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추적] 뼈 속까지 파고는 도박 중독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한번 도박에 중독된 이들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삶을 끝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지난 2일 30대 벤처기업 사장이 카지노에서 2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탕진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 강원도 정선 카지노와 필리핀 등지에서 전해지는 도박 중독의 심각성은 위험 수위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해외로 원정도박을 떠나는 사람들은 사업가는 유학생, 심지어 스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 현지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공금을 탕진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이 즐기는 카지노 도박에는 포커, 블랙잭, 빙고, 룰렛, 크랩스, 바카렛, 슬롯머신 등이 있는데 이중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은 단연 포커와 바카렛이다. 이 두 종류의 게임이 가장 중독성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에 위치한 유명 사찰에서 불경을 공부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유학길에 오른 H스님. 그가 태국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아시아 유일의 가톨릭 국가 필리핀. 여기서 그는 그만 불심을 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불심을 버린 이유는 가톨릭 때문이 아니라 바로 카지노의 바카렛 때문.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인들과 심심풀이로 바카렛을 한 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이후 게임에 흥미를 느낀 스님은 수행은 뒤로 미룬 채 복장을 갈아 입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명 호텔 카지노에서 바카렛을 즐겼다. 그 결과 유학자금으로 사찰에서 받아온 돈을 모두 날리고 그것도 모자라 매월 보내주는 돈까지 도박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런 행각이 국내로 전해지자 그는 아예 스님의 직분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도박에 탐닉해 들어갔다. 하루라도 도박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그는 카지노 갈 자금의 여의치 않으면 비교적 판돈이 적은 동네 노름판이라도 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활이 오래가지 못했다. 돈이 떨어져 살던 한국인 하숙집에서 쫓겨나 지인들 집을 전전했다.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안 사찰에서는 깜짝 놀라 사람을 현지로 급파해 도박에 빠진 스님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종용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미 도박에 중독될 대로 중독되어 도저히 도박을 버릴 수 없었던 것.

4년 전 휴가차 해외로 원정도박을 떠나는 친구를 따라 필리핀으로 온 최상만(43)씨. 그 역시 도박에 중독돼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 온갖 시련을 겪다 겨우 비행기표를 마련, 최근에야 고국 땅을 밟았다. “정말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에 홀렸다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라며 말문을 연 최씨. 그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현지에 남아 계속 카지노를 출입하며 포커를 비롯한 각종 도박을 즐겼다. 돈이 떨어지면 한국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부치라고 했다. 이렇게 지내기를 7개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며 떠났고 부모님도 최씨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는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박을 위해 여기저기 돈을 끌어 쓰다 보니 빚이 늘어나고 어느새 그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채 돈을 끌어 쓰는 바람에 업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오갈 데 없어진 최씨는 졸지에 공원 등지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필리핀 걸인들로부터 음식을 얻어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을 살았을 때 한 한국인 선교사가 찾아와 일자리와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최씨는 지난날을 반성하며 1년간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마련,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씨는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났고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갔더군요. 다 저의 잘못입니다”며 후회의 눈물을 글썽였다.

조기에 유학을 떠난 학생들의 도박 중독도 심각하다. 해외 유학 중 쉽게 접한 카지노에서 도박의 늪에 빠져 탈선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은데, 이중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유학생 부부도 있다. 94년 영국으로 남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던 정영화(34.가명)씨는 96년 홍콩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부부에게는 아이까지 있었으나 홍콩에서 도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학비를 모두 날린 것도 모자라 역시 사채까지 끌어써가며 본전을 찾으려 발버둥쳤지만 그 돈 마저 모두 날려 사채업자로부터 각종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최후의 기로에 서서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정씨에 따르면 죽으려는 순간에도 도박에 미련이 남아 아쉬웠다고. 그만큼 도박의 중독성은 강력했다. 정씨의 남편 K씨도 마찬가지여서 K는 한국 부모님으로부터 200만원을 겨우 얻어 두 사람은 마지막 배팅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고. 하늘이 도왔는지 두 사람은 포커에서 대박을 터뜨려 빚을 모두 갚고도 그 동안 잃은 본전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을 되찾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정씨는 도박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법도 한데 아직도 생각만 하면 근질근질해진다고 했다. 어떤 약물 중독보다 무서운 것이 도박 중독이라고 했다.

윤인환 르포라이터


입력시간 : 2004-02-13 14:42


윤인환 르포라이터 tavaris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