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집회 600회 맞는 이옥선 할머니, 일제만행 만천하에 각인

할매들의 작은 외침이 역사를 다시 세웠다
수요집회 600회 맞는 이옥선 할머니, 일제만행 만천하에 각인

"참말 하기 부끄러운 말을 수백 번씩 되풀이하는 고통을 아십니까. 60년 전의 악몽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2004년 3월 10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운니동 일본대사관 앞. 이날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599차 수요시위’에 참가한 이옥선(78) 할머니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다음 수요일 600회를 기념해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는 예고에도 할머니는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옥선 할머니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것은 수요시위가 600회를 맞기까지 여전히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과 우리 정부다. 600회를 맞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아직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를 받지 못하고, 우리 정부도 여태껏 할머니들이 이렇게 거리에 나오도록 방관하고 있는데 무슨 소감이냐”라며 가슴을 쳤다.

이 할머니는 1942년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중국 옌지(延吉)로 끌려간 뒤 고국 땅을 밟기까지 무려 58년을 타향만리에서 보냈다. 2000년 6월에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도움으로 옌지에서 돌아와 경기도 광주의 종군위안부 생활시설인 ‘나눔의 집’에 정착한 할머니는 이후로 하루도 거르지않고 수요시위에 참가해왔다. 이날도 할머니는 쇠약한 노구를 이끌고 시위에 참석해 “배운 것도 없는 내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증언하는 이유는 위안부 문제를 온 국민에게 알려 함께 해결에 동참하도록 호소하기 위해서였다”며 “정당한 사죄와 배상이 이뤄지는 날까지 수요시위를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젠 정부가 나서야 할 때”

수요시위를 시작할 때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212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32명이 살아 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70대 후반을 넘긴 고령인 데다 위안부 시절 겪은 피해의 후유증을 앓고 있어 앞으로 얼마나 피맺힌 절규를 들려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벌써 100명 가까이 세상을 떠났어요. 여생이 얼마 남지않은 우리 할머니들이 다 죽기 전에 이젠 정부가 일어나주어야 하지 않겠소.” 600회를 앞두고 이 할머니가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대통령을 만나 호소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정부가 위안부와 그들의 처절한 역사를 버렸다고 느낀다. “지나간 옛일을 들추지 말라”는 일본측에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할머니를 거듭 죽이는 것이다. 지난해 8월과 10월, 할머니는 청와대와 유엔인권위원회에 ‘국적포기서’를 제출했다. 58년이나 이국 땅에 머물다 귀국한 뒤에도 가족들의 사망 신고로 1년 6개월이나 한국 국적을 갖지 못했던 할머니였기에 국적 포기는 그야말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국적을 다시 찾은 날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 “어떻게 얻은 국적인데….” 최근 ‘가슴 답답증’이 도졌다는 할머니는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다고 했다.

할머니가 이처럼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이뿐 만이 아니다. 수요시위 초기 할머니는 한 동안 얼굴을 들고 거리를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저 할머니가 정신 나가서, 정신대 간 사람이래.” 정조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70,80대 노인들은 할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수군거리며 손가락질 했다.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당시 ‘목숨’과도 같이 여겼던 성을 유린당한 아픔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일본군에게 반항하다 고초를 겪으면서 몸에 새겨진 칼자국들을 볼 때마다 서러운 생각이 든다는 할머니는 같은 국민조차 외면하는 세태를 질타했다.

- “하루를 살아도 맘 편히 살고 싶어”

울산의 여관 집 양딸로 팔려가 허드렛일 하며 생활을 하던 할머니는 42년 7월 심부름을 나왔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비행장 공사장으로 끌려갔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온몸을 짓밟히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버텼다”고 울먹였다. 당시의 고초로 할머니는 30년 전 암으로 자궁을 들어내기도 했다.

“빨리 사죄 받고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게 지내다 눈 감고 싶어요.” 요즘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도 못 받은 채 고령으로 인한 치매 등으로 혹여 정신이 혼미해질까 걱정한다. “지난 60년의 한(恨)을 풀지 못하고는 한시도 편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할머니의 눈물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그 날까지 마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할머니들의 절절한 아픔을 대내외에 알리는 공론의 장이 돼온 수요시위는 ‘역사 청산’의 막중한 과제를 사회에 던지고 있다.

역사 재정립시킨 12년의 고행
   
6월 17일 600회를 맞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역사 재정립의 상징이다. 92년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정대협 회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과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 6개항을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2년간 계속된 수요시위의 참석자는 3만여 명. 코흘리개 유치원생부터 대학생, 독립군 할아버지, 재미교포까지 참여해 세대를 아울러 동참했다. 일본 국회의원이나 대만 위안부 할머니, 외국 시민단체 회원들도 수요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시련도 적지않았다. 2001년 7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와 관련, 수요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가 일장기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집회금지 조치를 당했고, 최근에는 위안부 누드 파문이 불거져 수요시위를 벌여온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못을 박기도 했다. 그러나 매서운 눈보라와 한여름 뙤약볕도 중단시키지 못한 수요시위는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공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내외 장기집회의 모델이 된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 개인의 수치스러운 과거사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인권범죄라는 범국민적 인식을 이끌어냈다. 국제사회에서도 여성인권 운동의 대표 사례로 인정 받았다. 93년 6월 빈 세계인권대회 결의문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됐고, 98년 8월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 배상을 요구하는 '맥두걸 보고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풀기위해 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일본 정부는 93년에야 비로소 정신대 모집 과정에서의 국가 개입을 인정했지만 65년 한ㆍ일협정을 들어 아직도 국가 차원의 배상은 거부하고 있다.

정대협 윤미향 사무처장은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덮기 위해 국제적으로 많은 로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애끓는 절규에도 민간차원의 대항은 쉽지 않다"며 정부가 적극적인 해결 주체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한편, 3월 17일 열리는 600회 수요시위는 세계 연대집회 형태로 추진되고, 국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평화를 염원하는 600인 선언문이 채택될 예정이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3-17 20:56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