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뎅바, 잔술집 등 주머니 가벼워도 즐거운 선술집 인기

입맛·감성·가격 '꽉' 서민형 주점, 불황 속에 꽃피다
오뎅바, 잔술집 등 주머니 가벼워도 즐거운 선술집 인기

400원짜리 술과 900원짜리 안주로 풍류를 즐겨봄은 어떠한지….

축 처진 어깨로 퇴근하면서 간단히 술 한 잔 걸치고 싶은데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어 헤맨 적이 있는가. 단돈 만원짜리 한장 들고 부담 없이 술 한 잔 걸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주머니는 가볍고, 시름은 무거운 서민들에게 반가운 이른바 ‘서민형 주점’이 불황속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5월13일 저녁 7시, 서울 강북구 지하철 4호선 돈암역의 ‘정겨운 오뎅집’. 끓어오르는 오뎅(어묵)통에서 솟아나는 흰 연기 만큼이나 실내의 분위기도 정겹다. 이야기 꽃도 만발한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20대 아가씨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30대 아주머니들, 40ㆍ50대 아저씨 등 연령대도 다양하다.

- 소주 한병에 안주까지 5,000원 안팎

“뜨끈한 오뎅 국물에 정종 한 병 시켜 놓으면 그만이니 편하거든. 아무리 싸도 기본 1만원은 하는 비싼 안주를 안 시켜도 되잖아.”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50대 신사가 구석에서 정종 잔을 기울이다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해질녘 거리를 내다보는 여유가 잔마다 넘쳐난다.

최고급 어묵인 ‘가마보코’를 비롯해 순대오뎅 오징어오뎅 치즈오뎅 버섯오뎅 등 퓨전오뎅 안주가 개당 900원. 3,000원 짜리 정종이나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오뎅 두 꼬치를 먹으면 5,000원을 넘지 않는다.

선술집이지만, 짙은 갈색의 인테리어와 고전적인 소품들은 고즈넉함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분위기에 취해 달랑 오뎅 한 두 꼬치 먹고 몇 시간씩 머물다 가는 젊은 여성들도 많다고 한다.

돈암동 토박이라는 이모(27ㆍ여)씨는 최근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이곳을 들락거린다. 이씨는 “취업준비 중이라 주머니가 가벼운데 이처럼 부담 없이 들릴 수 있는 곳은 찾기 힘들다”며 “안주를 많이 먹기 뭐할 땐 국물로 배를 채우고 가도 좋다”고 ‘오뎅바 예찬론’을 폈다.

불황일수록 서로 가깝게 앉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심리. 오뎅 통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얘기를 주고 받다 보면, 낯선 사람들끼리 금세 친구가 된다. 10평 남짓의 좁은 공간이 불편하다기보다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런 오뎅집, 소위 오뎅바가 최근 직장인들의 왕래가 많은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 주점은 쌀쌀한 날씨에 빛을 보는 오뎅집의 특성상 비수기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손님이 북적거린다.

정겨운 오뎅집(돈암점) 주인인 이동민 씨는 “안주 가격이 900원에 불과하니 사케와 함께 곁들여 배불리 먹어도 2만원이면 충분하다”며 “2,3차로 가볍게 마시기 위해 들리는 손님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프랜차이즈 점포로 문을 연 의정부시 호원동 ‘섬마을 이야기’는 400원 짜리 잔술로 재미를 톡톡히 보는 곳이다. 잔술이란 낱잔으로 파는 술. 60년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씩 팔던 것을 40년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성남시 은행동에 사는 양모(34)씨는 호원동에 사는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고 가는 길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이곳에 들른다. 술 생각은 나는데 운전대를 잡고 먼 길을 가야 하니 참아야 하는 게 현실적인 갈등. 이에 400원짜리 잔술에 2,500원짜리 꽁치 안주 하나를 시켜놓고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는 게 양씨 말이다. 이 업소 종업원 홍모(21)씨는 “잔술은 먹고 싶은 양만큼만 먹을 수 있으니까 딱 한 잔이 아쉬운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말했다.

- 젊은층ㆍ서민들의 사랑방 역할

선술집이면서, 전면을 테라스처럼 연출하고 매장 바깥에 소나무 등을 심어 깔끔한 카페 분위기를 혼합한 분위기가 특징. 400원 짜리 잔술과 한 접시 7,000원 하는 회 메뉴가 특히 인기 있다. ‘섬마을 이야기’는 2001년 8월 지하철 7호선 남성역에 1호점을 오픈한 이래 반응이 좋아, 현재 지하철 3호선 교대역, 1호선 청량리역, 5호선 행당역 등 교통이 편리한 수도권에 40여 개의 점포를 구축할 정도로 급성장세다.

서울 신촌에 위치한 ‘포석정’도 주머니가 가벼워도 즐거운 술집이다. 상호 그대로 매장 가운데 길게 놓여진 테이블에서 막걸리가 순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치 신라시대 포석정에서 느끼는 운치 그대로 냇물이 흐르듯 막걸리가 흐른다. 술값이 먹는 만큼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이곳의 묘미. 단돈 3,000원만 내면 그 막걸리를 먹고 싶은 만큼 떠먹을 수 있는 이색지대다. 주말이면 기본 10~20분은 기다려야 자리가 날 정도로 손님이 넘쳐 난다.

5월15일 오후 9시. 막걸리가 흐르는 테이블 끝자락에선 대학생 6명이 술 먹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안주는 1만원 짜리 해물파전 한 접시. “술을 즐기러 온 건데 안주를 많이 시키면 술을 많이 못 먹잖아요.” 뮤지컬을 전공한다는 대학생 최윤미 씨의 얘기다. 연극배우 지망생인 황태혁(21) 씨도 “막걸리를 무한대로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 오늘 우리가 30만원 어치는 마실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막걸리에 어울리는 김치전(9,000원)이나 해물파전 등 대부분의 안주도 1만원 안팎으로 저렴하다. “이문 많이 남길 생각 하면 이렇게 못 팔죠. 싸게 파는 대신 손님이 끊이질 않으니까 박리다매 하는 거죠.” 이 주점 여사장 정수윤 씨의 말이다.

포석정 외에도 신촌 일대에는 파격적인 술값으로 서민들을 유혹하는 주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신촌 인근의 맥주점들은 버드나 카프리 등 병맥주 5병에 오징어ㆍ땅콩 등의 안주를 세트로 1만 1,000원에 가격에 선보이는가 하면, 식사+술+안주를 묶어 1인당 1만원에 내거는 등 젊은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 같은 불황기엔 이 같은 실속형 마케팅이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이 아닐까.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5-19 20:23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