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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25시] 정은임
자신만의 언어로 띄우는 감성의 세상편지
내면의 소리를 찾아 떠났던 터키로의 여행
낯선 이국 땅에서 만난 순수의 보물, 시청자에게 선물


그녀는 왜 터키에 간다는 것일까? 그녀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곳이지만 동양도 서양도 아닌 곳이죠. 어디에도 속하고,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생의 비밀이란 보물이 찬란하게 빛날 것 같은 나라. 그래선지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죠. 저, 터키에서 살 거예요.”

이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의할 수 없는 나라 ‘터키’ 같았다. 꿈꾸는 듯한 눈,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 기다란 목선과 너무 여려 보여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오규원님의 ‘한 잎의 여자’라는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여자.

정은임을 기억하는가? MBC 5시30분 ‘우리말 나들이’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표준어를 소개하는 아나운서를 최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칫 잘못 쓰게 되는 언어를 교정해 주는 프로그램인지라 그녀가 나오면 화면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이유는 그뿐 만이 아닐 게다. 솔직히 그녀는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 예쁜 아나운서니까.


- 젊음과 열정으로 기억되는 아나운서





정은임을 이야기 하려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다. 라디오를 말하지 않으면 ‘정은임이 아닌 것’이다. MBC FM4U(91.9MHZ)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의 주인으로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해 95년 4월 1일 마지막 방송을 한 뒤, 다시 옛자리로 돌아온 아나운서.(그 사이는 미국 노스트웨스턴 대학에서 ‘한국의 영화 마니아’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혼과 출산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체 활동을 해왔던, ‘정영음’(정은임의 영화 음악)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속에선 정은임은 아직도 영화음악을 진행 중인 아나운서였다.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가 영화 음악으로 소개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은연중에 떠올리게 했던 그녀다.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는 말이 있던가. 그녀는 영화 음악을 통해 숨겨진 감성을 하나씩 꺼내놓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꾸준히 그녀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각자가 세상의 ‘투사’가 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젊음과 열정의 코드였다. 92년 입사한 정은임이 처음 맡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MBC FM 영화음악이다. 젊은 정은임은 그곳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감성과 이성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수습사원 시절 노조 가입 포기 각서를 거절한 이력도 갖고 있다.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것이 정은임이고, 옳지 않음에도 가야 한다면,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 드릴게요”라는 눈물겨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시 떠나게 된다.

그녀의 떠남은, 많은 소문들을 안겨주었다. 울먹이던 마지막 멘트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인터넷에 떠돌았고, 그녀의 떠남이 ‘강제 퇴출’이란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그 당시 PC통신 정영음 동호회는 ‘정은임 복귀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일간지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뉴스거리화 했다. 혹자는 그녀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것은 사건이었다.



“예전에는 재기발랄한 영화를 좋아했어요. 이젠 영화를 만들든, 책을 쓰든, 방송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못할 짓 하면서 얻어내는 특종 같은 거, 누군가?상처 입히는 거, 위험한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

정은임은 세상의 움직임에 예민하다. 후배 아나운서 김태희의 죽음과 추문에 휩싸인 선배 홍은철 아나운서의 일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죠. 또한 대중의 속성은 무엇인지, 사람이 뭉쳤을 때 과연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 그때 대중은 본질을 잃고 얼마나 잔인하게 변해가는지. 탄핵안이 가결된 사건과 그 후 대중들의 움직임이 모두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니 너무 힘들었어요. 어찌해야 하나, 이 움직임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 딸 부잣짐서 키운 문학적 감성

그녀의 감성은 어릴 적 집안 분위기의 영향이 크다. 정은임은 딸만 넷인 집의 둘째다. 딸 부잣집 딸들이 대개 그렇듯,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처럼 자랐다고 한다. 네 딸은 모이면 서로 배역을 정해 연극을 하는가 하면, 피아노를 치고 시를 낭독하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아버지도 문학과 영화에 조예가 깊은 감성적인 분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던 옛날 책들과의 만남은 딸을 문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만났고, 프랑스 문학을 접했고,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읽었다. 또한 정은임은 ‘골방 탐험기’를 통해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만나곤 했다. 어머니가 펜팔하던 미국 친구, 아버지의 낡은 책과 밑줄 그어진 부분 따라 읽기와 작은 글씨로 씌여진 아버지의 메모 찾기, 또한 부모님의 연애편지까지 탐독한 정은임은 자연스레 문학과 친해지면서 감성을 지닌 철학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터키로 여행을 갔어요. 남편과 약속을 했죠. 별 세 개짜리 이상 숙소에서 묵기로…. 물론 듣지 않았어요. 그 나라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알려면 서민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서구문화에 익숙해져서 전통(서민)문화를 차츰 잊어가는 건 아닌지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여행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슬람인, 독일 청년, 프랑스 게이…. 모두 제각각 삶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여행은 낯선 사람과 금세 친구로 만들어 주는 매력이 있어요.”

작년 봄 5살 난 아이와 남편을 두고서 혼자 배낭여행길에 오른 그녀. 낯선 이국의 땅, 터키에서 그녀는 어떤 보물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어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그걸 찾고 싶었어요.”

정은임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아련한 ‘아우라’ 같은 존재다. 새벽 3시에 영화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잠시 추억에 잠기고픈 그 시절 그 사람이거나, 잠을 거부하는 요즘 세대일 것이다. 정은임은 이제 세대와 상관없이 잠들어 있는 당신의 감성을 깨우는 인생의 선배이자, 언니 같은 다정한 아나운서다. “안녕하세요. 정은임이예요.” 오늘 새벽,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당신의 감성을 노크할 것이다.



유혜성 자유기고가 cometyou@hanmail.net


입력시간 : 2004-04-14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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