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을 택한 뉴 프론티어공학도의 길 스스로 포기, 캐릭터 디자이너로 새로운 삶 개척

[우리시대의 2군] 카투니스트 이형진
가시밭길을 택한 뉴 프론티어
공학도의 길 스스로 포기, 캐릭터 디자이너로 새로운 삶 개척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고,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다. 준비 없이 밀려나는 것이 안타깝고, 막혀있는 동굴처럼 또 실타래같이 얽혀있는 길을 힘겹게 뚫어야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안쓰럽다.

대학교의 총학생회 사람들을 만나러 간 길, 정문 입구에서 통화 내용을 곁들은 수위 아저씨도

“학생들 취업이 안 돼 큰 일이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대학에 어렵게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점 잘 따면 취업하고 효도할 수 있었던 상아탑도 변화와 혼란 속에 진통하고 있다. 대졸자 등 고학력 노점상들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처럼 직장을 잡는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투쟁도 치열하다.

이형진(28ㆍ경남 양산시 웅상읍 삼호리 그린빌아파트)씨는 공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길을 7년째 헤쳐가는 사람이다.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996년 명문 K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이 씨는 부모님과 친척 등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 서울 유학생이었다.


- 나의 길을 갈 뿐, 돌아보지 않는다

“고교 때 물리 화학을 공부했듯이 공대도 그런 줄 알고 성적에 맞춰 입학했지요. 그런데 공부내용이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 적성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깊어 갔습니다. 그래서 2학년을 마치고 휴학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기를 쓰고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뿌리치지 못해 그대로 고향 집에 주저 앉은 지 7년이 됐다.

스스로를 소심하고 고민과 걱정이 많고 내성적이라고 평가한 이 씨가 기득권과 주위의 기대,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는 결단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에는 변함도 없고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

대학을 포기하고 무슨 사업을 해 큰 돈을 벌어 보상한 것도 아니다. 그림을 그리며 그는 아직 진행 중이다.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리기를 좋아해 한 때 미술대학이나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해 볼까 생각은 했지만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는 이 씨는 말하자면 대책 없이 대학을 그만 두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공부인지 모른체 그저 졸업을 하면 좋겠지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그냥 덤벼들기는 싫었다고 했다.

평범하지만 세상적인 길, 다른 사람과 그저 어깨를 맞대고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이씨의 현재 직업은 딱히 이렇다고 할 것도 없지만 만화(카툰)를 그리며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카툰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01년 말까지 4년간 숱한 방황과 시련을 겪으며 세상을 알았다. 처음에는 영어공부를 할 생각으로 학원도 다니고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고 혼자인 어머니의 부담을 덜려 공인중개사와 공무원시험에도 응시했지만 길이 아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포토샵 자격증도 따 디자인분야 사원 모집에 응시했지만 좀 더 젊은 인력이 필요하다며 나이 때문에 고배를 마시고, 나이가 맞으면 남자라는 이유로, 또 경력을 요구하는 조건 때문에 이 씨의 새로운 시작과 도전은 번번히 벽에 부딪쳤다.

“이게 괜찮으면 저게 걸리고 저게 괜찮으면 이게 걸리고…정말 앞이 꽉 막혀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기회는 온다더니 이 씨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다. 2001년 말 우연히 江?지내던 동생을 통해 카툰 홈페이지인 ‘마린블루스’를 알게 됐고 ‘이거다, 나도 이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카툰을 시작했다.

자신의 홈페이지(www.hardpaper.net)에 그림일기를 그리기 시작한지 1년 여, 2002년 12월 자신을 캐릭터한 네모난 얼굴의‘하드보드지맨’이 주인공으로 등洋求?일기를 ‘지지리궁상’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리기 시작했다. 2003년 10월부터는 본격 카툰 홈페이지로 발전했다.

“하드보드 종이가 네모잖아요. 하드보드지맨은 제 자신을 컨셉으로 해 만든 캐릭터입니다.”

네모 얼굴의 하드보드지맨은 젊은 사람들의 고민, 생각, 삶 등을 진솔한 글과 함께 그려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이름 알려지며 스시맨 카툰 연재

미술이 전공이 아닌데 카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주위의 평가에 이 씨는 “그림이 취미이고 좋아서 계속 그리니까 조금씩 나아지는 것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 씨의 그림일기가 점차 알려지며 지난 달부터 부산의 한 초밥집 홈페이지에 ‘스시맨’이라는 카툰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곧 한 포털 사이트와도 정식 계약을 맺고 연재할 예정이다.

“먹고 살 만한 수입은 되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현재 수입은 없습니다”이다.

“어머님이 먹여 주시는 밥을 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어렵게 포기하고 어렵게 시작한 일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수입, 어느 정도의 계획을 갖고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동문서답에 가깝다.

카툰을 연재할 수 있는 그림 마당을 빌려준 데 만족해 하는 듯한 이 씨. 자신의 카툰이 알려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직도 자신의 직업에 확신이 없는 그는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더 실력을 키워서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하겠다”는 꿈나무이다.

말수가 적어 전화보다는 홈페이지를 통해 대화하기를 즐기는 이 씨는 방문자들이 ‘우연히 왔다가 카툰을 보고 끌리는데 퍼가도 되나’고 물으면 ‘당연하죠, 퍼가시다가 힘드시면 꽃삽도 빌려드릴 테니 많이 퍼가라’고 말하는 정이 많은 청년이다.

10년 후에는 컴퓨터 포토샵으로 하는 직업이나 캐릭터 디자이너가 돼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 씨는 먼 계획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다. 카툰을 모아서 책을 내고, 자신의 캐릭터관련 상품을 만들고, 캐릭터 디자인분야 취직도 하고, 게임관련 카페도 운영하고, 큰 규모의 게임대회도 열고 싶고, 장난감 가게나 팬시점도 차려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카툰에 집중할 생각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이전에 저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요. ‘꿈과 현실’‘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미래에 대한 불안’등, 해결법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 상황에 끌려 다니느냐,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는 의지가 앞서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학벌과 연봉으로 한 사람의 능력과 성공 여부를 손쉽게 측정하는 세상에서 안정된 사닥다리를 버리고 자신의 일을 찾아 나선 이 씨와 같은 사람들을 우려하며 한편에서는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과도기다.

그의 도전이 어디까지 갈지 보고 싶다.

글·사진/ 안재현 대기자

입력시간 : 2004-09-0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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