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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 속 추억으로 기억될 아날로그 풍경들
완행열차·월급봉투 등 디지털 시대에 밀려난 낭만과 향수
우체통·공중전화·재래시장 등도 사라질 위기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우리가 인식하든, 못 하든 세상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뇌리에서 잊혀져,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아버린 것들이 있다. 과거에는 신기하고 요긴했던 것들이 지금은 시시하고 쓸모 없는 것이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우리 주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을 좇으면서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 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얼마 전, 잡지에 난 독자엽서를 부치러 집 앞에 있던 우체통에 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빨간 우체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새 우체통이 어디로 갔지?’ 의아해 하며 다른 우체통을 찾으러 동네 일대를 돌아다녔다.

‘보고 싶은, OO에게’로 시작하는, 분홍 빛깔 편지 한 통. 검은 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써내려 간 편지를 봉투에 고이 넣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던 기억이 새롭다. ‘용감한 국군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저는 OO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 김영민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곳은 많이 춥지요? 우리나라를 지켜주시는 아저씨들 덕분에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서른 고개를 넘어선, 성인들은 초ㆍ중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위문 편지를 써봤을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쓴 편지와 함께 야채크래커, 다이알 비누, 타월, 양말 등 위문품을 보냈던 시절. 비록 의무적으로 쓴 위문편지지만 얼마 후, 얼굴도 모르는 국군아저씨로부터 답장이 오면 기뻐했다.

이제는 e메일과 휴대폰 문자가 일상화되면서 과연, 요즘에도 이런 편지를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디지털 시대인 요즘, 급기야 빨간 우체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급속히 줄어든 우편물로 인해 수익성이 낮아져 이용자가 적은 곳부터 우체통을 없앤다는 것이다.

요즘 사라지는 것들, 비단 우체통만은 아니다.

오렌지색 공중전화통, 삐삐, 주판, 통일호 열차, 월급봉투, 연탄, 회수권, 토큰, 재래시장, 장터, 변두리극장, 이발소, 헌책방, 방앗간, 쌀집…. 분명히 우리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왠지 모를 따스함이 가슴속에 전해오는 것들이다.

- 휴대전화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라져 가는 삐삐, 공중전화



“삐삐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 주십시오.”

90년대 중반, 삐삐는 신세대는 물론, 전 국민의 필수품이었다. 누구든 호주머니에서 ‘삐삐~’ 소리가 울리면 자동적으로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곤 했다. 가끔 공공장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 눈총을 받기도 했다. 요즘엔 휴대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97년엔 전국 가입자가 1,500만 명을 넘어섰고 당시 졸업·입학 선물 1위로 선정될 만큼 삐삐는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듬해 PCS서비스가 시작되고 이동전화 요금이 크게 내리면서 대부분 삐삐를 버리고 휴대폰으로 바꿨다. 현재 삐삐는 한 텔레콤 회사에서만 취급하고 있다. 가입자 10만 명 중, 의사나 군인 등이 30%이고, 자발적인 삐삐 사용자는 7만 명 정도라고 한다. 삐삐에서 휴대폰으로 급속히 교체되면서 공중전화 역시 퇴보하고 있다. 요즘은 공중전화도 카드식 전화로 일반화되었으며,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길게 줄을 섰던 풍경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스피드 시대, 항상 소지하는 휴대폰이 있는데 굳이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할 사람이 있겠는가. 또한 1인 휴대폰 시대를 살다보니, 집집마다 하나씩 보유하고 있던 유선 恍??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 아랫목에서 듣던 "찹쌀~떡 사려~ 메밀묵~"



늦은 겨울 밤이면 골목 어디에선가 들려오던 “찹쌀~떡, 메밀묵~ 사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다보곤 했다. 엄마한테 찹쌀떡 사달라고 조르다가, 어느 새 멀어지는 소리. 찹쌀떡 장수를 놓쳤다는 사실만으로 아쉬워했던 시절이었다. 주로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에 고학생들이 메밀묵과 찹쌀떡 등을 담은 네모진 모판을 어깨에 매고 골목골목 다니며 목청껏 외치고 다녔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귀하기도 했지만, 찹쌀떡과 메밀묵은 든든한 야참이었다. 패스트푸드가 범람하는 요즘, 아이들이 이런 간식을 찾기나 할까마는, 문득 ‘연탄’이 뭔지는 알까 싶다. 어릴 때만 해도 동네 어디에나 쌀집과 나란히 연탄집이 있었다. 80년대까지 겨울이면 서민들의 구들장을 데워준 연료로 유일했던 연탄. 이후 아파트의 대량 보급과 기름, 가스 보일러 등에 밀리면서 점차 사라졌다. 당시 연탄은 아궁이, 난로는 물론, 눈 오면 눈사람 만드는 재료로, 내리막길 미끄럼 방지 등 요긴하게 쓰였다. 행여 연탄불이 꺼질까, 어머니는 때맞춰 연탄을 갈았고 행여 가스라도 샐까 봐 두꺼비집으로 꼭 덮었다. 연탄불에서는 실내화도 말리고, 세숫물도 데우고 엄마 몰래 국자에 ‘뽑기’도 하고,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다. 이런 향수 때문일까. 요즘엔 연탄 삼겹살 집이 인기를 누리고 겨울이면, 연탄난로도 심심찮게 나간다고 한다. 언뜻, 연탄이 아주 사라진 것 같지만 아직도 연탄을 때고 사는 서민들이 많은 형편이다.

샐러리맨들의 애환이 담긴 누런 월급봉투는 또 어떤가. 요즘 봉투에 담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있을까.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 지급용을 빼고 요즘은 월급봉투를 찾아보기 힘들다. 월급이 통장으로 자동이체 된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월급봉투는 가장들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했다. 액수야 많든, 적든 월급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숨기고 아내 앞에서 큰소리도 쳤다. 아내는 ‘쥐꼬리만한 월급’이라고 바가지를 긁으면서도 알뜰히 쪼개서 아이들 학비 내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현금이 수북이 들어있어 두툼했던 누런 월급봉투. 지금은 찾기 힘들지만 한달 동안, 가계 살림을 지탱해 주었던 고맙고 훈훈한 기억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 대형 할인마트에 밀리는 재래시장과 장터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이자, 시끌벅적하지만 사람 사이의 정이 오가는 재래시장과 장터. 명절이라도 다가오면 엄마 손잡고 시장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사람들로 복잡한 시장 길을 뚫고 뜨거운 호떡 먹어가며 흰 원피스와 빨간 구두에 정신이 팔렸다.

온갖 먹거리와 생활용품, 도구들이 즐비하고 보따리 장수들이 풀어놓은 좌판에는 신기한 물건도 많았던, 그 시장 터에는 아주머니들의 깎아달라는 흥정이 이어지고 ‘골라~ 골라~’ 를 외치는 옷장사 아저씨, 울릉도 호박엿 파는 엿장수의 신나는 가위질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공간이 아닌, 사람 사는 냄새 가득한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요즘 한숨 소리가 길어졌다. 그나마 명절 대목도 옛 말이 됐다고 한다. 불경기라는 복병도 한 몫 했지만 주변에 하나 둘 생긴, 대형 할인마트로 손님들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겨울엔 따뜻한 난방,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 도는 마트에서 잘 정돈된 온갖 물건들 사이로 카트 끌며 편하게 쇼핑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투박하고 시끌벅적한 재래시장이 어쩐지 더 정겹고 가고싶은 건 왜 일까.

- 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통일호'의 추억



‘꿈의 철도’라 불리는 고속철도(KTX)가 드디어 4월 1일 개통됐다. 바야흐로 고속철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속 300km라는 꿈의 숫자는, 서울에서 부산을 3시간 미만으로 단축시켰다. 더불어 이 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감축되며 통일호는 모두 사라진다. 교외선을 비롯해 경춘선, 경전선, 장항선 등 수익성이 떨어지는 노선의 통일호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는 것. 장항선, 경춘선 등은 무궁화호 열차로 대체되며 일부 노선은 통근시간대에 맞춰 이름을 ‘통근열차’로 바꿔 운행된다.

특히 능곡에서 의정부까지 운행된 교외선은 70, 80년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렸다. 이 열차가 지나는 일영-장흥-송추는 서울 대학생들의 MT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었고 ‘낭만의 기차’로 불리며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좋았다. 이제 덜컹거리던 통일호 열차는 사라졌지만 투박하게 울리던 통일호의 기적소리와 함께 젊음 날의 추억과 낭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 마음속 깊이 새겨진 추억들

그러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세월의 변화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훗날엔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득 공원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공중전화 부스, 길가 은행나무 아래 빨간 우체통, 장터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귀 막고 듣던 뻥튀기 소리가 정겹고 설레는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자락 여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허주희 객원기자 cutyheo@hanmail.net


입력시간 : 2004-04-1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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