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의 철책 녹이는 남아의 열기 영하20도 칼바람을 ?뎔?최전방을 지키는 신세대 장병들

[르포] "중부전선 이상없다!"
삭풍의 철책 녹이는 남아의 열기
영하20도 칼바람을 ?뎔?최전방을 지키는 신세대 장병들


동짓날 밤 10시. 철책 너머 아스라이 들리는 대남, 대북방송 소리가 칠흑 같은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온 몸을 짓이기는 매서운 칼바람은 중부전선 최북단, 적 GP를 코앞에 둔 남방한계선에 팽팽한 긴장감마저 돌게 한다.

그나마 쏟아질 듯한 머리 위의 별들과 꾸불꾸불하게 늘어선 철책경계등 불빛이 위안이다. 육군 열쇠 부대가 중부 전선 최전방 철책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한치의 빈틈도 하락치 않는다

풀린 날씨라지만 턱은 쉴 새 없이 덜덜거린다. 이 정도의 추위로 웬 호들갑이냐는 듯, 뒤돌아보는 철책 순찰자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하다. 알고 보니, 스키파카, 야전상의, 방상내피, 전투복, 방한조끼, 내복, 속옷까지… 상의만도 일곱 겹을 입은 덕분이다. 전해오는 말마따나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껴입은 근무자들이지만, 둔해 보이지는 않는다.

인근 소초와의 경계지점까지 순찰을 마친 근무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 휴식이라 해서 막사 내부로 드는 건 아니다. 다른 경계 초소들처럼 철책과 나란히 인접한 대기 막사라는 간이 휴게실에서다. 영하 17도의 기온 에 쉬지않고 떨어댄 턱도 쉬게 할 겸 동행했던 순찰자들을 따라 대기 막사로 들었다. 고가 초소의 텅빈 아래 부분을 개조해 만든 3평 남짓한 공간이다.

연탄 두 장으로 데워진 조그만 막사, 보기보다 훈훈하다. 라면과 담배를 넣어 둔 개인 선반이 눈에 가장 먼저 띤다. 근무 있는 병사들이 미리 갖다 놓은 것이다.

길디 긴 야간 경계근무 시간동안, 추위와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꼬르륵거리는 자신의 배를 다스리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함께 엄습한 그리움을 담배 한 개피로 달래는 것 역시 경계근무만큼이나 중요한 일일 터.

그 옆엔 전기냄비를 비롯 간단하게 라면을 조리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갖춰져 있고, 또 다른 쪽엔 국방일보와 나란히 사제 스포츠 신문, 책, 장기판, 그리고 KT카드 전화기까지 차려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대기막사를 들리는 이들을 무료하게 방치해 놓지는 않을 것 같다.

분대별로 마련된 노트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는다는 철통 경계 근무와, ‘삽이 숟가락이 될 즈음 전역’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의 고된 작업, 쉽없이 반복되는 교육훈련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 부족했던 소대원들의 잡담이 오간다. “정병장! 나 요새 네가 너무 맘에 드는데 어찌까~잉…ㅋㅋ (모일병)” 대략 이런 식이다.

생활공간으로 거듭난 내무반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이 유일한 위안이 됐던 시절. 그 땐이를 드러내 보이기만 해도 군화발에 ‘조인트’를 까이고, 이유없이 구타를 당해도 그 모든 신산을 속으로 가셔내야 했다. ‘각’잡고 앉은 이등병을 베개삼아 TV앞에 널브러져 누운 고참병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짬밥’ 위에 그 어떤 것도 군림할 수 없었던 군대가 이렇게 변한 것이다.

자정을 넘기고 후반야 근무자들과의 근무 교대시간이 다가오면 이들은 설렌다. 후끈후끈한 막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군의 병영생활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4억원 남짓한 공사비가 들어간 최신식 막사다.

덕분에 기존 병사 한 명당 내무공간이 0.7평에서 2평으로 늘어 ‘수용공간’에서 ‘생활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개선 사업은 최전방 철책부대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 시행될 전 군의 대대급 막사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신형 막사는 한 지붕 아래에 내무실은 물론, 화장실과 욕실, 세탁실에 휴게실 등 모든 시설을 품고 있는 ‘올인원’형 막사다. 이제, 한밤 중에 볼일을 보기 위해 옷을 다 주워 입고 어둠 속을 질주해야 했던, 그리고 웬만한 ‘짬밥’이 아니고선 옷에 밴 악취를 중화 시킨 후에야 비로소 내무에 들 수 있었던 ‘화장실의 추억’도 이젠 아련한 옛 얘기가 돼버렸다.

대신 일류 호텔이 부럽지 않은 아늑한 화장실이 들어 앉았다. 목을 길게 내빼고 벽에 기대선 샤워기와 널찍하게 걸린 샤워장의 벽거울도 일품이다. 휴가자들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대중 목욕탕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여기 병사들은 더 이상 대중 목욕탕에다 피 같은 휴가비를 떼줄 것 같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분대 단위의 내무실. 장차 ‘칼잠’이란 말을 생소하게 만들어 버릴 침대가 위치해 있다. 내무실 양쪽으로 각각 5개, 모두 10개. 일반 싱글 침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크기와 모양의 개인용 침대다. 무르지 않아 침대가 불편한 병永涌“鍍?부담 없어보인다.

침대와 침대사이에는 ‘옷장’이라고 불리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은 개인 관물대, 내무실 중앙의 8인용 회의 탁자와 의자, 위성에서 수신 받은 신호를 현란한 댄스와 노래로 바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텔레비전. ‘옷장’에 걸린 관등성명과 전투복만 없다면, ‘군 내무실’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아늑하고 포근하다.

자정을 훨씬 넘긴 야심한 시간. 휴게실에서는 선후임병들간에 한바탕 싸움이 났다. 후임병의 ‘테란’족이 벌쳐와 시즈탱크를 앞세워, 고참의 ‘프로토스’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훨훨 날아다니는 최신형 PC는 아니지만, 게임 진행에 막힘은 없다. 이들의 열기 때문인지, 실내 온도계는 20도를 가리키고 있다.

이 난리 법석 통에도 한쪽 구석에선 전화기를 붙들고 시를 읊는 이들이 있으니, 모두 애인을 남겨 놓고 입대한 병사들. 이 정도의 열성이라면 ‘Out of sight, out of mind’의 법칙이 깨질법도 하다.

"우리는 나라로부터 선택받은자" 자부심으로 생활

“호텔 같은 내무실에서 생활하게 된 뒤로 이제 웬만한 스트레스는 쌓이지 않게 됐습니다. 코를 골거나 몸부림이 심한 병사들의 내무생활 장애, 다닥다닥 붙어 자면서 생긴 성추행 문제 등 병영사고도 확실히 줄어 병들의 사기진작과 함께 경계임무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됐다”고 연대장 이성선 대령은 말한다.

“소대급 막사에 4~5억을 들인 것인데, 엄청난 일이죠. 지금 나라 경제도 어렵다는데, 그 와중에 혈세를 이렇게 모아 배려해 주시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에 대한 감사도 빼놓지 않는다.

철책 부대를 시작으로 내무실 개선 작업이 한창이지만, 여전히 더 많은 장병들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60~70년대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신형 막사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사기에 이상징후가 포착될 법도 하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 병사의 얘기가 가관이다.

“겨울이 길면 길수록, 추우면 추울수록 그 뒤에 찾아오는 봄이 더욱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법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지금 고생은 훗날 더욱 더 큰 보상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찬 모습이다. 그리고 부럽지 않기야 하겠느냐만, 그들의 손으로 직접 보수해가면서 정 붙여 여태 잘 살던 곳인데, 전혀 그럴 것 없다는 것이다.

어둠을 이불 삼아 세상 모든 것들이 잠든 시간. 동이 틀려면 아직 멀었다.초병의 옷깃을 스치는 차디찬 칼바람은 문득문득 아려오는 외로움의 칼날보다 차라리 나을런지 모른다. 그들은 미동도 않은 채 눈빛만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최전방에서 근무를 서면서 우리는 나라로부터 선택 받은 자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경계근무에 임하고 있다”는 초병의 말 한 마디에 팽팽했던 긴장은 느슨해지고 마음 한 구석은 이내 든든해진다.

글 정민승 인턴기자

사진 임재범기자


입력시간 : 2004-01-02 16:49


글 정민승 인턴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