것이 특징. 초콜릿, 계절과일, 디저트 등의 티푸드 트레이에 루이로드레 샴페인부터 와인, 수제맥주, 칵테일 등 7종 주류 중 선택할 수 있고 차와 커피는 무제한으로 제공한다.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애프터눈 티타임을 즐긴다고 해서 정장을 챙겨 입을 것까지는 없지만 차를 통해 여유와 즐거움을 되찾는 시간이니만큼 반듯한 몸가짐과 세련된 대화로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정성을 들여 보자. 찻잔의 옆면에 티스푼을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것, 찻잔에 티스푼을 담가두지 않고 잔 받침 위에 찻잔 손잡이와 나란히 두는 것, 와인을 마실 때처럼 찻잔을 돌려 차가 소용돌이 치게 하지 않는 것, 티스푼으로 차를 홀짝이며 떠먹거나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시지 않는 것, 찻주전자에서 컵으로 티를 따를 때 찻물이 테이블에 튀거나 넘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은 애프터눈 티타임을 보다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배려들이다. 날이 너무 추워지기 전 소중한 사람들과 모여 차를 마셔보자. 쏜살같이 흘러가던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가는 것도 같다.

글^사진=김주혜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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