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적하지만, 제2의 인생 행복해요'가족 뒷바라지 하느라 제쳐 뒀던 꿈 찾아 새로운 날갯짓누구의 아내, 엄마에서 온전한 자신의 이름 되찾아 만족감

‘기러기 엄마’ 그녀들이 사는 법
'적적하지만, 제2의 인생 행복해요'
가족 뒷바라지 하느라 제쳐 뒀던 꿈 찾아 새로운 날갯짓
누구의 아내, 엄마에서 온전한 자신의 이름 되찾아 만족감


‘기러기 엄마’가 늘고 있다. 한때 유행한 ‘기러기 아빠’와는 코드가 다른 기러기 엄마다. 엄마와 함께 조기 유학을 떠난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혼자 남은 아빠가 처량한 느낌을 안겨주는 ‘기러기 아빠’라면, 기러기 엄마는 혼자 남았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분위기나 생활방식은 판이하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전문직 여성답게 외국에 나간 자식과 남편에게 경제적인 지원은 하지만, 동시에 가족 부양으로 잠시 접어두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몰두하는 맹렬 어머니다. 소위 제 2의 인생을 준비중이다.

- 주로 안정된 직장 가진 전문직 여성

“딸이 오니까 갑자기 바빠졌어요. 방학동안 딸 아이에게 필요한 학원 스케줄 짜고…. 다시 예전에 과외 스케줄 짜던 때로 돌아온 기분인데, 뭐 어쩌겠어요.”

김원임(48)씨는 방학을 맞아 돌아오는 딸 때문에 시간 없다고 말하지만, 얼굴에는 행복한 빛이 역력하다. 그녀는 소위 ‘기러기 엄마’다. 직업은 의사. 강남 거주. 남편은 사업차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지 2년이 지났다.

“남편이 사업상 미국으로 가게 됐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렇다고 제가 미국으로 같이 갈 수는 없구 해서….”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강남에서 학교를 다니던 딸 아이 수민이의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고민은 깊어졌다.

“강남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엄마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과목별로 과외 시키고, 모자라는 과목은 학원에서 따로 보충하고, 음악이나 체육실기 시험까지 레슨 선생님을 통해 관리하거든요. 제가 시키는 거지만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시켜도 성적은 중상위권을 겨우 넘길 정도였다. 어느날 수민이가 말했다. “엄마, 나 유학갈래. 한국에서 공부해 봤자 중간밖에 못할 것 같아.” 도피 심리가 다분한 딸의 말에 처음엔 반대했다. 하지만 딸아이의 성적이 오르지 않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못하죠. 신체적으로는 성숙하지만,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를 유학 보내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그 나이는 엄마가 옆에서 챙겨주고 보살펴 주면서 해줄 게 많은데, 과연 아빠 옆에서 무난하게 자랄까, 그런 점이 불안했죠.”

다행히도 수민이는 미국 생활에 빨리 적응했다. 어학은 보통 정도 실력이었는데, 문법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A+를 맞았고, 한국에서 약한 수학도 미국에서는 늘 만점이었다. 공부에 점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수민이는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남은 심경은 기러기 아빠와 다를 바 있을까? “처음엔 제 분신이 쏙 빠져 나간 것 같아 휑했어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평소에도 잘 챙기지 못했던 점이 미안했는데, 유학까지 보내고 나니 집에 저 하나 덩그러니 남아있는 거예요. 퇴근하면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날들이 더 많았어요.”


- 한동안 고독감에 짓눌려

딸아이의 학업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주부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뀐 것이다. 한동안은 휴가를 받은 기분이었는데, 그도 며칠 뿐, 어느 순간 밀려오는 고독감은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아직도 소녀의 낭만이 가슴 속에 남아 있어서 무척이나 멋진 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아이와 남편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게 금세 드러나더라구요.”

하지만 우연히 동양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노장 사상에 빠져든 그녀는 수강생들과 스터디를 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또 스노우 보드를 배워 어서 겨울이 오길 기다린다고 할 정도.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 목표는 스노우 보드를 멋지게 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크게 잡으면 멋진 50대를 위해 지금 삶에 충실하는 거예요.”

모 신학대 음대 교수인 백미양(42)씨는 1년전 남편과 아들들을 독일로 보냈다. “남들보다 일찍 결혼했어요. 대학교 때 남편을 만나서 대학 3학년 때 아들을 낳았어요. 제 친구들은 피아니스트가 되었거나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전 이제 시작이에요. 처음 다가온 기회라 놓칠 수가 없었어요.”

1년 전 대학교수 자리가 났을 때 남편은 독일로 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음악을 전공하는 두 아들에게는 좋은 기회였고, 음대 출신인 그녀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교 때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죠. 그 이후로 누구의 아내, 엄마로 살았지 한번도 제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시간강사를 할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데 대답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제 자신조차 이름을 까먹고 산 거죠. 그걸 깨달은 순간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하지만 혼자 남았을 때 그녀는 학교에서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아이들의 밥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아무도 없는 빈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년의 생활 패턴을 하루 아침에 바꾸진 못했지만, 이젠 학교에서 일이 끝나면 동료 선생들이나 학생들과 어울리죠. 제가 점점 사회화된다는 것을 느껴요. 지금 이렇게 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낯설고 얼떨떨할 뿐이예요.”


- 젊은시절 못 누렸던 자유로움 만끽

백씨는 학교에 올 때마다 20년 전 맘껏 누려보지 못한 캠퍼스 생활을 뒤늦게 즐기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뽑고, 학생들과 잘 어울린다. “풋풋한 20대를 보면서 제 20대를 보상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들의 꿈과 방황마저 저에겐 아름다워 보이니까요.”

강남에 사는 장소영(50)씨. 전직교사인 그녀는 또 다른 의미의 기러기 엄마다. 한달 동안 캐나다에 머물면서 아이가 다닐 학교를 찾아 다녔다. “한국에 있는 유학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학교를 골랐어요. 남의 나라에 공부시키러 보내면서 여전히 사고방식은 한국식이라,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남편과 아들을 한국에 두고 캐나다에 간 그녀는 토론토 다운타운부터 외곽까지 두루 두루 돌아다녔다. “먼저 캐나다 교육청에 의뢰해서 학교리스트를 받고, 상담선생님과 연결을 시도했어요. 아이의 성격에 맞는 학교를 찾으려고 팜플릿을 들고 직접 학교를 구경하다시피 했죠. 수영장이나 농구실, 미술실, 도서관, 채플실 등등 학교 안팎의 문화까지 아이가 적응하기에 좋은 환경을 선택했죠.”

이제 장씨는 가정주부로 돌아왔다. 아이를 외국으로 보낸 그녀는 아침에 운동을 하고, 문화센터에서 여가 활동을 즐긴다. 내년 봄쯤엔 서울 외곽지역에 무공해 전원 카페를 열 계획이다.

오늘 우리는 새삼스레 어머니들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 꿈이 뭐였나요?” 최소한 “자식을 위해 뒷바라지하는 엄마란다”는 아닐 것이다.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내고 제2의 삶을 사는 기러기 엄마들.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날개짓을 하고 있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4-07-15 10:42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