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멍에를 털어내고 가슴 벅찬 컴백을 꿈꾼다당당할 수 없는 현실에 꿈과 희망을 주는 모임 주도3년째 '나눔의 장' 역할, "부도 안 내게 하는 데 역점"

[우리시대의 2군] 부도기업인 재기 도우미 김진일씨
실패의 멍에를 털어내고 가슴 벅찬 컴백을 꿈꾼다
당당할 수 없는 현실에 꿈과 희망을 주는 모임 주도
3년째 '나눔의 장' 역할, "부도 안 내게 하는 데 역점"


‘내 힘으로 내 일을 한 번 해 보자’.

창업을 생각하고 준비하거나 이미 새로운 도전에 뛰어든 사람들. 스스로 다짐하며 온갖 어려움을 감수할 각오이지만 예견치 못한 복병도 있다. 치밀한 준비와 노력으로 작지만 알찬 성공을 쌓아가다 도중에 사업을 접어야 하거나 때론 모든 것을 쓸어넣은 채 빚더미에 앉는 시련에 빠지기도 한다.

햇볕 쨍쨍할 때 비올 때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나.

유망한 벤처 기업인에서 자금난으로 부도의 회오리를 맞은 지 9년, 재기를 위해 뛰는 김진일 씨(51)는 자기처럼 부도 위기에 몰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한 쪽을 내주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재기를 꿈꾸는 부도 기업인들의 모임’(www.comeback.or.kr)은 2002년부터 시작돼 3년째 나눔의 장이 되고 있다. 부도 기업인들의 아내들도 아픔을 나누고 격려한다. 사이트 이름 comeback에는 다시 재기해 정상적인 기업인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 어려움도 함께 나누면 힘

부도 기업인들의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회원들이 얼굴을 함께 하기는 딱 한 번. 드러내놓을 수 없는 자괴감과 속박들 때문에 온라인이나 전화로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딱한 처지를 나누다 지난 달 처음으로 회원 160명 중 20명이 경기도 일산에서 만났다. 가슴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한 번 보자는 뜻이었지만 ‘나 같은 사람, 나 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뛰고 있다’는 것을 나누고 힘이 되게 하자는데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드러내 놓고 당당할 수 없는 아픔 때문에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모임이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며 1990년 초 장영실상과 벤처기업상을 받기도 한 유망 중소기업인이었던 김씨는 1995년 부도를 맞았던 당시 아무런 정보나 법률적 지식, 재기를 위한 지식 등이 없어 혼자 가슴을 태웠던 안타까웠던 때가 있었다.

“부도를 내면 몸부터 숨기고 그 때부터 법적 지식과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지요. 근로자들에게 주지 못한 체불 임금으로 노동부나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어디 물어볼 때도 없었어요. 누군가 겪어 본 사람이 정보라도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등에서 부도 관련 자료를 모아 2002년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부도이후 재기의 꿈을 접지 않았던 김씨는 컴퓨터를 배워 PC통신과 인터넷에 눈 떠 유망한 도메인을 선점, 돈을 벌기도 했고 보따리 무역에까지 억척을 부렸다.

특유의 아이디어로 1998년에는 인터넷경매방송을 만들어 재기를 시도한 데 이어 다음해에는 연세대 창업보육센터에 다니며 인터넷 증권방송을 만드는 등 제약 속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부도 기업인은 사업자등록을 할 수 없어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제약이 김씨에게도 큰 부담이 됐다. 현재는 의료 기기를 개발하는 사업에 몰두, 의료관계자 등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기대를 걸고 있다.

매일 아침 7시 일산의 사무실에 홀로 출근, 밤 10시까지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부문별로 기술개발을 의뢰하고 투자자를 찾는 일에 몰두하며 재기를 위해 뛰는 김씨는 컴백 사이트 운영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자신처럼 부도를 낸 후 앞이 캄캄할 사람들을 위해 지난 해에는 금융결제원 홈페이지에 공시되는 부도업체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 용기를 잃지 말고 컴백 사이트를 찾아 상담하고 경험담을 참고할 것을 알리기도 했다. 기업주가 도피한 경우 등으로 보낸 편지의 40%는 되돌아왔다.


- "부도 보다는 부도 후 재기가 더 어렵다"

“부도 난 후의 대처 방법도 나누고 조언하지만 될수록 부도를 내지 않도록 하는데 역점을 둡니다.” “부도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듯 제가 9년째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부도 낸 후 금융기관 등의 신용을 완전히 회복,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다시 할 수 있는 완전 재기자는 전체의 1%미만일 겁니다. 자금 줄이 끊긴 채 정부의 지원이나 혜택은 고사하고 거미줄처럼 촘촘한 차별과 제재 속에 금융거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기는 개인의 기술과 노력만으로 어려운 게 현실이지요.”

현재 컴백 사이트에는 김씨 외에도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상담과 조언을 하고 있다.

부도 기업인에 따르는 엄청난 제약과 아픔을 알고 있는 회원들은 전화 상담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부도를 내지 말라, 부도를 낸 후 재기는 더욱 어렵다’고 설득한다.

지난 5월에는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에 처한 부부가 김씨의 사무실을 찾아와 남편의 해외 도피결심을 밝히고 부채 처리 문제를 상의하던 중 이 업체가 안정된 수입원과 납품처를 확보해 재기할 수 있는 여건임을 발견, 해외도피 후 불법체류 상태에서 돈을 벌어 국내에 송금하는 계획의 무모함과 남편만의 해외 도피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올 것 등을 설명했다. 사무실을 줄여 아내가 경리 등 내부 일을 맡고 투자자에 마지막 설득을 해 보도록 해 이 부부는 부도ㆍ해외도피의 갈림길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며 새 삶을 찾았다.

상담하는 업체 중에는 부도가 불가피한 상황도 있다. 한 업체는 지난 4월부터 부도 상담을 해 오며 부도 준비를 해 오고 있는데 김씨가 알려주는 부도 준비는 자금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 처리토록 하는 것. 밀린 근로자들의 급여와 퇴직금, 소액 채권, 영세 하청업체에 줄 납품대금 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토록 조언한다.

또 돈이 다급해 부인을 보증인으로 세워 돈을 꾸었을 경우 부도 후 부부 모두가 금융거래에 묶이는 등 생활에 어려움이 커 부인이 꿔 온 작은 돈은 우선 해결하도록 조언하기도 한다.

이 사이트를 부도 기업인들이 돈을 빼돌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삐딱하게 보거나 실제로 엉뚱하게 상담해 오는 못된 경우도 있다고 들려준다.

김 씨가 ‘기분 나쁜 전화’라고 말한 사례는 그야말로 부도 후 돈을 어떻게 빼돌려야 하는지 물어오는 경우. “친구에게 미리 재산을 빼돌려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뻔뻔하게 전화 상담을 해온 한 젊은 사람에게는 호통을 쳤다.

“제가 새로운 사업에 매달리며 시간이 모자라 사이트를 충실하게 가꾸고 상담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요. 이 일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상담에 전문적으로 답변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세무사 같은 분들의 자문과 상담도 필요해 회원으로 가입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해외 성공사례 발굴로 새 활로 제시

기술력도 뛰어나고 의욕과 능력이 있는 부도 기업인들이 거미줄 같은 제약으로 국내에서 재기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직접 겪고 숱하게 보아 온 김씨는 앞으로 해외에 나가 재기에 성공한 사례를 집중 발굴해 새로운 활로를 제시할 생각이다.

중소기업청이나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곳에 부도기업 재기 방안이나 부도 기업의 사장된 기술을 살리는 방안을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해 토론회도 제안할 생각이다.

자신과 이웃의 재기를 위해 뛰고 있는 김씨 스스로도 부도기업인의 멍에가 길고 무거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산다. 부도를 예방하는 일, 부도 기업인들의 재기를 돕는 일, 그래서 부도 기업인들이 영영 일어설 수 없는 사람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길은 더욱 열려있어야 한다. 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이다.

입력시간 : 2004-07-2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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