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가로등 불빛만 을씨년스러운 쇠락의 거리짝퉁 천국 '관광도시'는 옛말, 빛바랜 추억만이 '어제의 영화' 기억

[르포] 빛바랜 추억만이… 이태원은 죽었다
저녁 8시, 가로등 불빛만 을씨년스러운 쇠락의 거리
짝퉁 천국 '관광도시'는 옛말, 빛바랜 추억만이 '어제의 영화' 기억


2004년 현재 이태원은 더 이상 ‘이방인의 도시’가 아니다. 이태원은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돼 왔다. 때론 ‘환락의 도시’였고 때론 외화를 벌어들이는 ‘관광의 도시’였으며 ‘짝퉁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쇠락한 도시’에 불과하다.

언론들은 올 1월 초 용산 미군기지 이전 계획이 확정되면서 이태원이 휘청거린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정작 이태원에서 척박한 삶과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이태원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더 이상 희망조차도 기대하지 않는 이태원의 추억을 더듬어봤다.

- 화려했던 흘러간 과거

이태원의 절정기로 상인들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3~4년을 꼽는다. 미군 주둔과 함께 변화해온 이태원의 풍경은 30년 전 만해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해밀턴 호텔 인근 골목에서 ‘OO식품’이란 작은 수퍼를 운영하는 윤수병(가명ㆍ65)씨의 회상이다.

“지금도 텍사스거리라고 부르잖아. 텍사스가 뭐야. 사창가에나 붙여지는 이름이잖아. 당시엔 대단했지. 골목이 무법천지였어. 그냥 거리에서 한국여자와 섹스하는 미군을 내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니까.”

한마디로 기지촌 역할을 했던 이태원은 점차 ‘이방인의 도시’로 순화되면서 자유분방한 외국문화가 국내로 전파되는 전초기지로 바뀌어 나갔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끌려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이태원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원은 개방적이고 퇴폐적인 ‘클럽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이른바 ‘단란주점’이나 ‘룸방’이 유흥가를 휩쓸기 전까지만 해도 이태원은 서울에서 가장 질펀하게 광란의 밤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소방서 앞에서 만나자’는 말은 80년대 젊은이들에게 무척 익숙한 약속이었다. 이태원은 소방서를 기준으로 용산 미군기지 쪽은 쇼핑타운이 반대쪽으로는 유흥가가 포진돼 있었다.

대부분의 나이트클럽은 반라의 스트립쇼를 최강의 영업수단으로 삼았다. 1980년대 후반 남성 무용수가 여성과의 성행위를 흉내낸 ‘레옹쇼’는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 ‘어우동 쇼’는 기본이었고 영화 ‘쇼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봉쇼’도 당시엔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음모나 성기를 노출하진 않았지만 T스트링 팬티하나만을 걸치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쇼걸을 보는 일은 이태원만의 자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관광특구 육성이 비수로

요즘 이태원 거리의 상가들은 오후 8시쯤부터 셔터를 내리기 시작한다. 두 시간쯤 지나면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인적 드문 인도엔 어렴풋한 가로등 불빛만 쏟아진다. 가죽의류를 판매하는 한 상인은 “관광객도 쇼핑객도 없다. 아마 대부분이 가게를 내놓았을 거다. 장사가 안 된다는 말도 하기 싫다. 그냥 이젠 빨리 떠나고 싶다”고 허탈하게 말했다.

정부는 1993년 세계적인 관광 명소를 육성하겠다며 ‘관광특구제’를 만들었고 이태원은 제일 먼저 지정됐다. 그러나 이태원 상인들은 ‘관광특구제’가 오히려 이태원을 두 번 죽인 셈이라고 말한다. 간섭 없이 놔뒀으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란 원망마저 섞여있다.

모자와 티셔츠 판매하는 한 노점상은 “막말로 우리도 해외 가면 경험해보고 싶은 게 유흥문화 아닌가. 괜히 관광특구 한답시고 이런 저런 단속만 심해졌다. 재미가 없어지니까 손님도 안 오고 사람들이 없으니까 외국인도 발길을 끊은 것”이라고 말한다. 곁에 있던 또 다른 상인은 “자꾸 언론에서 ‘짝퉁’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좀 봐주면 안되나. 홍콩이나 중국은 여전히 짝퉁 쇼핑천국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만 유독 더 난리다. ‘짝퉁’마저 안 팔면 솔직히 이태원 장사는 이제 더 이상 할게 없다”고 투덜거렸다.

실제로 이태원의 전성기와 쇠락기는 유흥문화의 운명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양공주’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환락의 도시 이태원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경제선진국에 진입했다며 샴페인을 일찍 터트린 지배층에게 ‘짝퉁 생산국’의 오명은 창피했을 것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뒷골목 문화를 없애고 그저 깨끗하게 정비만 하면 관광객은 더 몰려올 것이라고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이태원의 명성은 아쉽게도 깨끗함만으로 얻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 미군도 없고 일본인도 없다

썰렁해진 이태원은 나름대로 살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9.11테러 이후 미군들이 뜸해져 더 타격을 입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태원 상인 대부분은 손사래를 친다. 이태원이 미군에 의존하지 않은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싼값에 소주를 기울일 수 있는 술집을 빼고 이태원의 바와 클럽은 자정이 지나도 한 테이블에 손님이 앉을까 말까 한다. 지난 3월9일 소방서 옆 골목에 있는 한 외국인 전용 바를 들어서자 홀에는 미국인 한 명만이 맥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눈에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성종업원은 “외국인 바인데 술을 마셔도 되냐?”고 묻자 “그럼요, 물론이죠”라며 반색을 했다.

미국 등 서구 관광객이 줄자 이태원은 일본인 위주로 재편됐다. 나이트클럽 자리는 이른바 때밀이 관광을 위해 ‘에스테’라는 사우나 겸 마사지숍이나 한식 전문 관광식당, 가라오케로 변해갔다. 소방서 외에 이태원을 상징하는 계단 옆 ‘007클럽’도 이름만 유지한 채 가라오케가 됐다. 계단 위에 원래 대평극장 자리는 작은 상점들이 들어섰다가 끝내 대형 찜질방 ‘이태원랜드’로 변신했다. 카페 ‘도시선언’ 길 건너 맞은편 후미진 골목에서 부대찌게 식당을 운영하는 황여옥(가명ㆍ55)씨는 일본인도 별 영양가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태원에서 20년 넘게 옮겨 다니며 식당을 했다는 그는 “요 모양 요 꼴이 된 건 이태원 사람들 책임도 크다”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쇼핑타운은 바가지 요금이란 소문이 외국까지 다 나서 동대문이나 남대문에서 쇼핑을 하지 이제 이태원에서 물건 사는 관광객은 없단다. 요즘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몸과 웃음을 파는 이른바 ‘다찌 아가씨’들의 추태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본인들 스스로 외화벌이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 제살 깎아먹기라는 것이다.

“한번은 식당에 한국여자 둘이랑 일본 남자 셋이랑 왔어. 그런데 여자 하나가 주방으로 몰래 들어오더니 6만원을 달래. 계산할 때 포함시키란 거지. 엉겁결에 돈을 주고 계산에 애를 먹고 있었더니 그 여자 말이 ‘앞으로 이 식당 못 오겠네’하면서 짜증을 내더라고.”

삭막함마저 느껴지는 새벽 2시, 이태원을 떠나면서 30년 간 이태원을 지켰다는 수퍼 주인 윤씨의 술회가 아련하게 다가왔다. “7월이면 나도 그만 하려구. 몸도 늙고 도시까지 늙으니까 너무 서럽네. 사람들이 북적대고 활기가 있었으면 좀 덜 쓸쓸했을 텐데 말이야.”

이형구 르포라이터


입력시간 : 2004-03-18 15:22


이형구 르포라이터 dicalazzi@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