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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25시] 연출가 전훈
"체호프에게 빚진 인생, 그의 작품 무대에 올리며 갚죠"
연극 <갈매기> 연출, 체호프는 삶의교과서이며 인생의 지표




체호프니까! 안톤 체호프 4대 장막전 중 세 번째 무대 ‘갈매기’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초호화 캐스팅에 노 개런티라는 믿지 못할 사실 속에는 배우들이 모두 체호프 마니아라는 공통분모가 숨어 있었다. 연극 ‘갈매기’ 가 최고의 배우로 구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이뿐 만이 아니다. 전훈의 체호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숙명과도 같은 체호프 작품 연출

전훈. 사람들은 그를 궁금해 했다. 안톤 체호프 사후 100주년이 되는 올해 한해 동안, 네 작품을 올리겠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가진 이 연출가에게 혹자는 지나친 만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체홉이 성공할까? 라는 의혹을 받으면서. 연출가 전훈은 이런 소리들을 그 특유의 미소로, 살짝 비웃어 주었다.

‘갈매기’는 체호프 마니아 뿐만 아니라, 일반관객에게까지 입 소문을 타면서 성황리에 진행중이다. 객석은 언제나 만원이며 부지런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4대 장막전 중 마지막 작품 ‘세 자매’는 체호프가 지겹다는 편견을 가졌던 불특정 다수의 관객마저 체호프의 팬이 되어 낙관하고 있을 정도다.

“체호프는 나에게 종교와도 같습니다. 그에게 인생을 빚지고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전훈이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은 연출가 개인에겐 밀린 과제이며, 거창하게 말하면 숙명과도 같다. 동국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92년 러시아 유학길(모스크바 소재 국립 말리극장 산하 쉐프킨 연극대학에서 연기실기석사 MFA취득, 사람들은 그를 러시아 유학파 1세대라 부른다)에 오른 그는 학창 시절부터 체호프를 좋아했다.

“연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방식으로 체호프의 서거를 기렸을 거”라고 말하는 그에게 체호프는 삶의 교과서이며, 인생의 지표다.

“깐깐하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이런 성격 탓에 타인에게 팍팍하게 굴던 저는, 체호프를 통해 느긋한 삶에서 나오는 여유를 배웠습니다.”

체호프는 유학시절 그에게, 한치 앞밖에 바라볼 줄 몰랐던, 해서 현미경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던 그에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망원경을 하나 선물해 준 셈이다. 또한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청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제를 안겨주었다. 나름대로 치열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비극적 사연들은, 타인에게는 희극적일 수도 있다.

그렇게 담담하게 삶을 바라보는 체호프는 그저 삶을 스케치 할 뿐이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일상화는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노골적일 만큼 뻔뻔한데 그 사연들이 우리의 공감을 산다. 늘 겪는 일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대사는 통통 튀며 살아있었고, 어려운 러시아식 호칭을 과감히 정리해서 불필요한 곳에 신경을 빼앗길 틈을 주지 않았다.

- 직접 번역하며 감각 극대화

“지금까지 체호프 작품은, 영어와 일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 참 맛을 살리기 어려웠죠. 러시아에서 원서로 체호프를 읽었을 때, 지금까지 잘못된 번역본을 읽었구나 깨달았죠. 직접 번역하면서 체호프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많이 노력한 결괍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러프하게 번역한 대본을 배우들에게 나누어주고, 대사를 시킨 후, 그 배우의 성격에 맞게 고쳐 나갔다. 그래서일까. 마치 배우들이 핸드폰으로 수다를 떠는 것을 엿듣는 것처럼 귀에 쏙쏙 들어왔다.

무엇보다 영광인 것은 B77번에 앉은 체호프와 함께 공연을 보았다는 것이다.

안나 역을 맡은 김호정씨는 “체호프가 한가운데 턱 버티고 앉아 공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도 되지만 배우로서 체호프 앞에서 연기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며 연극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서 좋다고 자랑도 한다.

한편의 개그 콘서트 마냥 객석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꼭 체호프가 죽기 전에 “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샴페인을 마셔달라”는 유머러스한 유언을, 전훈이 실현시킨 것 같다. 체호프는 말한다. “인생 그렇게 빡빡하게 살 필요 있나. 축배를 들자구!” 의사였던 체호프가 44세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인 것처럼, 그는 작품을 통해 우리 삶도 그렇지 않냐고 반문한다. 전훈은 죽은 체호프를 객석으로 모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가끔 죽은 자를 깨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에게 진 빚을 무대에 올리면서 조금이나마 갚고 싶은 심정도 있구요. 아무리 파내도 알 수 없는 진실이 있는데, 그것을 알고 싶을 때, 그를 모셔와 너무나 빛나는 그를 세상에 잠시라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관객에게는 즐거움과 유쾌함만 선사"

전훈도 체호프처럼 일상을 바라보는 눈이 담담하다. 모두가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오히려 그의 앞에서는 그저 평범할 뿐이다. 그는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자라왔다. 어릴 적 왼손잡이였던 그의 습관을 억지로 고치려 했던 선생에게 그의 어머니가 직접 학교에 찾아가 “아이가 쓰고 싶은 손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강요받거나, 억지로 무엇을 해내는 스타일이 아닌 그는, 그의 연극에 대해 평론가의 해석보다는 네티즌들의 반응에 더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예술가의 내적 고뇌는 혼자만으로 충분한데 그것을 애써 대중에게 노출할 필요 있느냐”며 “고민은 연출가 혼자 감수하고 대중에게는 즐겁고 유쾌한 것만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연출가 전훈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사명이다.

서울예대 겸임 교수지만, 그의 인상에선 먹물 냄새가 풍기지 않고, 연출가에게서 전해지는 카리스마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에 가까운 이미지에 자유분방한 영혼을 소유한 젊은 남자로 보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정동극장 쌈지 마당을 지나가면 상황은 다르다. 90도로 꾸벅 인사하는 신인 배우들과 스탭들, 스승이 연출한 공연을 보러 온 그의 제자들, 그를 아는 팬들과 연기 동료들, 아버지 뻘에 가까운 배우들이 모두 그를 깍듯하게 대한다. 그는 중심이다.

연극 ‘갈매기’는 상처받을 지 뻔히 알면서도 사랑을 하는 젊은 날의 서툰 초상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평생 마음 아파하며 사는 당신의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아무리 비극적인 사연이 숨어있어도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 러시아에는 여전히 체호프가 살아있다

전훈에게 러시아는 어떤 곳일까? 문득 그가 궁금해진다.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세계? 꿈과 방황이 묻어있는 청춘의 도시? 전훈은 자작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를 갔다. 모스크바 거리/ 언제나 묵묵하고 칙칙하지만/ 인간냄새 물씬 풍기는/ 베덴엔하 거리에서/ 흑빵을 샀다/ 예전 맛이 그리워/ 먹어보았지만/ 시큼한 맛이 안나는/ 일본제 흑빵이라고/ 써있는 것을 못봤다/ 허나 아직도 그곳은/ 체홉이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어찌됐든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간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기에 분명히,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것.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내 인생에 대한 상복”이라며 인생이 죽었다고 말하는 젊은 마샤를 보면, 그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 슬픈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간다는 현실이 더 슬프게 다가온다. 그랬더니 대부분이 그녀처럼 극적이지 못한 인생을 살지 않는가. 그것이 현실이며 인생이라고, 거 보라고 체호프는 아니, 전훈은 말한다. 그가 살짝 얄밉다.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

입력시간 : 2004-10-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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