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풍경의 끝자락서 뒷짐지고, 한박자 쉬어보자



뜯겨 나간 청계고가 너머로 우리 이웃은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황학동이 사라진 자리, '동대문 풍물시장'이 판을 펼쳤다.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는
황학동 벼룩시장의 그 얼굴 그 물건들이
고스란히 동대문운동장에 모였다.
불경기로 죽을 맛이라지만 그래도
그곳에 가면 신명이 절로 난다.
골동품에서 액세서리, 생활용품 등을 파는
다양한 좌판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야말로 서민들의 체취가 물씬한
장터인 셈이다.

요즘 동대문 운동장에서 스포츠의 환호를 기대한다면 큰 착각이다. 대신, 팍팍함 속에서도 배어나는 인정과 실랑이의 재미가 들어섰다. 무지막지한 철거대의 굉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 삶은 새로운 생존 법칙을 터득했다. 주말의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의 새 명소로 둔갑한 것이다.

손때 묻은 골동품, 중고 전자제품, 미술품, 꼬질꼬질한 헌 옷 따위가 삶의 무게와 애환을 담고 새 주인을 기다린다. 북한돈, 외국돈, 우표, 전화 카드에서 낡아빠진 LP까지, 그야말로 탱크 빼고는 다 있는 곳으로 거듭 났다. 운이 좋으면 전문가들의 정신을 빼놓을만한 물건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요령 좋으면 반 값에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의 재미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노점상들, 이른바 도시 비공식 부문과 비정규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 너머로는 독점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넘실대고 있음을 본다. 청계천은 그러므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규성 차장


입력시간 : 2004-04-02 20:41


최규성 차장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