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음 속의 보물찾기, 아날로그 향수 가득해요"단파 대역 주파수의 AM방송, 미지의 소리에 희열

[동호회 탐방] 한국 단파 클럽
"잡음 속의 보물찾기, 아날로그 향수 가득해요"
단파 대역 주파수의 AM방송, 미지의 소리에 희열


잡음 하나 없이 곱고 선명하게 들리는 방송에 익숙해져 있는 평범한 라디오 청취자라면, 평소 듣던 라디오 방송에 잡음이나 혼선이 생겼을 때 당장 항의전화를 하러 수화기를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잡음 섞인 방송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듣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 각국의 단파방송을 즐겨 듣는 ‘한국단파클럽(cafe.daum.net/danpa)’ 회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단파방송에 애착을 갖는 데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 ‘한국단파클럽’을 찾아 그들만의 즐거움을 살짝 엿들어본다.

세계의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정보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1999년 10월 개설된 ‘한국단파클럽’은 국내 단파방송 동호회 활동이 취약한 현실에서 독보적인 동호회로 손꼽힌다. 현재 6천 5백여 명을 넘는 회원들이 활동 중이며 회원의 연령 대도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국제정세 객관적 분석능력 얻기
단파방송은 24시간 동일한 주파수에서 항상 방송하는 일반 방송과 달리, 단파대역(1.8Mhz~30Mhz) 주파수에서만 방송된다. 또한 특정 시간대에만 방송하는 데다 주파수도 계절별로 조금씩 달라진다. 게다가 AM방송이기 때문에 잡음이 섞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제약이 많은 까닭에, 손쉽게 라디오를 듣는 일에 익숙했던 초보 회원들은 처음 단파방송을 접하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주파수와 시간을 숙지하고, 간간이 들리는 잡음 속에서 방송 내용을 듣기 위한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단파방송 청취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회원들이 단파방송을 듣는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운영자 오종원(37) 씨는 “오늘날 단파방송의 매력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다양한 시각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즉 동일한 사건에 대해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될 때, 각 국가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도하는 것을 청취할 수 있다.

한국인의 잣대로 여과되지 않은 다양한 시각을 단파방송으로 접하다 보면 이로써 “세상을 보는 중립적인 시각은 물론, 국제 정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분석능력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오씨는 “예를 들어 중국에서 방송하는 중국국제방송의 경우, 한국어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 방송에서는 동북공정과 관련된 내용을 방송하지만, 유독 한국어 방송에서만 방송을 못한다. 이런 것도 단파방송을 들으며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단파방송은 해외거주 동포들과 외항선원에게 고국의 방송을 들려주는 메신저 역할도 한다. KBS의 국제방송인 RKI의 경우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근 늘고 있는 학생 청취자들의 경우, 어학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대학에서 어학을 전공하는 회원 주호석(21) 씨가 그런 경우. 하지만 그는 지금 단파방송 청취 뿐 아니라 단파라디오를 직접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여기저기 다니며 어렵게 라디오 회로도를 구해 직접 만들기 시작한 라디오가 지금까지 3대 째인 베테랑이다.

'라디오 타이완' 방속국의 백조미 팀장(맨 뒷줄 우측 첫 번째)과 함께 정기모임을 가진 회원들. 아끼는 단파라디오와 기념품을 선보였다.

이처럼 단파방송에 대한 애착은 또 다른 인접 분야에 대한 취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예컨대 현재 아르헨티나에 거주 중인 회원 박승원(51) 씨는 단파라디오를 접하면서 수신장비에 관심이 늘게 돼 지금까지 50여 종의 전문 수신장비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단파방송을 들으며 얻을 수 있는 독특한 경험으로 베리 카드(Verification Card) 수집을 꼽을 수 있다. 국제단파방송을 들은 이가 방송청취 일시와 소감을 적어 해당 방송국으로 청취 리포트를 보내면, 방송국에서는 답례로 수신확인증에 해당하는 베리 카드를 보내주는데, 엽서와 비슷한 이 카드에는 각국의 문화, 자연, 종교 등 다양한 그림이 인쇄돼 있어 좋은 기념품이 된다.


간첩으로 몰리는 해프닝도
아직까지 대중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단파방송을 듣다 보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종종 일어난다. 가장 흔히 경험하는 것이 ‘간첩 소동’. 단파방송은 저녁이나 새벽에 잘 잡히기 때문에, 특히 과거 냉전시대에는 밤늦게 단파방송을 듣다 ‘거동 수상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또 해외 단파방송국에서 기념선물로 달력이나 메모지를 보내줄 때가 있는데, 해외 달력이라 기념일과 휴일 날짜가 맞지 않아 휴일을 근무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과거에는 단파라디오가 있어야만 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웬만한 단파방송국들은 대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다. 편리함을 추구한다면 인터넷을 이용해도 되지만,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만끽하고 싶다면 아무래도 단파라디오로 단파방송을 듣는 것이 제 맛이다.

단파라디오의 가격은 2만 원부터 수백만 원대까지 다양하며, 초보라면 2만 원 정도의 저렴한 라디오로도 VOA(미국의 소리), RTI(라디오 타이완) 등 대표적인 방송을 청취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처음부터 값비싼 라디오를 사기보다 점차 좋은 기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요령인데 중급 청취자의 경우 보통 20~30만원 선이면 적당하다.

간편한 것, 단순한 것, 빠른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파방송 동호인들의 모습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 청취자를 대상으로 방송하는 한국어 방송을 포착할 때의 은근한 뿌듯함을 느껴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제3세계 방송국의 단파방송이라도 반가움은 마찬가지다. 특히 희미한 잡음 너머로 들려오는 미지의 소리를 포착했을 때는, 숨은 보물찾기에 성공한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단파방송 청취의 진정한 매력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미약한 전파를 잡기 위해 도전하면서 그 속에 숨은 나만의 보물을 발굴하는 즐거움에 있을 것이다.

고경원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4-12-08 22:13


고경원 객원기자 aponi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