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 끄집어내기영화로 짚어본 최면요법의 허와 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최면'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 끄집어내기
영화로 짚어본 최면요법의 허와 실


영화 '얼굴 없는 미녀'의 한 장면

매혹적인 미모의 유부녀가 한 병원의 간이 침대에 누워 있다. 과거 아픈 사랑의 추억을 되짚으며 울부짖듯 신음한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다 끝내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여자에게 다가서는 남자. 입술을 포개고,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최면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한 남자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 ‘ 얼굴 없는 미녀’(감독 김인식, 제작 아이필름)의 내용 중 일부다. 이 영화는 상처 받은 두 영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최면 요법을 등장시켜 몽환의 사랑을 빚는다. 최면 요법으로 여자의 과거 속에 들어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설정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이 같이 최면은 흔히 ‘상대방의 의식을 잃게 하여 마음대로 조정하는 마술 같은 기술’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최면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도 ‘진짜 그럴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최면 요법의 진짜 효과, 또 허상은 무엇일까.


- 의식과 판단력 '말짱'

영화 ‘ 얼굴 없는 미녀’에서 최면은 남녀 주인공의 만남을 이어주는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정신과 의사 석원(김태우 분)은 신경성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지수(김혜수 분)에게 강렬한 암시를 걸어 그녀의 사랑을 독점하고자 한다. 석원이 최면을 거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바로 휴대폰을 통한 메시지다. “ 장미꽃을 들고 나에게로 옵니다”라는 주문이다. 이렇게 매일 오후 8시 석원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석원의 병원을 찾아 그가 의도한 바의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또 이종혁 감독의 영화 ‘H’(2002년)는 이러한 최면을 이용한 범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연쇄살인범 신현(조승우 분)은 자신의 손으로 6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감옥에서 음악, 목걸이, 사진 등의 도구를 이용해 담당 형사들에게 최면을 걸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암시를 걸어 최면 상태로 유도하는 것은 영화처럼 실제로도 가능하다. 최면자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최면에 걸린 사람은 자기 의사와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최면술이 범죄 스릴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면 상태에 빠졌다고 해서 영화처럼 최면을 건 사람이 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최면 상태에서도 의식과 판단력은 있다. 자신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지시나 범죄, 거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거부할 수도 있다.


- 최면상태서도 말고 행동 모두 기억

영화 '분신사바'

‘얼굴 없는 미녀’에서 지수는 최면 상태에서 석원과 열정적인 섹스를 나누지만 깨어나면 그와 관계한 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영화적 허구가 가미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최면 상태에서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내용은 모두 기억된다. 때로 최면자가 의도적으로 망각을 유도하는 경우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을 수도 있지만, 드문 일이다. 또 잠시 기억을 못할 수는 있어도 영구적으로 기억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영화 ‘올드 보이’(박찬욱 감독)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대수(최민식 분)는 친딸 미도(강혜정 분)와 관계를 가진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 최면술사에게 기억을 잃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이 최면은 수포로 돌아간다. 최민식의 눈에 맺히는 눈물로 그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특히 최면으로 사람까지 잊게 만든다는 것은 실?가능성이 희박하다. 그 사람과 관련된 환경이나 추억 등 모든 부분을 깨끗하게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 과거와 전생을 볼 수 있다

안병기 감독의 공포 영화 ‘ 분신사바’에서 까페(레떼)의 주인이자 심령술사인 호경(최정윤 분)은 양호교사 은주(김규리 분)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의 전생이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해 억울하게 죽은 학생의 어머니임을 밝혀낸다. ‘얼굴 없는 미녀’에서 석원은 지수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의 첫 사랑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이같이 최면으로 과거나 전생을 보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그렇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과거의 기억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기억들도 저장되어 있다. 예컨대 어릴 적에 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수를 보았다면 그 가로수의 숫자까지 명확하게 셀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잠 재의식에는 분명한 기억이 존재한다. 최면은 평상시 깨어있는 의식의 저항을 줄이고 무의식을 활성화함으로써, 무의식 속에 감춰진 병의 원인이나 특정 사건의 해결 실마리를 찾아 낼 수 있다.

<도움말 및 최면 시연: 한국최면분석연구소 (www.iiuu.net) 진승표 소장>

■ 인턴기자의 최면체험

8월 20일 11시. 서울 종로구 계동의 최면분석연구소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 호기심 반 걱정 반’에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던 최면에 걸리는 기분은 어떨까’, ‘ 혹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잔뜩 긴장하고 두 평 남짓한 연구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검정색의 편안해 보이는 안락 의자가 놓여있을 뿐, TV 등에서 보던 현란한 조명등이나 음산한 인테리어는 찾아볼 수 없다. “제가 요즘 무척 답답한데 최면으로 앞날을 내다볼 수 있습니까?” 조급한 마음에 최면연구소를 찾은 목적부터 털어 놓자, 진승표 소장은 “최면은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한 통로일 뿐입니다.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정도는 어떨까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꿈은 자주 꾸나요?” “성격은 어떻습니까?” “집중력은?”…. 성향 파악을 위한 질문이 5분 가량 이어졌다. 그리고는 안락의자에 앉게 하고 암시를 건다.

“손바닥을 쫙 펴세요. 양손에 집중하세요…양팔이 원이 그릴 듯이 점점 달라붙습니다…팔이 교차됩니다.…셋을 세면 눈을 뜰 수 없습니다.”진 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목소리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아, 정말 팔이 움직이네, 눈도 안 떠지네. 이거 참!’

그 신기함을 즐기려는 찰나, 이번에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시계와 몸이 하나 되어 달라 붙습니다. 시계가 점점 더 빨리 돌아갑니다…학창 시절에 도착했습니다. 뭐가 보입니까?”그의 말이 끝나자 난 아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운동장에 있다. 가슴이 무척 답답하다. 친구가 전학을 가는 날이다. 친구는 나를 쳐다 보지도 않는다… . 어느 새 초등학교 5학년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진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가장 행복했던 일을 떠올려보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해안을 따라 난 길을 운전하고 있는 내 자신이 보인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 “그건 모르겠어요.” “동행자가 있습니까?” – “예, 첫사랑이요. 아무 말없이 그냥 싱글벙글입니다.”

“개운한 기분을 갖고 깨어나세요”라는 말에 눈이 뜨이고 조금 전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은 쉬 가시지 않는다. 멋쩍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탁기 안을 돌다가 나온 기분이 이럴까요?” 한 10여 분 지난 것 같은데, 분침이 한 바퀴를 휙 돈 뒤다. 최면 속 기억은 모두 생생한데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현실도, 꿈도 아닌 묘한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자의 호접몽(蝴蝶夢)은 그리 멀지 않은 데 있었다.

배현정 기자

정민승 인턴 기자


입력시간 : 2004-08-25 20:14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