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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그린마켓 르포… 명품, 벼룩시장, 화려한 외출
페라가모 원피스가 단돈 3만원, 버버리 코트 4만원…

이젠 명품을 좌판에서 구입한다?

저가(低價)명품이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대한민국 부(副)의 상징인 서울 강남에 들어선 벼룩시장은 ‘신기’하리 만큼 이채롭다. 장소도 패션의 1번지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이어서 어리둥절하다. 그러나 매월 둘째, 넷째 일요일 오전 11시~오후 3시 현대백화점에서 열리는 ‘그린마켓’은 분명히 벼룩시장이다. 유럽식 벼룩시장 ‘그린마켓’을 닮았다는 게 다를 뿐.

4월11일 11시. 백화점측에서 벼룩시장의 장소로 제공한 본점 옥상 하늘공원에 올라갔을 때 우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파티라도 여는 것처럼 화사하게 꾸며진 야외 공간에,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와 곳곳에 자리한 유기농 먹거리(빵, 생수, 과일 등)ㆍ고급 장난감들을 보는 순간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분이 ‘하늘’로 오른다고나 할까.

그러나 느긋하게 그런 기분을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실내 전시장(옷과 액세서리, 가방 등이 구비된 벼룩시장)으로 밀려 들어가야 했다. 행사 시작 30분 전부터 6층 옥상 문 앞에서 아래층 계단까지 길게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어찌나 기세 좋게 밀고 들어오는지, 실내 행사장은 순식간에 북새통으로 변했다.


- 봄 햇살 아래 펼쳐진 '여심' 충동





이태리 넥타이 1,000원, 군청색 페라가모 원피스 3만원, Donna Karan 여성용 버버리 코트 4만원, 회색 체크무늬 이신우 양복이 1만5,000원, 미국 뉴욕에서 사온 보석 아트 시계 3만8,000원, 핸드 메이드 귀걸이, 팔찌 5,000~2만원….

벼룩시장에 나온 1만여 점의 상품은 대부분 새 것과 다름없이 깨끗한 중고 명품. 가격은 기껏해야 몇만원대(최하 5,000원에서 최고 15만원)여서 물건을 구입하려는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까지 돈다. 한정된 제품 때문에 선호하는 디자인은 먼저 고르는 사람이 임자이기 때문이다. 1시간 평균 방문자 수가 1,500명에 이른다 하니 어느 정도 살벌한 경쟁은 처음부터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한 쪽 팔에 대여섯 가지의 옷을 걸친 채, 다른 한 손으로 물건을 휘젓는 쇼핑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자연히 쇼핑 노하우에 따라 쇼핑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 벼룩시장 단골들은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원하는 상품 좌판으로 돌진한다. 처음 방문한 경우는 개장 전에 좀 일찍 와서 구입 희망 상품군의 위치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옷이면 옷, 핸드백이면 핸드백, 아니면 구두 등 미리 쇼핑 할 물건이 있는 위치를 알아두었다가 문이 열리면 후다닥 뛰어가서 선점해야 해요. 인기 상품은 불과 몇 분 사이에 주인이 결정되니까요.” 패션 홍보대행사 유스컴 매니저 고란주(32)씨의 말이다.



열 살도 채 안 된 코흘리개 꼬마에서부터 60대 노부부까지, 쇼핑 고객의 연령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구매 상품도 남녀 기본 정장이나 가방, 구두 등 패션에서 다이어리, 저금통, 찻잔까지 각양각색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해외 유명 브랜드 중고 핸드백이다. 5,000원~15만원의 가격 딱지가 붙은 페라가모, 발리, 프라다 등의 명품 중고 핸드백 300여 점은 딱 30분 만에 바닥을 보였다. 뒤늦게 와서 “핸드백 더 없나요”를 외치다 헛탕 치고 돌아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이곳의 분위기는 여느 북적대는 벼룩시장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백화점에서조차 찾기 어려운 톡톡 튀는 감각의 옷과 소품을 고를 수 있는 즐거움이 특별하다는데 강점이 있는 듯하다.

대학생 심언(21)씨는 “미국에서 봤던 오렌지 컬러 BANANA REPUBLIC 티셔츠를 단 돈 8,000원에 구입했다. 비록 남이 입던 것이지만 깨끗하게 세탁됐고, 사이즈도 딱 마음에 든다”며 기뻐했다.

대치동에서 왔다는 주부 정경희(40)씨도 “지난 번에 4만원을 주고 일본과 미국의 수입품 스커트 5장을 구입했는데 전부 디자인도 예쁘고 깔끔해서 친구들이 부러워했다”며 “싸고 편하게 입을 수 있어서 더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 명품 핸드백 30분만에 매진



이색 명품 벼룩시장이 현대백화점에 둥지를 튼 것은 3월21일. 그러나 사실상의 태동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뉴욕의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패션 비즈니스를 전공한 패션 칼럼니스트 한영아(39)씨가 패션업계 지인 5명과 함께 두 달에 한 번씩 열어온 자선행사 ‘안나의 牡汶?Ann’s Bazaar)가 시작이다.

옷이나 패션 소품을 접할 기회가 많은 그녀들이 내놓는 제품이니 물건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패셔너블하고 수준 높은 명품이라 일찌감치 입소문이 났다. 친구끼리 자선기금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서로 쓰던 물건을 내놓고 재구입하던 행사는 회를 거듭하며 회원이 급증, 1년 사이 800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반응을 주의 깊게 지켜본 현대백화점이 지난 달부터 직접 나서 벼룩시장을 운영하면서 하루 방문객 5,000~8,0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한 것이다.

갑작스레 규모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없는 것은 아니다. 10년 전 친구의 어머니가 쓰던 물건을 재구입하는 것처럼 정이 오가는 푸근한 정서는 약화됐고, 대량의 물건이 뒤섞이니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품을 족집게처럼 골라내는 일도 쉽지 않다. 회원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물이 흐려졌다’는 볼멘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벼룩시장 쇼핑의 참 맛은 ‘보물찾기’를 하듯 수북이 쌓인 구제 제품들 속에서 정말 희귀하고 예쁜 상품을 골라내는 “명품의 재발견에 있다”고 한영아씨는 말한다. “평소 사고 싶어도 요즘은 살 수 없는 고풍스러운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이곳 쇼핑의 최대 매력이죠. 오래된 것이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은, 현대적 감각을 지닌 상품을 재발견하는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이곳에서 거둬들인 수익금 전액은 자선단체에 기증될 계획이라 더욱 값지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4-04-1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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