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데오 거리는 선수들의 사냥터번호 따내고 일주일 뒤 '섞는다'외제차 타고 일정지역 맴돌다 단정한 차립으로 수줍은듯 '작업''즉석'은 피차 약속있고 작선상 금물, 술 약속 땐 '하룻밤 OK'사인

[이색지대 르포] 압구정동 헌팅족 24時
로데오 거리는 선수들의 사냥터
번호 따내고 일주일 뒤 '섞는다'
외제차 타고 일정지역 맴돌다 단정한 차립으로 수줍은듯 '작업'
'즉석'은 피차 약속있고 작선상 금물, 술 약속 땐 '하룻밤 OK'사인


“1시간만 지켜 보시면 선수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괜히 말을 걸지는 마세요. 공들여서 작업에 열중하는 선수들을 방해할 수 있으니까요.” ‘헌팅족.’우리는 그 선수들을 이렇게 부른다.

처음 압구정동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10여 년 전, 소위 ‘잘 나간다’는 이들의 주된 놀이 무대가 홍대 주변에서 압구정동으로 옮겨가던 즈음이었다. 외제차에 명품 의상으로 무장한 이들을 두고 매스컴은 ‘야타족’ ‘오렌지족’ 등의 이름을 붙였고, 영화와 드라마는 이들을 주된 소재로 활용했다. 그렇게 이들은 사회적 비난을 한 몸에 받았으나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 뒤로 잊혀져 갔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요즘, 다시 ‘헌팅족’이라는 이름으로 압구정동으로 돌아왔다. 소개로 알게 된 ‘헌팅족’ 서동인(가명ㆍ남ㆍ28)씨에게 취재 협조를 부탁하는 전화를 걸자 우선 한 시간 동안 자신이 알려준 지점에서 주변 정황을 살펴볼 것을 요구했다.

10분 주기로 주변 맴도는 외제차
2004년 12월 25일 밤 9시경에 도착한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한 편의점 앞에는 수 많은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은 토요일 밤인지라 유흥가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편의점 앞에 위치한 포장 마차에도 사람들이 북적댔다. “가만히 지켜 보고 있으면 10분 가량을 주기로 계속 주변을 맴도는 외제 차량이 보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편의점 앞에 가만히 차를 세워 두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바로 그들이 사냥감을 기다리는 헌팅족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 도착한 취재진은 편의점 앞에 세워진 BMW 차량 한 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을 오가는 외제차를 유심히 살펴보려 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정확히 분간하는 게 힘들었다. 20여분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그 BMW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인 거리는 채 10여m뿐.

조수석에서 내린 한 20대 남성이 그 옆 인도를 걸어가는 여성 두 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놀라는 눈치를 보이던 두 여성은 금세 이 남성의 얘기에 웃음을 보이며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렇게 5분 가량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이 남성은 자신의 휴대폰에 여성들의 연락처를 저장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여성들이 차에 함께 타지 않을 것으로 보아 이들의 ‘사냥’은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였다. 여성들은 그 자리를 떠났고, 남자도 BMW 차량에 올라탄 뒤 유유히 사라졌다.

다시 주변 정황을 지켜보며 기다리기를 15분, 취재진은 방금 전에 사냥에 나섰던 BMW가 다시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이 바로 서씨가 얘기한 ‘헌팅족’ 선수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약속 시간인 10시가 조금 지나서 서씨에게 연락이 왔다. 로데오 거리를 따라 계속 들어 오면 유흥가 중심에 위치한 연예인 포장마차(이하 포차)M 앞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그곳에 도착하니 서씨가 자신의 벤츠 승용차 앞에 그를 소개해 준 취재원과 같이 서 있었다.

서씨와 인사를 나누기가 바쁘게 우리는 벤츠 승용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한 바퀴 돌며 선수들이 압구정동에서 주로 움직이는 행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만난 M 포차나 S 갈비집이 기점입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계속 주변을 몇 바퀴 돌며 사냥감을 찾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루트는 대략 이랬다. 크게 봤을 때 씨네시티 극장부터 로데오 메인거리 입구까지가 그들의 행동 영역이다. 씨네시티 극장 옆 길로 들어가 M포차와 S갈비를 지나 C 아파트 옆으로 해서 로데오 메인거리로 나온다. 다시 큰 길로 한 바퀴 돌아 씨네시티 극장 옆길로 향하는 게 이들의 사냥 루트다.

주된 대기 장소는 문제의 BMW가 서 있던 편의점과 인근의 또 다른 편의점 앞이다. 사냥 루트를 돌아다니거나 대기 지점에서 주변을 오가는 여성들을 지켜보며 사냥감을 찾는 게 그들의 일과다.

약속시간 전에 나와서 다음주 위한 사냥
이들의 작업 방식 역시 예전 ‘야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이 길가를 걷는 여성들에게 다가가 얻어 내는 최고의 성과는 ‘연락처’가 전부였다. BMW를 타고 사냥에 나섰던 남자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은 취재진의 판단착오에 불과했던 것이다.

“보통 1주일 전쯤에 사냥한 여성과 밤 11시나 12시경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뒤, 2시간가량 일찍 나와서 다음 사냥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만나자 마자 술을 마시자고 하면 실패 확률이 크기 때문에 첫 만남에서는 연락처 정도만 받아내고 며칠 동안 전화상으로 친분을 쌓은 뒤 만날 약속을 잡는 것이죠.”

약속을 밤 11시나 12시 정도로 늦게 잡는 이유는 상대방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 시간에 술 약속을 잡았는데 나오겠다고 하는 여성은 대부분 ‘그날은 집에 안 들어간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본다. 적절한 핑계로 약속 시간을 늦추자고 부탁하면 응하는 여성이 의외로 상당수라고 서씨는 설명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선수의 기본 준비 자세라는 게 서씨의 강조 포인트였다.

우선 차량의 경우 외제차 세단이 좋다. 국내차의 경우 최소한 그랜저 수준이 요구된다. 예상외로 스포츠카나 SUV 계열의 차량은 잘 안 먹힌다고 한다. 특히 작고 귀여운 유럽형 모델 차량을 여성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이 역시 사냥에는 유용하지 못하다고 한다.

또 의상이 절대로 화려해서는 안 된다. 멋을 부릴 경우 선수임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수준이 적당하다고. 상황을 곁들여 설명하자면 ‘부근에 살고 있는데 잠시 일이 있어 방금 집에서 나온 듯 한 옷차림’이 가장 선수다운 복장이다.

대화 내용 역시 단조롭다. 물론 주된 내용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므로 연락처라도 알려주면 고맙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대부분 연락처를 알려준다는 게 서 씨의 설명이다.

“최대한 수줍은 듯 접근해서 편하게 말을 붙이면 연락처를 알려 줍니다. 당장 술을 마시러 가자는 게 아니라 별 부담감 없이 연락처를 알려주는 게지요.”

이후 3일 정도 매일 전화를 해서 친근감을 쌓는 게 그 다음 순서. 그런 과정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 데 반드시 약속 시간은 11시나 12시 경으로 정한다. 이에 응할 경우 별 무리 없이 또 한 번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이다.

약속이 잡힌 날 두 시간 가량 일찍 나와서 다음 사냥 대상의 연락처를 따낸 뒤 약속 장소로 향한다. 1차는 주로 소주를 마신다. 2차로 맥주를 한 잔 마시러 가거나 노래방을 가는 데 보통인데 이 정도 수준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데 대한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진다고. 하지만 쉽게 틈을 보이지 않는 여성의 경우 최후의 수단인 한강 둔치로 이동한다.

술 먹고 고수부지 들렀다 '섞으러' 간다
“운전을 하려면 술을 깨야 하니 잠시 찬 바람을 좀 쐬러 가자고 얘기하며 한강 고수부지로 향합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차 안으로 들어 오면 그 온기에 대부분 잠이 듭니다. 차가운 데 있다 따스한 차 안으로 들어오면 술 기운이 확 오르기 마련이지요. 그런 상태에서 따뜻한 데 가서 쉬었다 가자고 하면 대부분 OK를 합니다. 그 상황에서도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아직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서씨는 두 시간 가량 압구정동을 돌아 다니며 실제 사냥중인 것으로 보이는 광경을 지목, 알려주었다. 그도 약속 시간 12시가 가까워지자 사냥해둔 여성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

서씨는 중견 기업체에 근무중인 회사원이었다. 다만 사주가 부모라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 대부분의 헌팅족은 이런 부유층 자제들로, 예전 ‘야타족’이나 ‘오렌지족’의 계보를 잇고 있다.

불황으로 허덕이는 한국 사회. 하지만 고급 외제차의 판매량은 증가 추세가 계속되고, 이를 동원한 헌팅족 문화는 한국의 또 다른 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재진 자유 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04 16:18


조재진 자유 기고가 sms9521@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