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 최대 불안요인, 국가·기업 경쟁력 하락의 원인될 수도

죽음 부른 비정규직의 비애
노동시장 최대 불안요인, 국가·기업 경쟁력 하락의 원인될 수도

전국 비정규직 연대 회원들이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비정규직이 마침내 죽음을 불렀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된 40대 근로자가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12월 27일 한진중공업에서 촉탁직 노동자로 근무하던 김춘봉(49, 마산시 봉암동)씨가 12월말 계약 해지를 앞두고 공장 안에서 목을 매 숨진 것이다.

“명예 퇴직을 하면 마산 공장을 운영할 때까지 촉탁 근무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권해 명퇴를 했으며, 이 조건을 근로 계약서에 명시는 안 해 줬다 …나 같은 사람도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비정규직 철폐가 이뤄져야 한다. 나 한 사람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잘 되면…비정규직이란 직업이 정말 무섭다…”김씨는 편지지 5장 분량의 유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과 회사에 대한 분노를 이 같이 절절하게 토해냈다.

1980년 입사한 김씨는 생산직에 있다가 산업 재해를 당해 9급 판정을 받고 가스 창고 관리 등의 일을 해 오다, 2003년 4월 회사의 종용으로 명예 퇴직했다. 김씨는 이후 촉탁 사원으로 재입사, 2003년 말 한 차례 재계약까지 맺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 회사측은 김씨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전제로 가스 창고 관리를 외주 업체에 맡겼고, 김씨가 외주 업체에서 계속 근무하도록 주선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기준, 540만명으로 급증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 시장에 대한 최대의 불안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 재해 뒤 명예 퇴직을 당하고, 비정규직으로 전환한 후 해고 되는 과정을 밟은 김씨의 죽음은 비극의 서막일 지도 모른다. 김씨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언제든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이다.

사실 근래 들어 비정규직 증가추세는 놀라울 정도다. 지난 2000년에만 해도 전체 근로자중 27.8%선에 그쳤던 비정규직 비중이 2003년엔 37%로 늘었다. 3년새 10% 포인트 가량이나 증가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말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부의 공식 통계에서 최초로 500만 명선을 돌파했다.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 수는 2001년 360만명, 2002년 380만명, 2003년 460만명, 2004년 540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며 노동부가 2004년 12월 15일 제시한 수치가 분명히 제시한 사실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이처럼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증한 것은 계약직 등 고용 보장을 받지 못하는 한시적(限時的) 근로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시적 근로자가 증가한 이유로는 △불투명한 투자 전망 △기업의 정규직 채용 축소 △경력직 선호 △ 계약직 채용 후 선별적 정규직 전환 등 인사·채용 제도 관행에 들이닥친 변화의 바람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의류회사 계약직 사원은 K(28.여)씨는 지난해 10월 회사로부터 갑작스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재계약을 3일 앞둔 시점이었다. 1년 6개월 전 정규직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 그녀는 첫 출근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계약직 전환 통보를 받고, ‘년내로는 정규직 전환과 계약직에 따른 고용 불이익이 없다’는 조건 아래 입사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던 회사측에서 돌연 해고를 통지한 것이다. 그녀는 “인간적으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에 응어리가 져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비정규 노동법 개악저지 양대노총 전국노동자 대회에 참가한 한 노동자가 파견법 철폐 주장이 담긴 장식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 최흥수 기자

고용불안·임금차별 이중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이처럼 고용 불안 뿐 아니라 임금 차별과 노동 기본권 등을 보장 받지 못하는 환경에 처해 있다. A통신회사의 호엽냠?坪막?근무하는 L씨는 지난달 파견직으로 전환되면서 임금이 절반 이하로 크게 삼각됐다. 그녀는 “정규직으로 일할 때 연 2,000만원이 넘는 급여를 받았는데 똑 같은 일을 하면서 파견직으로 전환 후 월 80만원 밖에 받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과거 고연령과 저학력ㆍ단순직 등에 많았던 비정규직이 최근에는 20~40대의 핵심 근로 계층ㆍ고학력자ㆍ전문 기술직 등에서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노동부가 통계청이 지난해 8월에 실시한 ‘경제 활동 인구 부가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대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은 2001년 20.8%에서 올해 23.8%로 늘었고, 30대의 비정규직 비중은 2001년 25.1%에서 26.5%로 증가했다.

학력별로는 대졸 이상의 경우 남성(18.8%→29.3%)과 여성(17.2%→25.3%) 모두 크게 늘어, 비정규직 비중이 2001년 18.2%에서 2004년말 27.3%로 뛰었다.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발견된다. 예전에는 비정규직의 대명사였던 단순 기능ㆍ기계 조작ㆍ단순 노무직이 같은 기간 동안 50.0%에서 47.0%로 비중이 다소 감소한데 반해, 전문ㆍ기술ㆍ행정관리직과 사무직은 각각 14.1%에서 17.5%, 8.1%에서 13.4% 등으로 증가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학력이 낮고, 고연령인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돼 온 비정규직 문제가 이제는 전업종과 전연령층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마지 못 해’ 선택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일자리 선택 동기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 ‘현재의 일자리에 만족했기 때문에’라는 응답이 정규직의 60.5%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26.1%였으며,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라는 응답은 38.8%로 나타났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기업이 근로자를 경쟁력의 원천으로 보지 않고, 비용 절감의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경기침체·사회분열로 이어질 가능성
이처럼 비용 절감 효과를 위해 비정규직을 무분별하게 늘려 가는 현재의 세태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국가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우진 연구위원은 ‘금융 브리프’ 최근호에서 “2004년 9월말 현재 우리나라 은행의 수익성 지표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좋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영업을 잘 했다기보다 비정규직을 과도하게 활용한데 따른 것”이라며 “이렇게 비정규직이 증가할 경우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부족하게 돼, 결국 고객이 이탈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9월 노동부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을 확정하고 입법 예고한 비정규직 법안이 2005년 임시 국회에서 다뤄질 경우, 비규정직을 둘러싼 사회 불안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기간제 근로의 기간제한을 현행 1년(현 근로기준법)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이를 전 업종에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비정규직의 보호가 아니라 남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또 비정규직 차별금지안에 대한 기업측의 반발도 충분히 예견된다. “기업에는 부담일 뿐만 아니라 차별 금지 구체 절차에 관한 소송 또한 남발될 것이므로, 결국 노사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요지의 반대다.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남용은 저소득계층을 양산하고, 이는 다시 경기침체와 사회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2005년 을유년 노ㆍ사ㆍ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 가야 할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김유선 소장은 “비정규직이 확산될 경우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의 길은 더욱 요원해진다”며 “노동자와 기업의 실질적인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비정규직 법안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5-01-04 18:35


배현정 기자 hjbae@hk.co.kr