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 팔면 마음이 부자되죠"책갈피에 담긴 타인의 열정 엿보며 공유의 즐거움 누려

[동호회 탐방] 헌책방동호회 <숨어있는 책>
"발품 팔면 마음이 부자되죠"
책갈피에 담긴 타인의 열정 엿보며 공유의 즐거움 누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헌것보다 새것을 좋아한다. 빳빳하게 밀봉된 새 물건의 포장을 뜯을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법칙이 예외적으로 작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헌 책방동호회 회원들이다. 대형서점에 가면 구색 맞춰 다양한 새 책을 구할 수 있고,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값싸고 편하게 책을 살수도 있는데, 이들이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헌책더미를 뒤지는 이유는 뭘까? 헌책 매니아들이 모인 ‘숨어있는책’(www.freechal.com/booklover)을 찾아가보자.

평소 헌 책방 다니기를 즐겨하던 김민성(29) 씨가 2000년 7월 다음넷 카페에 개설한 ‘숨어있는책’은 2000년 10월 프리챌로 이전해 새롭게 문을 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흔히 ‘숨책’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점차 헌책방과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들면서 대표적인 헌 책방 동호회로 성장했다.

- 헌 책방 순례자들이 한번쯤 들러야 할 곳

홍대 근처 헌 책방에 모인 회원들. 학생 직장인 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헌책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헌 책방 동호회인 만큼 ‘숨어 있는 책’에는 헌책방과 책에 대한 옹골찬 정보로 가득하다. 굳이 회원 가입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게시판의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지만, 질문하는 글을 올리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초보 헌 책방 순례자’들에게 요긴한 것은, 김민성 씨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그린‘헌책방 땅그림’이다. 전철역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는 설명까지 씌어 있고 주변의 주요건물 위치도 표기해, 약도 하나만 출력해 떠나면 어렵지 않게 헌 책방을 찾아갈 수 있다.

수많은 헌 책방 중에서 어떤 곳을 가면 좋을지, 헌 책방마다 성격은 어떻게 다르고 가격대는 어떤지 궁금하다면 ‘헌 책방 날적이’ 게시판을 둘러보자. 회원들이 저마다 올린 헌 책방 방문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편리하다. 헌 책방 날적이에서 마음 맞는 헌 책방 몇 군데를 찜해 두고 단골로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헌책 가격은 책의 희귀성이나 절판 유무, 출간 연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부분 새 책값의 30~50% 선.

절판된 책을 찾아 ‘숨어 있는 책’까지 찾아 든 사람들에게 가장 요긴한 공간은 ‘묻고 답하기’ 게시판이다. “외국어 전용 헌 책방은 없나요?” 하는 질문에 “한남동 이슬람 모스크 근처에 있는 ‘애비스 북누크’와 녹사평역 근처 ‘포린 북 스토어’를 추천한다”는 회원, 절판된 바자리의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의 구입 경로를 알려주는 회원 등도 눈에 띈다.

‘나의 책사랑법’ 게시판에서는 헌책 표지를 깨끗하게 손질하는 법, 책에 찍힌 스탬프 흔적이나 스티커 자국 지우는 법, 책꽂이 만드는 법 등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중의 5단 책꽂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꺼운 합판과 벽돌을 사서 많은 책을 저렴하게 꽂는 동호회 회원들의 노하우를 배울 수도 있다.

‘숨어있는 책’ 회원들에게 헌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좋은 책에 대한 욕심이 많기에 보다 저렴하게 많은 책을 사기 위해 헌 책방을 찾기도 하지만,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돼 버린 책은 오직 헌 책방에서만 구할 수 있어, 이들에게 헌 책방은 언제 어떤 보물과 만나게 될지 모를 숨겨진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또 처음에는 자신의 관심분야에만 머물렀던 책에 대한 관심이, 다른 회원들과의 교류 속에서 보다 넓어지기도 한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특정 장르나 작가의 책을 스스로 찾아 읽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헌책을 사는 일은 단순히 책을 값싸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열정에 사로잡혀 책의 공백에 휘갈긴 메모나 밑줄 친 흔적을 읽으며, 때론 책갈피에 꽂힌 단풍잎 한 장을 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는 이들은, 간혹 전 주인이 책 속에 숨겨 놓았다 잊어버린 비상금을 발견하는 뜻밖의 횡재를 만날 때도 있다.


- 헌책방문화 담은 책 펴내고 절판도서 복간하기도

빽빽한 서가를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까지 늘어선 헌 책더미 속에 안길 때 더없이 행복하다.

무엇보다 헌 책방 동호회에 모여든 사람들이 ‘숨어있는 책’에 남다른 애정을 갖는 건, 책을 이야기하기가 갈수록 머쓱하고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끈끈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헌 책방 동호회가 프리챌로 이전하자마자 첫 번째로 가입신청을 했다는 동호회원 이유진(29) 씨는 “헌 책방 동호회를 몰랐을 때에는 나와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숨어있는 책’을 알고 나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애착이 간다”고 설명한다. 온라인상에서 다 풀지 못한 회포는 매달 중순에 열리는 정기모임에서 직접 만나 헌 책방을 돌며 풀어낸다.

책에 대한 애정이 많은 회원들이 모인 만큼 이들이 보여주는 책 사랑도 남다르다. 헌 책방 책만 4천여 권을 모았다는 숨어 있는 책 2대 마스터 조희봉(34) 씨는 평소 마음의 스승으로 여긴 소설가 이윤기 씨의 저서와 번역서 2백여 권을 모으며 《전작주의자의 꿈》(함께 읽는 책)이란 책까지 펴냈다. 이윤기 씨는 그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조희봉 씨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한편 만화매니아 박지수(25)씨는 1990년대 중반 출간됐다가 절판된 로봇물 패러디만화 《출동!! 먹통-X》(코믹팝)의 복간을 위해 ‘먹통X를 살리는 모임’을 만들고, 작가인 고병규 씨와 인터뷰를 추진하는가 하면 출판사를 직접 타진해가며 4백여 명의 예비독자를 모은 끝에 마침내 복간을 성사시켜 눈길을 끌었다.

아직까지 헌 책방이라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책 더미와 눅눅한 공기, 퀴퀴한 책 먼지 냄새’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숨어 있는 책’의 문을 한번 두드려보자. 동호회 대문에 걸린 ‘헌책방, 발품을 팔아 마음을 채우는 곳’이라는 표현처럼, 헌책방에서 책 찾기의 즐거움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입력시간 : 2004-09-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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