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개 '데이' 범람, 이웃과 함께하는 진정한 '나눔의 날'되어야

'야단법석' 혼 빼는 데이마케팅
20여개 '데이' 범람, 이웃과 함께하는 진정한 '나눔의 날'되어야

와인데이(10월 14일), 사과데이(10월 24일), 할로윈데이(10월 31일), 무비데이(11월 14일)….

국적 불명의 데이(day)들이 넘쳐 나고 있다.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대의 이벤트 데이로 자리매김한 발렌타인데이(2월 14일)와 화이트데이(3월 14일)를 비롯하여 특히 매달 14일에 집중 포진,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데이들은 1년에 20여 개가 훌쩍 넘는다.

11월 6일, 빼빼로데이(11월 11일)을 앞 둔 주말 오후. 경기 분당구 정자동에 사는 주부 이모(30)씨는 집 근처 마트에 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빼빼로 과자의 종류가 그리도 많을까. 오색의 현란한 풍선으로 장식된 진열대에는 형형색색의 빼빼로 과자 수십 종이 저마다 독특한 모양과 맛을 뽐내며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기존의 가늘디 가느다란 빼빼로 과자를 100배나 키운 것 같은 원통형의 빼빼로 상품이나 하트 모양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긴 빼빼로 과자 세트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씨는 원래 빼빼로 과자를 사러 간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가격이 싼 500원 짜리 빼빼로 과자 하나를 뭔가에 홀린듯 집어 들었다. “ 무슨 ‘ 데이’니 하며 챙기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막상 예쁘게 늘어선 상품을 보니 은근히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고 말했다. 물론 주 고객은 어린 아이들이다. 엄마를 따라 매장에 나온 어린이들의 고사리 손에는 으레 빼빼로 과자가 쥐어졌다.

- 제과업계 등 즐거운 비명

제과업계는 ‘ 빼빼로데이’ 이벤트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심각한 내수 침체 속에서도 일찍이 6~7월부터 상인들 사이에 물량 확보를 위한 사재기 경쟁이 벌어질 정도. 롯데제과의 간판 제품 빼빼로는 지난 10월 월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0% 오른 130억원. 제과업계 단일 품목 중 월 매출 100억 돌파 기록은 ‘자알리톨 껌’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 회사 홍보팀 안성근 계장은 “초ㆍ중ㆍ고 학생층에 머물렀던 빼빼로 고객층이 근래 들어 직장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 등 갈수록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빼빼로데이는 부산과 경남 지역의 여중고생들이 1자가 4개 겹치는 11월 11일에 “날씬해지라”며 빼빼로를 주고 받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의 특수에 힘입어 롯데제과 빼빼로는 지난 1983년 판매가 시작된 뒤부터 지난달까지 22억갑(누적 매출 4,300억원)이 팔려 나갔다. 한 줄로 늘어 놓으면 지구 둘레를 120회 이상 돌거나 서울 ~ 부산을 5,500회 이상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2000년 260억원, 2001년 300억원, 2002년 400억원, 2003년 450억 등 두 자릿수의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으며, 올해는 연 매출 550억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백화점과 인터넷 쇼핑몰 등도 ‘빼빼로데이’ 특수를 겨냥해 각종 이벤트와 상품을 쏟아내는 데 한창이다. CJ몰(www.cjmall.com)은 11월 11일까지 ‘11♡11♡ 빼빼로데이, 사랑을 전하세요’란 기획전과 함께 꽃바구니를 사면 꽃과 함께 빼빼로를 선물로 보내 주고, 인터파크(www.interpark.com)는 장미꽃 바구니 속에 빼빼로가 들어 있는 빼빼로 장미 상자(3만5,000원)와 빼빼로 귀걸이(3만9,000원) 등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았다. LG이숍(www.lgeshop.com)은 11월 9일까지 ‘핑거로즈와 함께하는 빼빼로데이’ 기획전을 열고 애완 식물과 빼빼로를 묶은 패키지 상품을 선보인다.

이에 대해 인터파크 남창임 대리는 “ 각종 ‘ 데이’가 극성을 부리며 소비자들을 현혹시킨다는 비난도 있지만, 그 날에 맞춰 매출이 부쩍 뛰어오르는 게 사실이다. 평소 안 먹던 먹거리도 즐기고 가까운 사람들과 정을 나눌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과하지 않다면 삶의 활력소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 상업성 짙은 이벤트에 우좇?목소리

그러나 ‘ 실버데이’ ‘포토데이’ ‘무비데이’ 등 ‘ 데이’ 특수를 노리려는 업체들이 만들어낸 각종 기념일이 등장하면서 우려도 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 이민훈 연구원은 “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이벤트 데이가 과연 본인에게 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짚어 보고 선별해서 소비하는 게 현명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벌이는 상업적 이벤트라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전북 전주 시내 초등학교에서 6학년생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79명이 밸런타이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4월 14일), 빼빼로데이의 의미와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이어리데이(1월 14일), 로즈데이(5월 14일), 링데이(7월 14일) 등 비교적 덜 알려진 기념일을 줄줄이 꿰고 있는 어린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정작 이 학생들이 우리나라 기념일은 4대 국경일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 가운데 삼일절과 광복절을 아는 초등생은 각각 42%, 34%였고, 제헌절ㆍ개천절에 대해서는 7~8%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특히 개천절은 ‘ 사람이 곰과 결혼한 날’로, 제헌절은 ‘ 군인들의 명복을 비는 날’ 등으로 오인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 사랑 나누는 천사데이

이처럼 상업성을 띤 이벤트데이는 잘 알면서 대부분의 국경일은 모르는 세태에 반발, 보다 의미 있는 나눔을 위한 날을 제정하자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경기 동두천시 희망 지킴이 천사운동본부는 10월 4일을 천사데이(1004-day)로 지정, 불우 이웃을 돕는 나눔을 실천하는 날로 알려 나가고 있다. 올해로 두 번째. 지난 10월 14일 동두천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 천사마라톤 대회’에는 동두천 시내 5개 학교 학생 1,500여 명을 포함해 모두 2,500여명의 시민이 참가해 1,004km를 달렸다. 이날 행사 수익금 2,000여 만원은 윌슨병으로 투병 중인 정보람(18)양 등의 수술비로 전액 쓰여진다.

동두천 천사 운동 본부 백두원 사무국장은 “ 국적 불명의 ‘데이’ 문화가 갈수록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어려운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천사’ 데이를 전세계적인 이벤트 데이로 알려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11-10 16:46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