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적절한 결합으로 '문명을 다스리는 '사람들'21세기의 상큼한 원시적 삶, 아날로그의 조용한 반란

디지털 일방주의를 거부한다 - Anadigi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적절한 결합으로 '문명을 다스리는 '사람들'
21세기의 상큼한 원시적 삶, 아날로그의 조용한 반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그 ‘디지털 일방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현대인들은 스피드를 외치면서도, 한편에서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기도 한다. 스피드(speed)와 슬로우(slow)가 공존하는 세상. 그렇다면 중간 지점은 어떨까.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세상, 그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디지털 문명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 디지털 일방주의’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예전의 아날로그 세계를 인식하며 새롭게 눈을 떠 가고 있다. 이른바 아나디지(anadigi)족들의 출현. 아나디지를 꿈꾸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를 알아본다.


- 사이버 공황을 경험해 봤는가

언젠가 한 번, 잊어 먹고 휴대폰을 집에 두고 출근했다. 그런데 일하면서도 하루 종일 뭔가 허전하고 내 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을 경험했다. ‘ 그 사이 중요한 전화가 오지 않았는지, 혹 친구가 문자를 보냈는데 씹었다(문자에 대한 응답을 안 했다는 속어)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그 날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휴대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지하철에서 벨소리가 울리면 혹시 내 것이 아닌가 싶어 휴대 전화를 꺼내 본다든지, 조용한 공간에서 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어느 날, 한창 일하는 사무실에서 ‘ 인터넷 프리’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인터넷 대란으로 전국의 인터넷 망이 순식간에 마비되면서 전국 각지의 네티즌들이 ‘ 사이버 공황’을 겪었던 적이 있다. 괜히 인터넷 서비스 회사만 욕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라도 핸드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인터넷이 안되면 짜증나고 안절부절못했던 적은 없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깜박거리는 메신저의 대화창. 여행사에 근무하는 김 부장이 업무상 거래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열어놓은 창이다. 그런데 다른 창이 깜박거리기 일쑤이니, 상대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 창, 저 창 부지런히 옮겨 다녀야 하니 문제다. 메신저가 대중화 된 뒤에는 업무의 상당 부분이 메신저로 이뤄지고 있어, 꺼둘 수도 없는 형편이다.

눈은 컴퓨터 창을 보고, 손은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귀는 쉴새 없이 울리는 사무실 전화와 휴대 전화에 열려 있다. “업무상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메신저를 쓰기 시작한 뒤로도, 전화 통화는 거의 줄지 않고 있어요. 매일 수십 통씩 쏟아지는 이메일은 또 어떻고요. 꺼내 보니 대부분 스팸 메일이어서 골치가 아프죠. 그렇지만 간혹 중요한 정보가 배달됐을지도 몰라, 편지함을 열어 보지 않을 수 없어요." 최근에는 메신저 중독이 새로운 부작용으로 떠오르고 있다. 20대 여성 이모 씨는 “하루 10시간 가까이 메신저에 접속하며, 메신저로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2∼3시간 정도”라고 말한다.

영업 부서에 근무해, 평소 외근이 많은 박 모씨. 그에게 휴대 전화는 필수품이다. 그러나 2년 전 우연히 휴대폰을 분실 한 후, 몇 달 동안 휴대전화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던 휴대전화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것.

그 때의 경험으로 그는 한번 되찾은 여유를 놓치기 싫어 휴대전화 사용을 포기했다. 공중 전화를 찾아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은 문제가 안 된다. 대신에 행선지와 출발, 도착 시간을 직원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습관을 길렀다. “ 휴대 전화가 없다 보니,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는 때는 차로 이동하는 시간뿐입니다. 길어야 1시간 정도인데, 설마 1시간도 못 기다릴 정도로 급한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처음엔 불편해 하던 동료들도 차츰 이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 졌다. 그는 컴퓨터도 점차 멀리하게 됐다. 불가피한 e - 메일과 인터넷 검색 외에는 컴퓨터를 들여다 보지 않는다. 아날로그적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 디지털 기기들을 멀리할수록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고 한다. 예전에 ‘ 혹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벨 소리에 신경 쓰고 하루라도 메일을 보지 않으면 불안했던 마음과 초조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 디지털, 거부 아닌 선별적 이용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활동 중인 동호회 ‘ 삐사모(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은 아나디지적인 삶의 한 예. 이들은 휴대 전화를 외면하고 호출기(삐삐)를 고집하고 있다. “ 휴대 전화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끼어 든다는 점이 싫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디지털 문명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터넷에서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디지털을 잘 이용한다고 볼 수 있고, 메신저도 즐겨 쓴다. 다만 필요치 않은 부분에서만큼은 ‘ 의도적으로 한 박자 느리게(!)’ 사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요즘엔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경우가 많다. 컴퓨터에 접속해 알게 된 사람들이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만나며, 그렇게 엮어진 사람들이 친숙해지면 또 다른 모임을 만들고 얼굴을 맞대는 것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태블릿 PC 등 직업상, 누구보다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하는 직장 여성 김모 씨. 그는 회사를 벗어나면 아날로그로 돌아간다. 집에선 아예 컴퓨터를 보지 않으며 휴대 전화도 좀처럼 받지 않는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철저히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인터넷, 휴대전화, 메신저 같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이들에게 매우 반가운 존재. 하지만 자신이 처리 가능한 용량을 넘어서는 정보가 쏟아져 한계에 다다르면, 디지털의 발달이 좋지만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다한 정보에 피곤을 느낀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치게 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정보를 다스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아날로그 방식이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 문명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적절히 결합해 적당한 선에서 디지털을 제어하는, 이른바 ‘ 아나디지(anadigi)적인 삶’은 그 대안으로서 각광 받고 있다.

허주희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4-06-02 11:07


허주희 객원기자 cutyhe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