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올이 정성을 맺는 禮의 미학손으로 꼬아 만드는 한지공예, 현대적 디자인과 색감으로 전통의 멋 더해

[한국의 장인들] 지승공예가 나서환
올올이 정성을 맺는 禮의 미학
손으로 꼬아 만드는 한지공예, 현대적 디자인과 색감으로 전통의 멋 더해


종이 지(紙) 줄 승(繩) – 지승은 한지를 줄처럼 꼬아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드는 공예이다.

특별한 장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옛날 사람들은 누구나 하한기나 동한기에는 쓸모없는 묵은 종이를 가지고 지승을 만들었다. 조그만 동구리부터 커다란 멧방석까지 집안에서 두루 쓰이는 세간살이가 지승으로 만들어졌다.

종이가 재료라 가볍고 소리가 안 나는 것이 특징이라서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은 요강이었다. 여자들이 가마타고 다니던 시절, 가마안에 넣어주는 요강에서 소리가 나면 가마꾼 듣기 민망하기 때문에 여염집에서는 지승으로 만든 요강 하나씩은 대개 갖고 있었다. 비록 종이로 만들었지만 하도 촘촘해서 옻칠은 물론 콩댐만 해도 물 방울 하나 안 샐만큼 치밀한 것이 지승이었다.

가마가 사라지고 요강이 사라지고 한국의 일상생활이 현대화하면서 온갖 전통 기물이 사라지는 가운데 지승공예도 점점 잊혀져갔다.

나서환(45ㆍ서울 광진구 구의동)씨는 잊혀져가는 지승을 오늘에 되살려내는 지승공예가 가운데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이다.

기름집하며 손님 기다리다 시작
충남 서천 사람인 그는 원래는 포크레인을 운전하던 중장비 기사였다. 비록 9개월만 다니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82년에는 대기업에 들어가 서울 충무로에서 지하철 3호선을 위해 땅을 파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직장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고 한다. 딱히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않고 닥치는대로 일하던 그는 85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혼인을 하고 구의동에 정착하면서 참기름집을 시작했다.

기름집에서는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일이 가장 많았다. 그가 그 때 생각해낸 일이 지승이었다.

지승은 그의 아버지가 아주 잘 만드시던 것이었다. 서천의 농부인 아버지는 농사일이 한가해지는 겨울철이면 한지를 꼬아서 장난감통도 만들고 씨앗통도 만들었다. 복주머니 모양에 씨앗이 들어가는 구멍을 조그맣게 내고 위에는 끈과 고리를 달아 천장에 올려놓게 만든 씨앗통은 편리하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웠다.

기름집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한가한 시간에 종이를 꼬던 그는 처음에 그것이 업이 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방송에서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자 그는 자신의 작업이 뭔가 뜻있는 일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골에 계신 아버지한테 물어가며 옛물건들을 체계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0년쯤 선릉에 있던 12공방에 우연히 구경을 갔다가 한국전승공예대전을 알게 됐다. 가뜩이나 지승이 재미있던 나씨는 그 때부터 지승을 업삼아 매달렸다.

하지만 지금도 지승공예는 한지공예 가운데서도 가장 덜 알려진 분야라서 만든다고 돈이 될 리 없었다. 대신 재료값은 만만치 않았다. 지승공예는 반드시 우리나라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종이값을 아껴보려고 중국 종이도 약해서 끊어測囑鏶굅?했다.

닥나무 종이 한 장에 4,000원이니 모자 한 개만 짜도 종이가 10장, 4만원쯤이 재료비로 든다. 다과상이면 한지가 200장 들어가니 종이값만 해도 80만원쯤 든다. 그러니 기름 한 병 팔아봐야 몇 천원 받는 형편에서 아내의 잔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

나씨의 아내인 봉효순(40)씨는 “처음에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걸 뭘 그렇게 잡고 있냐고 말렸지요. 말려도 말려도 소용없어서 하다가 말겠지 하고는 포기했는데 지치지 않고 계속하네요”하고 웃는다.

나씨는 지승을 하면서 지치는 법은 절대 없단다. 해도 해도 재미있어서 요즘도 밤을 꼴딱 새는 날이 많다. “이런 것 쓰면 배우러 오는 사람 없는데” 하는 그는 지승을 하다가 어금니가 다 나가 버렸다.

종이 꼰 것을 야물게 이어 붙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에 힘을 꽉 주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손에 물집이 잡히는 것은 보통이고 오래 걸리는 돗자리나 멧방석을 할 때면 지문도 사라진다. 검지는 안쪽으로 휘었고 꼰 자리를 눌러 다지는 오른쪽 약지와 소지는 둘째 마디 윗쪽에 굳은 살이 박혔다. 그래도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전에는 낚시가 취미였지만 지승을 하고부터는 낚시도 잊었다. 오직 지승이 일이자 즐거움이다.

나씨는 94년에 짠 지승 멍석으로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상을 받았다. “상금 200만원을 받았는데 이 걸로 종이 사면 평생 쓰겠구나, 기분이 말도 못하게 좋았어요.” 종이값 많이 들어가는 게 늘 눈치보였던 나씨는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부터 그는 더욱 지승에 빠져들었으니 200만원은 반년만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요즘도 매년 500만~600만원을 종이값으로 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배웠으면"
그는 지승으로 못 만드는 것이 거의 없다. 찻주전자와 찻잔, 차탁 멧방석 씨주머니 향낭 모자 망태기 돗자리 멍석 쌀통 등 다양하다. 심지어 조끼나 마고자도 짜보았다. 그가 만든 찻주전자에는 차잎을 우려내는 거름망까지도 지승으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그가 직접 개발한 디자인이다. 차 도구는 물이 새지 않게 옻칠을 한다.

돗자리에는 방울과 고리로 된 두겹잠금장치까지 있다. 이것은 아버지한테 배운 전통 방식이라는데 모양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됐다.

그는 “전통에서 나온 디자인이 무척이나 세련되고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그걸 너무 모른다”고 안타까워한다.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재현했고 널리 보급하고 싶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조족등(照足燈)이다. 말 그대로 발을 비추는 손전등인데 안에는 대나무를 깎아 고리를 매단 촛대걸이가 달려있어서 등을 켜면 지승의 촘촘한 틈 사이로 불빛이 새나오는 것이 환상적이다. 종이로 만들어져 가벼운 것도 장점. 가장 놀라운 장점은 등 안에 들어있는 촛대걸이가 등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360도 회전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등을 아래로 비추든 위로 올리든 촛대는 늘 똑바로 서있다.

촛대걸이 안에 무거운 돌로 추를 단 것이 비결.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멋진 물건들을 썼는지 요즘 사람들이 알면 놀랄 것”이라고 나씨는 말했다. 그는 지승공예를 통해 바로 이런 옛스런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고 싶단다. 하지만 “외국에서 직수입된 것은 수공예품의 가치를 높게 쳐줘도 전통에서 발전해온 것은 몰라주니까 참 답답”한 것이 또 현실이다.

그는 2001년에는 지승망태기로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동상을 받았다. 그 작품도 200만원에 사준다고 하여서 기대가 컸는데 그 후로 연락이 없어서 그는 종이값을 못 번 것이 가장 안타깝다.

원래 지승의 한철은 겨울이었다.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소일삼아 재미삼아 하던 것이 지승이었다. 헌데 도심의 겨울은 너무 건조하다. “손이 촉촉해야 종이가 잘 꽈지기 때문에 여름이 작업하기 좋다”고 했다.

가끔 그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특강을 하거나 부여의 전통문화예술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새끼꼬기 하나를 가르치느라 1시간이 옴빡 들더라고 한다. 전에는 집안에서 자연스레 익히던 전통의 손재간들이 이제는 힘을 써서 배워야 겨우 익히는 것이 되었으니 그 그 손재간을 갖추고서야 배울 수 있는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져가고 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지승을 배웠으면 하는 그로서는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그럼 그의 집에서는 그게 되고 있을까? 둘째인 딸 진희(11)양이 아버지 곁에서 눈썰미와 손재간을 익히고 있단다. 초등학교 5학년인 진희양은 인터넷에 아버지의 작품을 소개하는 카페도 만들었다. 아버지의 고군분투가 안타까워서라는데, 서울 인사동의 공예전문상가인 쌈지길 천호선 대표가 나씨의 작품에 매료되어 쌈지길에서 소개를 한다니 아버지의 고군분투는 곧 끝날 모양이다.

서화숙 기자


입력시간 : 2004-12-29 16:30


서화숙 기자 hssu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