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유머로 입증한 "정치보다 웃기는 코미디는 없다"직장·가정으로 확산되는 탄핵신드롬, 심리적 충격해소 방편

블랙코미디 '탄핵 어록' "야~ 금배지들 졸라 웃기네"
인터넷 유머로 입증한 "정치보다 웃기는 코미디는 없다"
직장·가정으로 확산되는 탄핵신드롬, 심리적 충격해소 방편


'국회의원은 미친 놈 소리 듣고, 대화가 통화지 않는 사람이며, 시간 남으면 국회에 간다?’

최근 가장 회자되고 있는 유머는 정치인들의 탄핵 관련 공방을 엮은 ‘탄핵 어록’이다. 탄핵 정국을 맞아 각 방송사에서 개최한 TV토론에 출연했던 참가자들의 말을 정리한 어록이 인터넷 공간으로 옮겨 와 ‘유머 어록’으로 거듭 난 것이다. “정치보다 웃기는 코미디가 없다”는 시쳇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배꼽을 잡게 하는 블랙 코미디가 국민을 웃기고 울린다.

일약 ‘토론회 어록 스타’로 떠 오른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의 어록을 보자. 웃긴대학(www.humoruniv.com), 다음까페 등에서 유 의원의 토론 장면을 캡처한 패러디물까지 나돌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어록 중 하나는 MBC ‘100분 토론’ 중 나온 말이다. 장광근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의원은 미친 놈 소린 안 듣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유 의원이 서슴없이 “들어요”라고 일침을 가한 것.

- 정치인 수준 여과없이 드러난 TV토론

‘SBS 이것이 여론이다’의 발언도 화제다.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은 자꾸 시민 혁명을 선동해 사회를 바꾸려고 한다”고 말하자 유 의원은 “우리가 국회에서 이런 수준의 대화를 합니다… 제가 국민 여러분께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저희 국회에 보수든 진보든 대화가 통화는 사람을 보내 달라는 겁니다”라고 받아 쳤다.

MBC ‘100분 토론’ 진행자인 손석희 아나운서의 어록 역시 인기다. 장광근 한나라당 의원이 탄핵과 관련해 “이것은 총선을 앞두고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노대통령의 정략입니다. 탄핵을 기다리며 버티기 하고 있었던 거지요”라고 말하자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라고 되물어 장 의원의 말문을 막았다.

비난의 표적이 된 어록도 있다. KBS 심야토론에 출연한 박상희 민주당 의원의 어록이 그것이다. “(아침에 회사 나가서 결재하고) 시간 남으면 국회에 갑니다”, “국회 통과된 법률을 잘 알지도 못하는 국민들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민주당은 자수하는….”(‘자숙’이라고 써놓은 것을 제대로 못 읽고) 등이다.

“편파적”이라는 일부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 어록은 “지금 이 상황이 유머가 아니면 대체 뭐가 유머냐”는 대다수 국민들의 심중을 반영하듯 네티즌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같은 ‘대통령 탄핵’의 충격파는 연이어 네티즌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패러디로 다시 터져 나왔다.

“탄핵 찬성하는 이들이 한나라당 알바일 거라는 편견을 버려~ 그건 한나라 당원들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1탄) “탄핵 찬성하는 이들이 한나라당 알바일 거라는 편견은 이제 버려~그건 민주당 알바를 두 번 죽이는 일이예요~”(2탄). ‘알바가 아니야’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이 풍자만화 도메인 강풀닷컴(www.kangfull.com) 게시판에 올린 패러디다. 개그맨 정준하의 “편견을 버려”와 “두 번 죽이는 거예요”라는 개그를 빌려 탄핵 정국을 비웃는다.

- 재치와 촌철살인의 패러디들

최병렬 대표와 한나라당을 건전지 병렬 연결에 빗댄 유머도 기발하다. 네티즌들이 비꼬는 병렬 연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한 놈을 달든 수백 놈을 달든 밝기는 그게 그거다, 그러면서 쉽게 죽지 않고 끈질기게 오래간다, 한 놈 비리로 빠져도 계속 간다, 쓸 데 없는 낭비가 심하다(이것이 다 국민의 혈세다).’

솔로부대, 커플부대보다 무서운(?) ‘투표부대’도 등장했다. “(탄핵 사태에 맞서)반드시 4ㆍ15총선에 투표로 항의하자”는 결의로 가득 차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용했던 선전 포스터들의 이미지를 합성, 네티즌이 총선 투표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한편,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탄핵 대상을 색출하는 일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업무를 떠 넘기거나 성차별하는 직장 선후배와 동료는 단연 탄핵 대상 1순위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닥스클럽이 20~30대 직장인 606명(남성 309명, 여성 29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직장내 탄핵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7%가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없다’는 37.6%, ‘모르겠다’는 5.4%에 그쳤다. 그 사유에 관해서 남성은 ‘업무를 떠넘길 때’(40.4%), 여성은 차별을 경험했을 때’ (40.1%)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자기 잘못을 남에게 돌릴 때’(27.2%, 남) ‘인격적으로 무시할 때’(26.1%, 여)가 각각 그 뒤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사장이라 다행이라고? 천만의 말씀. 사장 역시 탄핵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력직 헤드헌팅 포털사이트인 커리어센터(www.careercenter.co.kr)가 홈페이지를 찾은 직장인 613명에게 “탄핵하고 싶은 사장 유형은 무엇입니까”라는 주제로 벌인 설문 조사의 결과를 보자. 전체 응답자의 35.1%인 215명이 업무 추진 과정에서 책임은 언제나 실무자에게 돌리는 ‘책임회피형’ 사장을 최우선 탄핵 대상으로 꼽았다. 다음으로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뜬구름형’(24.6%), 자신이 말한 사항에 대해 지키지 못하는 ‘허풍쟁이형’(18.9%) 유형.

- 일상적 표현 된 '탄핵'

이 뿐 아니다. 탄핵 신드롬은 가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필 아홉 살 바기 딸의 생일 날, 거래처 접대로 늦게 귀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는 한 네티즌은 “아빠를 탄핵하자”는 딸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허탈했다고 전했다. 요즘 중고등학생 역시 만만찮다. “‘영어 be동사도 틀리는 수준이니 대학에 보내려 애쓰지 말고 춤 추고 노래하는 가수로 키워 달라’는 내 의견을 묵살하는 엄마 아빠를 탄핵하고 싶다”는 등의 표현은 요즘 이들에게는 일상적 표현이 됐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점령한 탄핵이란 사실 알고 보면 심각한 사태다. 그런데도 이 같은 얘기를 사람들이 유머의 소재로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사람들이 탄핵 사태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유머의 소재로 도입하는 것 같다”며 “무서운 영화도 자꾸 보면 그 무서움이 약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받은 심리적인 충격을 약화하는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3-24 21:50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