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 억새.

주변의 산하는 온통 홍조 빛인데 명성산 홀로 은빛을 뿜어대고 있다. 포천 명성산은 가을이면 산 등성이를 억새가 뒤덮는다. 봄, 여름에 한적했던 산자락에는 가을이면 흰 파도가 울렁거린다. 포천 명성산에 얽힌 사연은 내딛는 발걸음마다 구구절절 이어진다. 명성산은 예전에는 ‘울음산’으로 불렸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이곳에서 설움을 토해냈다고도 하고, 궁예가 왕건에 쫓겨 도망치다 이곳에서 울었다는 사연도 전해 내려온다.

한탄강.

궁예의 사연 서린 ‘울음산’

한때 울창한 숲이었던 명성산은 한국전쟁 때문에 민머리가 됐다. 정선 민둥산이 겨울이면 산나물을 얻기 위해 불을 놓은 뒤 억새로 유명해졌듯, 명성산 역시 포화가 쏟아진 벌거벗은 상처 위에 억새를 피워냈다. 그 폐허의 땅에 몸을 맞대고 핀 억새들은 가을 봉우리를 하얗게 은빛으로 물들이며 또 다른 숲을 이룬다. 명성산 억새군락지로 오르는 가장 평이한 코스는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오르는 길이다. 메마른 계곡길이지만 산정호수와 산을 에돌아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가족 산행에 좋다. 등산객들이 읊조리는 노래를 벗삼아 산행 1시간 30분이면 어느새 억새 숲에 다다른다.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삼각봉 동쪽 구릉은 온통 억새 천지다. 사람 얼굴을 간지럽히는 억새 초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명성산 억새구릉은 포근하면서도 아늑하다. 펑퍼짐한 능선이 듬직한 가슴같은 느낌이다. 억새숲을 거니는 등산객들은 백발속 가르마를 걷는 듯하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억새.

시간따라 변신하는 억새길

궁예의 사연을 전하듯 억새밭 가운데에 궁예가 마셨다는 궁예약수터가 있고, 명성산 정상과 산정호수로 향하는 갈림길에는 억새군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에 서면 멀리 한탄강까지 눈앞에 들어온다. 억새군락에서 내친김에 정상(923m)까지 오를 수도 있는데 이곳에서 자인사를 거쳐 하산하는 길은 가파르고 돌계단으로 돼 있으나 산정호수를 조망하는 재미가 있다. 명성산 산행은 코스뿐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재미가 있다. 억새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데 해를 등지고 치켜보는 억새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다. 정상에서 해를 마주하는 억새는 은빛으로 부서진다. 석양의 억새는 황금빛으로 물들며 가을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억새를 테마로 한 축제는 10월 27일 막을 내렸지만 오히려 억새감상은 본격적으로 머리를 풀어헤치는 11월 초순까지가 호젓한 적기다. 올해는 여름이 길어 억새꽃 피는 시기 역시 넉넉해졌다. 명성산 하산길에는 둘러볼 곳이 여럿 있다. 산정호수 옆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은 12개 테마정원에 5000여종의 식물을 갖춘 경기도 최북단의 식물원이다. 가을이면 예쁘게 가꿔진 포천구절초와 들국화 구경 외에도 습지원 나무데크를 거닐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명성산과 이어지는 산정호수와 백운계곡 역시 고즈넉한 가을 산책을 돕는다. 글^사진=서 진(여행칼럼니스트)

<여행메모>

▲ 가는 길=47번 국도를 이용해 베어스타운을 지나 포천 이동방면으로 향한다. 산정호수 매표소를 거쳐 직진하면 산정호수, 명성산이고 좌회전하면 평강식물원 가는 길이다. 포천 운천터미널에서 환승하는 버스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 ▲ 음식^숙소=포천 이동면은 갈비 테마 거리로도 10여개의 이동갈비집이 늘어서 있다. 베어스타운 초입에는 김치말이국수집이 유명하다. 숙소를 갖춘 한화리조트 온천이나 신북온천에서 산행의 피로를 풀기에 좋다. ▲ 기타 정보=명성산 산행은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등룡폭포-비선폭포 코스가 3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비선폭포-등룡폭포-억새군락을 거친뒤 자인사로 내려오는 코스 역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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