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의 밤 K의 선택경계에 실패한 軍 '민간인 월북'발표 불구 의구심 증폭

민간인 월북'픽션-인생의 막다른 길 "철책을 뚫자"
2004년 10월의 밤 K의 선택
경계에 실패한 軍 '민간인 월북'발표 불구 의구심 증폭


이런 얘기가 있다. 아니, 있을 수도 있겠다.

2004년 10월 21일. K(37)씨는 오랜만에 등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가 오늘 찾은 곳은 경기도 연천 전곡읍. 젊은 날 청춘의 객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으로 전역한 지 10여년만에 찾은 곳이다. CC(캠퍼스 커플)였던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곳, 지금은 어디서 다들 ‘잘 나가고’ 있을, 유난히도 친했던 3명의 동기들과 재회를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곳도 거기였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억 속의 풍광은 온데 간데 없었다. 군데 군데 빠꼼히 문을 연 다방, 그리고 일개장으로 차려입은 휴가 장병들이 슈퍼에 삼삼오오 모여 게걸스럽게 단 것을 먹고 있는 모습에 온갖 기억들이 반추될 뿐이었다.

그 동안 뒤도 보지 않고 달려 왔건만 10년 전보다 나아진 것 없는, 오히려 후퇴한 자신의 모습이 휘황찬란하게 변한 이곳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한 K. 휴가자들 틈에 합류해 길다랗게 늘어선 공중전화 부스 중 빈 곳에 들었다.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소용 없었다. 10년 전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기억들로 오히려 몸서리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K는 어느 구멍가게에 달린 막걸리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슬그머니 오른 취기에 내밀리듯 K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또 오세요.” “예, 잘 먹고 갑니다.” 유난히도 밝게 대해준 주인 아주머니. 지난 4년간 자신에게 그렇게 밝은 미소로 대해 준 사람을 K는 보지 못했다. 가게를 나와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그 얘기는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또 오세요.’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K였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부산한 거리의 풍경을 뒤로하고 K가 도착한 곳은 한 민통초소 근처. 10여년 전 K가 근무했던 부대의 작전 지역이다. 등치만 컸지, 변화할 줄 모르는 군부대의 특성상 이 곳의 지형과 지물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덕분에 민통선을 넘어 철책선 40미터 후방의 언덕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접근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 취약한 시계(視界) 때문인지 경계 근무자들의 근무 위치와 순찰이 불규칙 했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을 기약 하는 수 밖에.

빠삐용이 이랬을까. K는 악명 높은 기아나 형무소를 탈출하기 위해 절벽 위에서 파도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그 종신 복역수에게 자신을 대입했다. ‘구멍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 친절하던 아주머니 가계에서 구입한 빵과 물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되돌아 갈까. 수없이 이 생각도 해 봤다. 그러나 이 길이 차라리 쉬울 것 같았다.

올해 서른 일곱살의 K. 그 자신이 바로 ‘삼팔선’이다. 입사 몇 년도 안돼 겪은 IMF. 구조 조정의 바람이 있을 때면 성실성 하나로 굳건히 버티던 그였다. 적어도 3년 전까진 그랬다. 그러나 그런 K도 회사의 완강한 압력에 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전전하길 2년. 어느 한 군데 들어간다 하더라도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찾은 곳은 경마장과 카지노. 모든 도박의 처음은 다 이런 것인가. 잭팟은 K를 위해 심심치 않게 터졌다. 그러나 이 역시도 길지 않았다. 도박장으로 출퇴근하는 K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는 결국 딸 다빈이와 집을 나갔고, 그에게 남은 건 도박으로 생긴 1억의 빚이었다.

사채를 끌어다 쓴 게 화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빚 독촉을 하는 ‘어깨’를 하루는 술기운에 옆에 있던 벽돌조각으로 내려 친 것이었다. 그 ‘어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급히 시체는 숨겼지만, 살인자 K를 숨겨 줄 곳은 없었다. 신용불량자인 그가 해외로 도피할 방법도 없었다. 다른 ‘어깨’들에 손에 사체는 곧 발견될 것이고, 그 즉시 사건 용의자 선상에 올라 출국금지처분이 내려질 것이 분명했기에 가는 길목에서 잡힐 것은 명명백백했다.

근무교대와, 순찰 간격은 30분 ~ 1시간 반. 전반야 후반야 근무 교대 직후가 이른바 ‘근무 취약 시간’이다.. 며칠동안 지켜본 보람이 있었다. 10월 25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가방에서 꺼낸 펜치를 들고 K는 잽싸게 움직였다. 보름을 이틀 앞둔 시점이서 월경에 불리할 것 같았지만, 비무장지대로 들어서자 휘영청 밝은 그 달은 K의 이동에 더 없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남자들의 술자리면 단골로 등장하는 ‘군대 이야기’도 K에게 큰 도움이 됐다. ‘열상장비(TOD)의 사각 지대’, ‘지뢰의 부비트랩 식별 법 ’ 등등. 대남, 대북 방송이 꺼져 음산하기까지 한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의 K는 일순 전방의 푸석거리는 소리는 온 몸이 얼어 붙었다. 그러나 이내 안도했다. 고라니였다. ‘그래, 그 녀석을 따라가면 지뢰는 피할 수 있을 거야.’푸석거리는 소리 방향을 따라, 잡초들이 누운 자리만 골라 좇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뒤쪽에서는 제논 불빛이 바삐 움직였다. 이미 GP와 GP를 연결하고 있다는 남측의 추진 철책을 통과한 뒤였다.

이윽고 K앞에 나타난 표지판은 ‘중앙분계선 XXXX호.’ 딸 다빈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K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뒤였다.

- 국방부 "믿어달라"

분명, 한 편의 소설이다. 하지만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군에서 발표한 내용들과 ‘군 관계자’들이 언론에 발설한 내용을 종합하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는 픽션이기도 하다.

군은 무장간첩 등 북에서의 침투 가능성을 배제하고 ‘민간이 월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절단된 철책 주변의 신발자국과 엎드려 기어간 손자국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 있고 △절단된 철책선이 남쪽에서 자른 점으로 미루어 북의 침투 가능성을 배제했다.

또 월북자가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로는 △철책선 절단 부위가 흔히 군에서 절단하는 ‘ㄴ’자나 ‘ㄷ’자 형이 아니고 ‘ㅁ’자로 절단된 점 △절단된 철책선 주변의 신발자국이 군화가 아닌 운동화 자국으로 추정되는 점 △절단한 철책선의 원상복귀 상태가 허술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민간인이 어떻게?”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시원한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믿어 달라”는 것이 국방부의 유일한 공식 답변이다.

월북 인원이 발생하면 3~7일 뒤 감지되는 ‘환영 방송’등 북측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10월 30일자 노동일보의 ‘ 미국 없이 우리 민족끼리 살아 나가자’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 북의 위협이란 한갓 유령에 불과하다”며 “ 한 핏줄을 나눈 동족인 북과 남 사이에는 서로 위협하고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한 것이 이 시기 북측 반응의 전부다. 10월 초 동해안 잠수함 사건과 관련, 첩보 활동을 마친 공작원의 복귀 루트가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일각에서는 일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여의치 못했는지 군은 지난 8년간 언론이 모르고 있던 1996년의 민간인 월북 사건을 29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1996년 9월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신원미상의 월북자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최전방 모사단 GOP(전방관측소)철책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넘어 갔다는 것이다. 당시 군과 경찰, 국정원 요원 등으로 이뤄진 합동 신문조는 이 사건을 신원 미상 민간인 1명이 월북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언론에는 이런 사실을 일체 공개하지 않았던 터였다.

8년 동안 비밀로 하고 있던 사건을 등장 시켜, 이번 사건을 ‘민간인 월북’으로 결론 지으려고 하는 군의 의도가 갈려 있지 않으냐 하는 의혹은 그러나 쉬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 5개의 철책으로 막힌 남과 북

MDL(Military Demarcation Lineㆍ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 떨어져 동서로 155마일에 걸쳐 그어진 선(線)을 일컫는다. 1953년 정전협정에서 설정한 육상 경계선 중의 하나로, MDL의 북쪽으로 2Km 떨어져 동서로 그어진 선이 NLL(Nnorthern Limit Lineㆍ북방한계선),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2Km 떨어져 동서로 그은 선이 남방한계선이 된다.

이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폭 4㎞에 이르는 지대를 DMZ(Demilitarized Zoneㆍ비무장지대)라 하고, 국제 협약에 의해 이 지역의 무장은 금지된다. 우리 정부는 DMZ를 남북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철책이 바로 남방한계선이고, 그 너머 북쪽이 비무장 지대가 된다.

또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는 ‘전초(前哨)’로 불리는 GP(Guard Postㆍ감시경계초소)가 있고, GP와 GP사이에 다시 추진철책을 만들어 남과 북이 서로의 군사 활동을 감시하고 있다. 양 GP 간격은 가까운 곳이 800m, 먼 곳은 14㎞까지 되기도 한다.

결국 남ㆍ북방한계선 사이에는 양쪽 GP의 추진철책까지 포함해 모두 5개(남방한계선상의 철책은 4m간격으로 2중 철책)의 철책이 동서로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남방한계선 남쪽에는 숲엽본營체?보호와 안보를 목적으로 5~20㎞의 민통선(민간인통제선ㆍ민간인통제구역)이 설정되어 있어 사유 재산권이 제한되고, 민간인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돼 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 인터뷰 / 2002년 귀순한 주성일씨

"민간인 월북, 성공 가능성 희박"

2002년 2월 19일 비무장지대를 넘어 귀순한 주성일(23ㆍ연세대 정치외교학과 03학번)씨. 중간고사를 마치고 조금은 여유로워졌다는 그로부터 휴전선 3중 철책 절단 사건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그는 민경(민사행정경찰) - 사단장 연락병 - 보위부 정보통신병 – 대남 방송요원 등을 거쳐 보위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끼던 후임병과 함께 월남했다. 그 후임병이 남한 방송을 녹음해 뒀던 테이프를 대남방송으로 내보내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불을 보듯 뻔한 중징계를 피해서였다. 하필이면, 그날은 김정일 환갑날이었다.

- 군에서 ‘민간인 월북’으로 잠정결론 지었는데.

“나도 비무장 지대를 거쳐서 월남했지만, 민간인이 삼엄한 경비 속에서 그 많은 철책을 뚫고, 그것도 지뢰 하나 안 건드리고 고압선을 넘어 월북에 성공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 비무장지대에 구체적으로 어떤 장애물들이 있나.

“우선 철책 5개, 1Km여 구간의 지뢰밭, 고압전선 4가닥, 50~150m간격으로 설치된 잠복호 등이 있다.”

- 군에서는 짐승들이 다닌 길로 가면 지뢰는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군사분계선 이남의 지뢰밭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북측의 지뢰원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어 지뢰원 관리자가 아니고선 통과하기 힘들다. 지뢰원 보강을 철저히 하라고 상부에서 항상 강조하고 있다. 기한이 지난 지뢰는 즉각 교체된다. 폭우라도 내려 빗물에 지뢰가 흐트러지면 즉각 제자리에 갖다 심을 정도다. 지뢰밭 폭도 300~800m에 이른다.”

- 전력난이 심하다고 하는데, 고압선은 제대로 가동되나.

“국민의 안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전류는 항시 흘려 보내고 있다. 고압전선, 전력 공급용 전봇대만 관리하는 사찰단이 따로 있을 정도다. (남에서 북으로)‘군사 분계선 - 북측 추진 철책 – 고압선’ 순서인데, 2천, 6천, 8천, 1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각각 흐르고 있다. 함께 귀순길에 올랐던 후임병이 바로 여기에 걸려 눈 앞에서 즉사했다.”

- 고압선까지만 무사히 통과하면 월북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나.

“잠복호가 있다. “아군은 없다”는 게 잠복호 근무자들의 야전규정이다. 항상 전시 상태다. 호 밖에서 밤에 움직이는 인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사격이 가해진다. 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 근무자들은 출신 성분이 아예 다른 정예의 부대원들이다. 잠복근무만큼 철저하다. 다른 장애물들은 운이 좋아 통과했다 하더라도 잠복호 근무자들의 경계만큼은 피해 갈 수 없다.”

정민승 인턴기자


입력시간 : 2004-11-03 19:03


정민승 인턴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